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카스터대 스티븐 베번 명예교수 "치료했다고 끝이 아냐"

[청년의사 신문 박기택] ‘몸이 아프면 생산성이 떨어진다. 생산성이 떨어지니 고용주는 싫어한다. 주변 직장동료들에도 민폐를 끼치는 것 같다. 일을 그만둔다.’


이처럼 ‘아프면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공식이 우리 사회에 암묵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전문직이냐 일반노동직이냐 등에 따라 차이가 다소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시각과 관행이 뿌리박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내에서 인구노령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인구 감소에 대한 우려가 나온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사회 전반에 걸쳐 논의가 이뤄지고 있지만, 이 속에서 근로자들의 건강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노동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반면 유럽은 2000년대 중반부터 직업 관련한 ‘근골격계질환’(musculoskeletal Disorders, 이하 MSD)을 관리함으로써 노동생산성 유지 및 향상을 위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다시 말해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근로자들의 건강을 조기에 관리하고, 또 아픈 이들이 최대한 근로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공감대를 이끌어 낸 것이 영국의 비영리 연구재단인 ‘The Work Foundation’ 주도로 이뤄진 ‘Fit for Work’라는 연구프로젝트라는 것이다. ‘Fit for Work’ 프로젝트는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조기 진단 및 조기 치료가 노동 생산성 제고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를 근거로 유럽 각국의 정책 변화를 이끌어 냈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 특정 국가의 연구결과를 다른 국가에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해당 국가의 MSD 현황과 보건복지, 노동 환경 등을 감안해 그 지역 특성에 따른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정책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MSD에 조기 개입해 치료 기간을 5일 단축함으로써 ▲일시적 장애 증상 지속기간 46% ▲영구적인 장애 발병 40% ▲의료자원의 사용 40% 등을 각기 감소시켰다는 결과가 도출돼, 정부차원에서 MSD 관련 지원 정책이 수립되기도 했다.

지난 2007년 영국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현재 전세계 35개국으로 확산됐으며, 올해 한국에서도 첫 관련 보고서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달 초 국회에선 ‘노동 건강복지시대, 노동자의 근골격계질환 관리와 노동생산성 현황과 과제’란 제목으로 MSD 관련 토론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는 숙명여대 경영학부 권순원 교수 등 한국판 ‘Fit for Work’ 보고서 참여 연구자들과 The Work Foundation 노동효율성센터 이사이자 영국 랭카스터대학교 스티븐 베번(Stephen Bevan) 명예 교수가 참석했다. 특히 베번 교수는 ‘Fit for Work’ 프로젝트 출범을 주도한 인물 중 한명으로, 그 성과를 바탕으로 지난 2010년 영국 언론이 선정한 ‘지난 5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HR 전문가’로 꼽히기도 했다. 베번 교수를 만나 ‘Fit for Work’ 프로젝트가 갖는 의미와 MSD와 노동생산성이 중요한 이유 등에 대해 들어봤다.

- MSD에 초점을 맞춰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유는.

근로자들이 병가를 내는 주 요인으로 정신건강 관련 문제와 MSD를 꼽을 수 있다. 국가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 두 요인이 60~70%를 차지한다. 하지만 우울증, 다발성경화증, 암, 크론병 등과 같은 염증성 장질환, 당뇨병 등과 같은 질환들과 달리 MSD는 연구도 많지 않고 정책 우선순위에도 뒤로 밀려나 있다.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이유는 MSD가 직접적인 사망 요인이 되지 않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간과되고 있지만 MSD는 사망률이 낮은 반면 이환율은 상당히 높다. 또한 환자의 삶의 질, 노동 생산성, 고용 유지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요인들이 MSD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게 된 계기가 됐다.

- 프로젝트에서 다루는 MSD는 강직성 척추염, 류마티스관절염, 요통 등이다. 수많은 MSD 중 이 질환들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뭔가.

프로젝트에서 ▲요통 ▲근로 관련 상지 질환 ▲류마티스관절염 ▲강직성척추염 등 4가지를 다루고 있다. 이 중 요통과 근로 관련 상지질환은 어느 정도 문제가 발생했다가 해소되는 특징을 보이는 질환이며, 유병률이 상당히 높고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그러나 조기에 치료만 잘 받는다면 회복이 가능한 질환들이기도 하다.

류마티스관절염과 강직성척추염은 노동에 의해 발생하는 MSD가 아니지만, 진행성 질환이고 조기에 진단 및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해당 근로자 건강은 물론 노동 참여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특히 강직성척추염의 경우 젊은 근로자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데, 조기 진단 및 치료를 통해 이들의 노동력이 재생산될 경우 얼마만큼 사회 경제적으로 이득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물론 이 네가지 질환이 모든 MSD의 상황을 대변하지는 못하지만, 임상적인 부분과 생산적인 부분을 모두 고려할 수 있는 특징적 질환이라고 판단했다.

- 이전 ‘Fit for Work’ 프로젝트 중 스페인 마드리드 연구결과가 인상적이었다. 연구결과들이 실제 정책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례가 있나.

