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의 진료실의 고고학자

[청년의사 신문 박지욱] 2013년 12월 초 아프리카의 섬 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 임파선 페스트가 발병하여 2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직도 페스트가? 라며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아직 페스트는 있다. 의사들 조차 잘 모르는 병 페스트. 하지만 어쩐지 일반 대중들에게도 꽤 익숙한 병이다. 왜? 역사책, 소설, 영화, 그림으로 익히 그 질병의 끔찍함을 전해들은 탓으로.

<데카메론>은 페스트를 피해 칩거하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들이고, 의사이자 예언자가 등장하는 영화 <노스트라다무스>에는 페스트가 창궐하는 중세 유럽의 암울한 모습을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발표된 까뮈의 소설은 제목 자체가 아예 <페스트 La Peste; The Plague>다.


▲ 중세의 페스트 의사 김은영 기자

페스트는 언제부터 인류를 괴롭혔을까? 이미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몰락에도 일조를 한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가장 극심한 피해는 중세기 유럽에서 있었다. 14세기 중반에 몽골 군대의 생물학적 무기로 유럽으로 투척된(!) 이래 페스트는 8년에 한번 꼴로 유럽을 휩쓸었다. 피해가 얼마나 컸던지 불과 4년 만에 유럽 인구의 1/3이 전멸했다. 유럽인들의 상흔은 오늘날까지 ‘치명적인’, ‘전염병의’라는 뜻의 영어 ‘pestilent’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페스트에 걸리면 임파선이 부풀어 오르며 극심한 통증이 생긴다. 고열이 엄습하고 온 몸에 시퍼런 출혈이 일어나면서 곧 죽는다. 온몸에 든 시퍼런 멍 때문에 검게 보인다고 흑사병(black death)이라 불렸다. 하지만 더 치명적인 것은 폐 페스트다. 임파선 페스트가 쥐벼룩에 물려 걸리는 데 반해 폐 페스트는 공기를 통해서도 전염이 되니 더 지독한 병이다.

만연한 페스트균은 인간의 몸뿐 아니라 정신에도 출혈을 일으켰다. 대재앙에 대한 화풀이로 마녀라는 낙인이 찍힌 여인들과 소수 민족인 유태인들이 화형대로 끌려갔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결국 내일이 없는 삶, 구원이 없는 종교, 치유해주지 못하는 의학…. 사람들은 한치 앞을 모르는 비참한 삶 속에서 현실만을 쫓아가며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

페스트는 다행히 물러갔다. 그리고 유럽 사회는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급감한 인구 덕분에 상대적으로 사람 값이 올라갔다. 들판에는 일손을 구하지 못해 방치된 경작지가 넘쳐나고 봉건 영주들은 사람을 부리기 위해서 두 세 배 높은 품삯을 기꺼이 지불했다. 물자는 상대적으로 넘쳐나고 임금은 오르는 ‘좋은 시절’이 왔다.

살아남은 자들이 누리게 될 ‘풍요’는 물질적인 면을 넘어 정신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학자들 중에는 빙하기에서 살아 남은 유인원들 중에서 현생 인류가 태어난 것처럼 대역병 시대에서 살아 남은 인간들이 현대인으로 탄생했다고 보기도 한다.

갑오경장이 있던 1884년, 일본의 기타사토 사바사부로(北里 柴三)와 스위스의 알렉상드로 예르생(Alexandre Yersin)이 페스트의 원인균을 거의 동시에 발견했지만 균의 이름은 예르생의 이름을 따 ‘Yersinia pestis’으로 불렀다. 런던의 대역병, 샌프란시스코의 페스트 등의 크고 작은 대유행이 20세기 초까지 인류를 위협했지만 백신, 항생제가 등장하고, 균을 옮기는 쥐와 벼룩을 효과적으로 퇴치하게 되자 페스트는 우리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아직은 과거 완료형의 질병은 아니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매년 발병하는 환자가 2,500명이며, 효과 좋은 항생제 치료를 못 받은 경우 사망률은 50~60%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 창궐은 20년 전인 1994년에 인디아에서 유행하여 54명이나 희생됐다. 이번에 인도양 맞은 편의 마다가스카르에서 벌써 20명이나 사망했다. 부디 까뮈의 <페스트>에 묘사된 재앙이 그 곳에 되돌아 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림 출처: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d/Doktorschnabel_430px.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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