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중 기자의 감별진단

[청년의사 신문 김철중] 병상 소유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공공의료 비중은 10%쯤 된다. 의료 인프라가 취약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공공병원의 병상 수가 더 많았지만, 1977년 의료보험이 도입되면서 민간이 급속히 성장하더니 1989년 전국민 건강보험부터는 지금의 격차로 벌어졌다. 한때는 병원 선택 기준이 가격이었지만, 건강보험으로 가격 차이가 없어진 이후엔 그 기준이 의료 질과 서비스로 바뀌었다. 경직된 공공병원은 이런 흐름에 대처하지 못했고, 그 틈에 민간병원이 성장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단일 공적 건강보험 체계에서 의료서비스는 민간이 맡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됐다. 이것이 첫 번째 아이러니다.


건강보험의 도입과 확대는 정권의 안위 차원에서 이뤄진 배경이 있다. 정당성이 취약한 군부정권은 국민에게 보편 의료서비스를 선물로 안겨야 했다. 당시 비약적인 경제성장이 이를 받쳐줬기에 가능했지만, 건강보험 보장성마저 높여주기에는 무리였다. 그 결과가 현재의 건강보험 보장률 60%다. 고령화와 의료 이용 증가로 건강보험 재정은 커졌지만, 보장성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것이 두 번째 아이러니의 시작이다. 비급여는 민간병원을 먹여 살렸다. 기존 의술이 건강보험에 편입되면 잽싸게 비급여가 통하는 첨단으로 갈아탔다. 낮은 보장성이 첨단 의료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아이러니다.

수가는 태생 단계부터 저수가일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서도 의료진의 행위료에는 인색하고, 기계와 장비에 의한 검사료에는 관대했다. 비즈니스와 투자는 수익률이 높은 곳에서 이뤄지기 마련이다. 병원들이 앞 다투어 CT, MRI, 고가의 치료방사선 기기, 로봇 수술 장비 등을 사들인 데는 이유가 있다. 저수가와 행위료 저평가가 국민소득 2만 달러 나라에 다소 과분하게 의료 기술 세련미와 화려함을 갖추게 된 세 번째 아이러니를 낳았다.

국내 환자들은 의료기관 선택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 미국은 민간보험회사가 통제하고 영국은 국가건강보험이 조절하지만 우리는 그런 게 없다. 진료의뢰서는 대형병원 입장권이 된 지 오래다. 환자들은 계속해서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집중됐다. 생명과 건강에서만큼은 최고를 찾게 되는 심리와 의료 자원의 균형적 활용을 외면한 정부 정책이 지금의 빅4를 잉태했다. 이들은 엄청난 수의 사례를 경험하며 임상 기술 발전을 이끌고 의학 논문을 쏟아냈다. 단기간에 임상시험에 필요한 환자 수를 채울 수 있기에 대한민국을 임상시험 강국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네 번째 아이러니다.

다섯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기관 접근성이다. 3,000원만 있으면 예약 없이 전문의 진료를 한 시간 안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다. 65세 이상은 1,500원만 있으면 된다. 그 결과 1인당 외래 방문 횟수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됐다. 고령화로 질병 구조가 다원화됐음에도 단일 과목 동네의원은 생존했고, 무의촌은 순식간에 해소됐다.

5대 아이러니는 역설적으로 한국 의료 발전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 도리어 한국 의료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보장성을 조금만 높이면 모든 병원이 죽겠다고 난리가 나는 희한한 구조가 됐다. 대형병원 환자 집중은 의료 비용을 높이는 핵심 요인이 됐다. 의료 인력을 싹쓸이하여 의료공급 허리가 사라질 판이다. 경증 환자 외래 과다 이용은 중증 환자의 보장성을 높이는 데 장애가 된다. 낮은 행위료는 검사 남발을 불러와 의료 불신을 키운다. 이제 지난 30여년간 지속한 아이러니를 하나씩 없애는 획기적인 수가 개혁만이 한국 의료의 지속 발전을 보장한다. 양적 성장의 물결이 가고 보편적 의료 복지 파고가 온다. 새로운 배로 서둘러 갈아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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