(프로젝트를 진행한 35개) 모든 국가에서 나타난 문제는 만성질환이나 장애를 한 정부 부처에서 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근로자가 (건강 문제로) 노동시장에서 퇴출되지 않게끔 하고, 퇴출돼도 다시 복귀토록 하는 것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적다. 때문에 해당 국가의 유관 부처들이 서로 이 문제에 대해 협력토록 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 중 하나다.

이 목표를 순조롭게 달성한 국가로는 이스라엘, 아일랜드, 영국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2010년 발표된 연구보고서에서 권고한 사항을 수용하기 위해 범부처위원회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또 연구보고서 발표 자리에는 범부처위원회 유관 부처 대표들은 물론 환자, 노조 등 각계 대표들이 모두 나와 권고사항을 이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일랜드에는 국가 차원에서 MSD 관련한 의료 등 서비스를 총괄하는 ‘National Clinical Director’를 선정해 운영토록 권고했는데, 이를 받아들여 류마티스내과 전문의 한명을 선정해 서비스를 제공 운영토록 했다. 영국은 최근 국가보건기술평가 담당 부서에서 신약이나 신의료기술 도입 시 평가하는 비용효과성 항목에 ‘근로’를 포함시켰다. 또 스페인 카탈로니아 지역의 경우는 연구보고서를 기반으로 근골격계 질환 관리 위한 지역 계획안을 마련하고, 라트비아는 MSD 관리를 위해 관련 예산을 45% 더 책정했다.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선 호주와 뉴질랜드, 한국의 경우 이미 보고서가 발표됐고, 대만은 현재 준비 중이다. 여기에 일본, 한국, 호주, 뉴질랜드, 대만, 중국, 싱가포르 대표들이 모여 각국 MSD 상태와 이 질환이 근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국제회의도 예정돼 있다. 이 회의를 기획한 이유는 각국의 경험과 대응방안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Fit for work’ 프로젝트는 연구로서만 그치지 않고, 실제 사회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 Fit for Work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국가나 연구자 선정에 있어 별도의 기준이 있나.

일단 해당 국가에서 MSD은 노동생산성에 대한 관심이 형성됐느냐가 중요하다.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의 경우 고무적이라고 보는 부분은, 당초 프로젝트 대상을 호주와 뉴질랜드, 일본, 한국 정도만 생각했었는데 다른 아태 국가에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스스로 해보자는 ‘momentum’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회의도 이러한 ‘momentum’ 독려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젝트 초기에는 우리가 연구를 직접 담당했지만, 지금은 해당 국가에서 관련 연구자를 파트너로 정해 함께 일한다. 각국 파트너는 연구에 참신한 관점을 더해 준다. 파트너에겐 프로젝트의 기본 원칙을 설명하고, 근거를 기반으로 한 연구에서 얻은 메시지를 의사 뿐 아니라 정부 등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에게 전달하게끔 유도한다. 다만, 각국 보고서가 호환될 수 있도록 재단이 보고서 편집권을 갖고 있다.

- 각국 보건의료제도, 노동환경 등이 각기 다른데, 보고서 호환이 가능한가.

보고서의 기본 원칙 중 객관적 지표가 포함된 이유는 국가 간 MSD 관련 현황과 노동생산성 등을 비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적한 대로 보건의료제도 등 격차가 커서 절대비교가 쉽지는 않다. 국가 간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복지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병가’의 허용범위, 정의, 측정 여부 등이 국가마다 너무 다르다. 한국 근로자의 경우 병가를 쓰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반면 북유럽 근로자는 병가를 손쉽게 오래 쓸 수 있다. 어떤 국가는 병가 기준이 ‘결근 일수 5일 이상’이어야 하는데, 또 다른 국가는 14일 이상이어야 하는 등 달라 통계를 일반화하기도 어렵다.

보건의료 관련한 데이터 또한 마찬가지다. 일례로 국가 간 류마티스관절염 현황을 살펴보자고 할 때, 그 지표 중 하나로 국가 간 인구당 류마티스내과 전문의 숫자를 비교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도 객관적 상호비교가 힘든 게, 터키의 경우 인구는 7,500만명에 류마티스내과 전문의는 150명에 불과한데 부족한 의사의 역할을 수천명의 물리치료사들이 행하고 있다. 이를 간과할 경우 왜곡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러다보니 보고서가 발표된 국가를 방문해 “MSD 관련한 평가에서 우리나라는 몇 위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웃음)

- 난감하다고 말했지만 한국에서도 보고서가 나온 만큼, 기자도 한국에서 MSD가 사회경제적으로 미치는 질병부담이 타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어느 수준이냐고 묻고 싶다.


파악하기로, MSD가 한국 근로자 노동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 또 한국은 MSD와 노동생산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인지도가 높다.

