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임상 현장의 각종 오류에 대한 보고체계 마련 시급


[청년의사 신문 곽성순]

빈크리스틴 사건으로 촉발된 환자안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 확대는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오제세 위원장(민주통합당)과 환자단체연합회, 의료계 등이 머리를 맞대고 준비 중인 환자안전법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환자안전법과 관련한 주요 쟁점은 임상 현장의 각종 오류에 대한 보고체계 마련에 맞춰져 있는 모양새지만 일각에서는 그에 앞서 ‘근거중심의 환자안전시스템 구축’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를 가능하게 하는 의료기관 내 병원정보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환자의료정보를 다루는 대표적인 시스템인 전자의무기록(electronic medical record, 이하 EMR)의 경우 국내 도입 시 환자안전보다 효율적인 청구를 위한 활용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환자안전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다.

실제로 EMR을 활용한 근거중심 환자안전시스템의 일환인 임상의사결정지원시스템(Clinical Decision Support System, 이하 CDSS)의 경우 국내에서 일부 연구자의 산발적인 연구와 보건복지부에서 지원하는 몇몇 프로젝트가 있지만 아직까지 의료계 내에 이에 대한 인식조차 퍼져있지 않은 상황이다.

CDSS의 경우 의료정보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익숙한 이름이지만 일반 의료진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데, 환자 진료 시 진단이나 치료와 관련된 ‘의료진의 임상적 결정을 돕는’ 시스템을 말하며 최적의 항생제 선택이나 진단적 검사로부터 최적의 약물용량의 결정을 위한 상세한 지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임상과 관련한 결정은 전적으로 의료진의 몫이지만 CDSS 도입을 통해 다양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보다 EMR 보급률이 떨어지는 미국의 경우 지난 2004년 부시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국가 차원의 EMR 보급정책이 오바마 정부를 거치면서 ‘환자안전을 위한 쓰임새’를 강조하는 정책으로 확립된 상태다. 도입은 물론이고 어떻게 쓰이느냐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환자안전연구회 김석화 회장(서울의대 성형외과 교수)은 “(미국과 우리나라의 EMR 도입은) 목표 자체가 다르다. 환자안전이라는 목표에 맞게 EMR을 도입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건강보험공단에 수가를 청구하려면 EMR을 도입해야 하니 거기에 맞추라는 식으로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김 회장은 “정부에서 의료기관에 한 푼도 지원해주지 않으면서 진료비를 받고 싶으면 정부시스템에 맞추라고 한 것으로, 굉장히 편의주의적이고 환자안전을 위해 시스템을 활용해야 한다는 정신이 결여된 과정이었다”고 덧붙였다.

서울아산병원 의료정보실 이재호 실장(응급의학과 교수)은 “우리나라는 (근거중심 환자안전을 위한 병원정보시스템 활용과 관련한) 정책이 없다”며 “목표와 중장기 전략 등을 총괄하는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정부도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과 김선도 사무관은 “우리나라의 경우 청구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서 EMR이 청구 위주로 보급된 것은 사실”이라며 “환자안전을 위해 EMR을 활용해야 하는 것에 동의하며 이를 위해 정부 주도 표준화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 실제 진행 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의료기관의 EMR 보급률

아주대의료원 U-health연구소 박래웅 소장(의료정보학과 교수) 연구팀은 근거중심 환자안전을 위한 병원정보시스템의 열쇠를 쥐고 있는 EMR의 국내 의료기관 보급을 살펴보기 위해 지난 2010년 ‘한국 3차 병원과 종합병원의 전자의무기록 도입 현황(Adoption of electronic health records in Korean tertiary teaching and general hospitals)’을 조사해 발표했다.

연구팀은 3차 병원 44곳과 종합병원 269곳을 대상으로 관련 설문을 진행, 각각 36곳(81.8%)과 86곳(32.0%)에서 EMR과 흔히 OCS(Order Communication System)로 불리는 CPOE (Computerized Physician Order Entry, 처방전달시스템) 도입 여부에 관한 회신을 받았다.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조사에 참여한 3차 병원 중 50.2%, 종합병원 중 35.0%가 EMR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CPOE의 경우 EMR과 비교해 활용도가 더욱 높았는데, 3차 병원 중 97.4%, 종합병원 중 85.2%가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CPOE의 경우 EMR을 활용하는 경우 기본으로 적용돼 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활용도가 높은 이유 중 하나다.

