국내 헬스케어디자인 선구자 인제대 디자인연구소 백진경 교수

[청년의사 신문 김선홍] 최근 국내 의료계에 ‘디자인’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치열한 경쟁에서 환자들에게 속된 말로 ‘먹히는’ 병원이 되려면 전통적 의미의 의료서비스 외에 그들을 사로잡을 무언가가 필요하다. 플러스알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헬스케어디자인’이다.

국내에서 헬스케어에 디자인을 처음 접목시킨 사람은 인제대 디자인연구소장인 백진경 교수다. 국내 헬스케어디자인 분야 ‘1세대’이자 병원 안에 ‘디자인실’을 처음 만든 사람이 바로 백 교수다. ‘주어진 목적을 실체화하는 것’이란 의미의 라틴어 ‘designare’가 디자인의 어원이듯 헬스케어디자인도 ‘의료 및 건강에 한해 주어진 목적을 실체화하는 것’이라는 게 백 교수의 설명이다. 공간 디자인(병원 디자인), 의료기기 디자인, 서비스 디자인은 물론 질병 예방과 건강관리를 위한 IT 기술도 헬스케어디자인에 속한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백 교수가 병원에 발을 들여 놓고 ‘헬스케어디자인 박사’가 된 계기는 무엇일까.


병원 CI 제작하다 디자인실까지

백 교수를 의료 분야로 이끈 사람은 그의 지도교수였다. 지난 1980년 서울성모병원 CI(Corporation Identity)를 제작하고 있던 지도 교수가 “너도 병원 일 한번 해봐라”고 한 것이 계기였다. 지도 교수를 통해 병원에도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고 미국 미시건대로 유학을 가서도 이 경험을 바탕으로 헬스서비스센터(University health service)에서 나오는 리플릿이나 표지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단순한 아르바이트일수도 있었지만 백 교수는 미국 병원에는 ‘디자인만’ 담당하는 인력이 따로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귀국해서도 병원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대형병원들이 들어서면서 대학 디자인학과 교수들이 병원 HI(Hospital Identity)를 제작할 일이 종종 생겼다. 디자인 사무소에 맡기면 그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백 교수에게도 기회가 왔다.

“당시 건설 중이던 상계 백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후배들과 의기투합해서 건축사 사무실에서 디자인 작업을 했어요. 하지만 병원과 디자이너 간 연결고리가 확실치 않아 답답했어요. 결국 1988년 백병원 안에 디자인실을 차렸죠. 병원을 신축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심볼, 로고뿐만이 아니었어요. 디자인 매뉴얼을 만들어서 병원에서 사용되는 표지판은 물론 병원을 상징하는 색도 정해 나가기 시작했죠. 상계백병원을 시작으로 서울백병원, 부산백병원 등 병원별로 색을 정했지만 인테리어 등에서는 통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어요. 최근 오픈한 해운대백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원 내에 ‘디자인실’이 생긴 국내 첫 사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제대 백병원의 정체성은 확고해졌고, 사람들이 서서히 병원 디자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병원 디자인’ 아픈 사람들 위한 것

백 교수는 그러나 병원 현장에서 10여년을 일한 뒤에야 병원에서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때 쓴 논문이 ‘병원 디자인’이다.

“일을 하다 보니, 병원이라는 곳을 알게 됐어요. 의사와 간호사들 외에도 상대해야 하는 사람도 많고 업무도 다양한 곳이죠. 특히 병원 내 곳곳의 위치가 굉장히 자주 바뀌고요. 그러다보니 디자이너는 병원 곳곳을 꿰뚫고 있어야 하죠.”

특히 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주목했다. “다른 디자인 분야는 건강한 성인 남자, 미국으로 따지면 와스프(WASP)를 타깃으로 하지만, 헬스케어디자인은 노인, 아픈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진짜 필요한 디자인은 ‘한 번에 못 찾아서 두 번 왔다갔다 하게 해 화나게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후 백 교수는 ‘환자 경험’과 그에 적합한 디자인이란 어떤 것이 돼야 하는가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의료와 기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디자인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예술철학, 체육학, 역학공학, 디자인심리학, 간호학 등 다양한 분야 박사들과 함께 기반 연구를 진행했다.

그렇게 또 10여년. 정부는 물론 산업계와도 여러번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연구 실적들을 쌓아 갔고 어느덧 인제대 디자인연구소는 카이스트(KAIST)와 함께 헬스케어디자인 분야의 선두주자가 됐다.

백 교수는 현재 헬스케어디자인을 육성하는 ‘학·연·산 연구성과 교류회’(한국연구재단이 인문사회계열 육성을 위해 학계와 산업계의 교류를 지원하는 사업)의 총괄 책임자이자 헬스케어디자인학회 부회장이다. 대학에서는 헬스케어서비스디자인 인력 육성을 담당하고 있다.

2014년, 드디어 조명되는 ‘의료+디자인’(Collaboration)

그리고 2014년. 백 교수는 의료에서 디자인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시기라고 했다.

“이제 의료 쇼핑을 하는 시대가 됐어요. 환자들이 병원에 기대하는 기대치도 높고, 병원이 운영되는 상황도 다르죠. 모든 정보는 공개되고, 소문도 빨리 퍼져요. 변화해야 할 때인 거죠. ‘헬스케어디자인’이라고 하니까 새로운 꿀단지가 등장한 줄 알지만 사실 변해야 살아남는다는 건 예전부터도 알고 있었어요. 디자인적인 방법론을 적용했을 뿐이죠. 병원 혁신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지금에야말로 ‘디자인’이 그 변화를 이끌어 가는 한 축이 될 것입니다.”

백 교수는 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은 의사들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자인이 더해져 의료의 질이 높아지면 궁극적으로 그 혜택을 누리는 건 바로 환자들입니다. 하지만 의료계는 폐쇄적인 성향이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이 헬스케어디자인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기 보단 의사들이 나서서 얘길 해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에요.”

이때 필요한 것이 다른 분야 전문가끼리의 대화를 통한 ‘융·복합’이라고 했다.

“1997년에 인제대 서울캠퍼스에 보건대학원이 생겼어요. 같은 건물을 쓰다 보니 보건대학원장님과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게 됐죠. 그랬더니 원장님이 ‘병원을 디자인하니까 깨끗하고 예뻐져서 보기 좋다’며 간호사, 의사, 개인병원 원장, 보건복지부 공무원 등에게 디자인의 중요성을 알려야 한다고 했죠. 그렇게 특강을 하기 시작했고 ‘병원디자인서비스’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대화가 또 다른 이들에게 가교역할을 한 거죠. 아직 의사들에게 디자인의 개념이 익숙하지 않지만 그런 만남의 기회가 많아지면 금방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진행되는 의료와 디자인의 콜라보레이션에 동참하는 의사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는 백 교수의 말이 실현될 그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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