다만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되는데, 사회복지국가란 개념이 자리 잡은 유럽에 비해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의 고용주들은 근로자의 건강에 대한 의사결정을 실리적 측면에서 결정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를 들어, 한국의 한 자동차회사에선 생산직 근로자가 요통을 호소할 경우 생산성 저하로 이어진다고 판단해 치료나 재활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지만, 같은 회사 근로자라도 사무직이 요통을 호소하면 자동차 생산에 덜 간접적이라는 이유로 의료서비스 제공에 소홀하다고 들었다. 반면 유럽은 해당 업무와 상관없이 병가, 치료 지원 등 의료지원서비스가 동일하다. 한국은 흑백논리(생산성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로 접근하는 것 같다.

또 한국 임상의들이 근로자가 건강을 회복해 일자리로 복귀하는 것이 국가 생산성 향상에 중요하다는 인식이 적은 점도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다. 의사이기 때문에 질병 예방과 진단 및 치료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환자들이 치료를 잘 받아서 직장에 복귀하는 문제는 자기 소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일면 이해는 되지만, 오늘날과 같이 인구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우리를 먹여 살릴 근로 인구가 줄어든다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는 의사이건, 정책입안자이건 상관없이 사회 모든 이들이 근로생산성 문제 해결에 동참해야 한다. 의사도 자신의 진료와 치료가 근로 향상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해야 한다.

- MSD가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연구 목표, 기간 등은 어떻게 정하나.

초기 보고서가 발표된 유럽 국가들에는 이후 환자, 의사, 연구자, 정부 관계자 등이 이해당사자들이 포함된 연합체가 형성되도록 독려하고 필요한 부분은 지원했다. 자체적으로 연구를 얼마나 오래 할지 결정하라는 의미다. 우리는 MSD를 앓는 근로자들의 환경이나 근로조건 등을 가시적 개선할 수 있는 구체적 정책 목표를 정하고, 달성 여부에 따라 추가 연구 진행 여부도 결정하라는 조언만 할 뿐이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연합체를 구성해 2년 정도 운영하다가 중단했는데, 추가 연구 및 정책 제안의 필요성이 제기돼 1년 후 연합체를 다시 결성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운영되는 연합체의 경우엔 초기 연구 후에도 시의적절한 테마를 잡아서 후속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는데, 그 일환으로 작년에 젊은 근로자들에게 MSD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또 MSD와 정신건강질환이 상호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서도 파고들고 있다. 지금까지 1년에 1건 꼴로 심층보고서 나왔다. 결과적으로 과거 연구를 발판으로 필요한 후속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한국 또한 자체적으로 연구와 정책제안이 이뤄질 것이다.

- 정신건강 또한 노동생산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질환이라고 언급했는데, 이에 대해 진행되는 연구나 프로젝트가 있나.

재단에선 정신건강 관련 프로젝트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정신분열병의 경우 영국 보고서가 이미 발표됐다. 독일에서도 관련 연구가 진행돼 현재 정리 중이다. 정신분열병 하나만 살펴봐도, 영국의 경우 정신분열병 환자들 중 고용된 이는 8%에 불과할 정도로 그 노동 환경이 상당히 열악하다. 그만큼 정신분열병 환자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그룹이다.

또 MSD와 정신건강의 상관관계도 중요하다. MSD 환자 중 30%가 우울증이나 불안증 등을 겪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이 두 질환의 중복 문제도 관심을 갖고 있다. 다른 국가도 비슷할 것으로 보이는데, 영국의 경우 이 두 질환이 공존할 경우 보건의료비용 40% 이상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시장 퇴출 가능성도 크다. 예를 들어 우울증 환자의 경우 일반인 보다 노동시장 퇴출 가능성이 6배가량 높고, MSD는 4배 정도 높다, 이 둘이 함께 있을 경우엔 단일 질환을 가졌을 때보다 노동시장에서 퇴출될 가능성이 배 이상 될 것으로 보고 있다.

- 한국 내 MSD 관련 문제 해결 위해 어떤 정책적 제안이 필요하다고 보나.

한국 연구팀들과 논의해 본 결과, 현 단계에서 (정부 등에) 강한 요구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일단 결과가 발표된 만큼, 추후 정부와 정책 입안자들과 구체적으로 논의를 진행해 봐야 할 것 같다.

다만 다른 국가들에서의 전례를 비춰 봐도 정책 제안은 상식적인 수준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기본적이면서 공통적인 부분을 언급하면 우선 해당 MSD 관련 데이터 질 향상을 위해 여러 이해 당사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메시지 전달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는 임상의들로 하여금 근로 생산성이 환자들의 치료에 중요한 치료 결과 중 하나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1차 의료기관이든, 3차 의료기관이든 근무 여건과 상관없이 ‘근로’가 치료 결과를 평가하는 지표 중 하나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 조기개입의 필요성을 주지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조기개입이 확실한 경제적 이점이 있음은 자명한 만큼 노동, 의료 등 관련 부처들이 조기 개입이 손쉽고 원활하게끔 협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이 아니다. 한국의 상황은 한국의 이해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아는 만큼, 이들이 주도돼 한국식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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