연구팀 조사결과에 따르면 국내 EMR 보급률은 연구팀이 공개한 미국과 호주, 독일의 EHR(electronic health record, 전자건강기록으로 해외에서 흔히 EMR과 같은 뜻으로 사용) 보급률(각각 2009년 현재 11.9%, 2007년 현재 11.9%, 2007년 현재 7.0%)과 비교했을 때 상당이 높은 수준이며, CPOE의 경우도 미국, 캐나다, 벨기에(각각 2008년 현재 17%, 2006년 현재 22%, 2008년 현재 41.3%)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문제는 설문조사에 제외된 병원급 의료기관이다. 박 소장에 따르면 이들도 조사대상에 포함됐지만 회신율이 낮아서 통계에서 제외됐다.

박 소장은 “전체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했지만 병원급 의료기관의 회신율이 떨어져 제외하고 결국 종합병원 이상만 통계를 냈다”며 “연구팀은 회신율이 높은 곳은 시스템 보급이 잘된 곳, 낮은 곳은 안 된 곳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소장은 “국내에서 환자안전을 위한 EMR 활용에 구멍이 있다고 볼 수 있다”며 “하지만 환자안전에 의지를 가진 의료기관이 아닌 이상 각 의료기관들이 자발적으로 체계적인 IT시스템을 갖추기에는 노력이 너무 많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EHR 도입을 방해하는 장벽을 묻는 질문(복수 응답)에 대해 도입하지 않은 의료기관의 경우 ▲시스템 도입에 필요한 비용을 꼽은 비율이 76.3%로 가장 많아 역시 비용이 가장 큰 장애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외 ▲투자 수익에 대한 불확실성(40.0%) ▲유지비용에 대한 우려(36.8%) ▲의료기관의 요구사항을 충족하는 시스템 찾기의 어려움(35.2%) ▲전자의무기록 도입에 대한 의사들의 거부감(30.5%) ▲시스템 운용이 가능한 직원 채용의 어려움(27.0%) ▲시스템 공급업체의 지속적인 관리 부족과 유지 보수에 대한 우려(23.3%) ▲불법 변조와 해킹에 대한 우려(19.2%) ▲상호 연동 가능한 IT시스템의 부재(18.0%) ▲환자정보에 대한 부적절한 공개 우려(10.9%) 등을 꼽았다.

EHR을 도입한 의료기관의 경우도 ▲시스템 도입에 필요한 비용을 도입 장벽으로 꼽은 비율이 53.8%로 가장 높았지만, 두번째로는 ▲의료기관의 요구사항을 충족하는 시스템 찾기의 어려움(34.4%)을 꼽는 등 실제 운용과 관련한 고민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안전을 위한 병원정보시스템 활용법

환자안전을 위한 의료기관 내 병원정보시스템 활용법은 다양하지만 근거중심 환자안전이라는 측면에서 관련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CDSS다. 말 그대로 임상현장에서 의료진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정보를 병원정보시스템에 심는 것인데, 현재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운용 중인 처방조제지원시스템(drug utilization review, DUR)도 일종의 CDSS로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 CDSS 활용이 일반화되지 않아서 이에 대한 효용성을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박 소장이 지난 2007년 Journal of General Internal Medicine(JGIM)에 발표한 ‘Overdose rate of drugs requiring renal dose adjustment’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박 소장은 이 논문에 대해 “환자의 신장기능에 맞춰 약물용량을 조절해야 하는 약물이 많이 있는데, 얼마나 잘 조절하고 있는지 조사한 논문”이라며 “신기능이 떨어지는 환자의 약 30%가 과다처방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박 소장에 따르면 환자의 신장기능은 신여과율(glomerular filtration rate, GFR)을 계산해야 알 수가 있는데, EMR에 이런 기능이 심어져 있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기 때문에 의료진이 직접 이를 계산해야 한다.

