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의 좌충우돌

[청년의사 신문 이형기] 미 동부 북버지니아의 명문 공립학교인 우드슨 고에서 최근 수년 동안 잇달아 학생 자살 사건이 발생해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워싱턴포스트 4월 12일자) 자살한 학생 중 한 명은 배치 고사를 앞두고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글로도 표현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담당 선생은 거기에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이들을 찾아 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게이트키퍼(gatekeeper)’라고 한다. 놀랍게도 한국의 자살사망률은 OECD 국가 중에서 제일 높아, 하루에 무려 44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자살에 관련된 사회·경제 비용이 연간 5조원에 달한다니 폐해가 심각하다. 남겨진 가족들이 평생 겪게 될 죄책감과 마음의 짐은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뒤늦게나마 정부가 자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중앙자살예방센터를 설치하는 등 각종 정책을 편 것은 잘 한 일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과연 정신건강 전문가, 특히 관련 의료계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됐는지 의문이다.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세이프(safe) 약국’ 시범사업을 보자. 약국을 통해 시민들에게 자살예방 상담을 포함한 종합적인 보건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게 이 사업의 요체다. 이미 서울시는 지난해 48개 약국을 대상으로 시범운영한 바 있고, 올해에는 그 숫자를 두 배 가량 늘려 2차 시범사업을 실시할 계획이다.

하지만 의료인이 아닌 약사에게 의료, 그것도 생사의 촌각을 다투는 자살예방 상담 역할을 맡긴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왜냐 하면 약학은 사람(환자)이 아닌 제품(약)에 집중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껏해야 ‘마음 편히 먹어라’ 정도의 상식적인 말밖에 약사가 해 주지 못할 게 뻔하다. 이 말을 듣고 자살을 계획한 사람이 ‘네 그러겠습니다’라며 순순히 마음을 접을 것이라고 서울시가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코미디다. 이런 말 때문에 오히려 전문가에 의한 적절한 자살 중재 시기를 놓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서울시와 약사회는 자살예방 상담이 단순한 게이트키퍼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위에서 소개한 우드슨 고의 사례에서도 드러났듯이, 비전문가인 게이트키퍼의 생명 지킴 노력은 한계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게이트키퍼를 교육하면 자살과 관련된 이들의 지식이 단기간 증가될지는 몰라도 실제 행동의 변화나 자살예방이라는 효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전히 약국에서 임의조제와 같은 불법진료가 횡행하는 마당이다. 따라서 약사가 상담이라는 미명 하에 의사의 처방 없이 항우울제 등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서울시는 의료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이프 약국 시범사업을 강행하면서 의료 전문가에 대한 자문이나 의견 청취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했다. 더군다나 1차 시범사업의 효과나 문제점에 대한 정밀 분석도 하지 않은 채 2차 시범사업을 서두르고 있다. 한마디로 전문가는 쏙 빼놓고 비전문가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는 격이다. 이 정도면 가히 서울시의 의료계 이지메(집단 따돌림)라고 이름 붙일 만 하다.

한국인의 자살 역학(疫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도 서울시와 약사회의 비전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국인 자살 역학의 가장 큰 특징은 노년층의 급격한 자살사망률 증가다. 따라서 정 게이트키퍼를 활성화하고 싶다면 노인들이 주로 찾는 보건소와 노인정이 일차 대상이 돼야 한다.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다. 세이프 약국은 언세이프(unsafe) 약국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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