박 교수는 “EMR에 신여과율 계산하는 기능과 함께 신장독성이 있는 약물에 대한 데이터베이스(DB)가 있을 경우, 환자의 신장기능이 떨어져 있으면 신독성약물 처방에 경고를 내릴 수 있다”며 “이를 신독성약물 용량조절 시스템(renal dosing system)이라고 하는데, 이런 기능이 EMR에 구현돼 자동 계산해주는 기능이 있는 병원은 국내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CDSS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CDSS 리스트, 즉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한데 국내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CDSS 리스트 마련 움직임조차 활발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가톨릭의대 예방의학교실 김석일 교수 등 CDSS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몇몇 연구자들은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김 교수는 “CDSS와 관련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의료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하지만 이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는 상태”라며 “일단 시작하는 병원이 있으면 그 성공을 바탕으로 금방 퍼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CDSS 국내 도입의 걸림돌, 자금과 표준화

국내에서 CDSS 도입이 힘든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에 대한 의료계의 인식이 적어서인 점도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들도 존재한다. 우선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김 교수는 “CDSS를 EMR에 심는 것도 가능하지만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CDSS만을 위한 엔진을 구입해야 하는데 그 가격이 만만치 않다”며 “의료기관 입장에서는 엔진에 심을 콘텐츠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를 위해 투자하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걸림돌은 표준화다. 각 의료기관에서 다양한 병원정보시스템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 의학용어나 서식 등도 제각각이다. 때문에 이를 통일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현재 김 교수 연구팀은 정부 지원을 받아 ‘의사결정지원시스템의 규칙표준 개발 및 적용’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해 복지부 김선도 사무관은 “(환자안전과 관련한 병원정보시스템 도입과 콘텐츠 개발을 위해) 우선 표준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맹장염인지 충수염인지 각 의료기관마다 사용하는 의학용어가 다르며 퇴원지시서 등 사용하는 서식도 다양하다”며 “(정부 지원도) 현재 표준화에 집중돼 있으며 다른 부분은 기획단계라고 할 수 있다”고 전했다.

김 사무관은 “표준화와 환자안전을 위해 EMR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부가 결정하면 각 의료기관별로 의견이 있을 것인데, 이때는 정부가 나서 합의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관련 연구자들, 정부지원 ‘한목소리’

근거중심 환자안전을 위한 의료기관 IT시스템 구축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그 산들을 넘을 수 있게 돕는 것은 결국 시스템 구축을 가능케 하는 자금 지원이다.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인 연구자들은 한목소리로 EMR과 같은 병원정보시스템 보급 확대를 위한 정부 지원을 촉구했다.

박래웅 소장은 “의료기관들이 (병원정보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여력이 없다”며 “환자안전을 위해 구축하는 병원정보시스템에 대한 보상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는 상황에서 결과만 요구한다면 자발적인 움직임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병원정보시스템 구축을 위한 장비 등에 대한 보조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울산의대 예방의학교실 이상일 교수는 “대형 의료기관의 경우 관심도 있고 투자도 가능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려운 의료기관의 경우 근거중심 환자안전을 위한 병원정보시스템 도입에 뒤지고 있다”며 “환자안전과 관련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우려되는 부분인데, 정부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의료기관을 위한 투자를 통해 참여 방안을 마련하는 등 중소병원들을 위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전했다.

정부 지원 위한 국민인식 변화도 필요

필요한 것은 정부 지원이지만 선행돼야 할 것은 환자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라는 의견도 있다. 의료기관이 좀 더 안전한 곳이 되기 위해서는 정부 투자가 필요하지만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의료기관을 사용하는 국민들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합리적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석화 회장은 “국민들이 싼값에 비싼 서비스를 원하면 안 된다. 의료인들은 항상 환자안전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진료에 임하고 있으며, 모든 행위는 환자안전을 우선으로 한다. (의료기관들이 환자안전에 투자할 수 있게) 국민들이 충분히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서울대 간호학과 김정은 교수팀이 최근 성인남녀 3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환자안전 인식 조사’를 참고하면 국민들의 인식 변화 전망은 밝지 않다. 분석 결과 환자안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상당히 낮은 것으로 조사됐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이번 조사의 경우 온라인에서 건강정보를 찾기 위해 특정 사이트를 찾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했음에도 환자안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측된다”며 “소비자의 경우 이슈에 따른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이 지불하는 비용이 변하는 부류다. 환자안전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환자안전 교육이 필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근거중심 환자안전을 위한 의료기관 내 병원정보시스템 구축은 EMR 보급에서부터 CDSS 개발까지 다양하고 고려해야 할 점 또한 산재해 있다. 하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지금이라도 그 필요성을 공감하고 현실화를 위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해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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