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회로서 북한 보건의료 협력의 길
이진휴의 의기충천(醫機衝天)
2025 APEC에 가장 큰 관심은 북미 간의 대화였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현실화할 것으로 예측한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면서 남북 간의 대화 재개와 교류 확대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장 시급하게 다가오는 과제는 남북한 보건의료 협력이다.
오래된 자료기는 하지만 북한에는 9,000여개의 의료기관과 21만명의 보건의료인이 존재한다. 표면적 수치만 보면 상당한 의료 인프라를 갖춘 것처럼 보인다. 인구 1천 명당 의사 수는 3.3명으로 OECD 평균 3.1명보다 높고, 인구 1만 명당 입원 병상은 187.6개로 OECD 평균 50개를 훨씬 상회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는 북한 보건의료의 실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실질적인 의료 환경은 심각하게 열악하다. 의약품과 기초 의료기기, 인프라 등 모든 면에서 만성적 부족 상태다. 2009년 WHO 현장 조사에 따르면, 진료소의 조산키트 71.7%가 불량이고, 수술 도구의 55%, 진료 침대의 70%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신생아 소생술에 필요한 기본 장비조차 73.3%의 기관에서 갖춰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상급 병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군 단위 병원의 기본 수술 도구 91.7%가 불량 상태이며, 제왕절개술을 위한 전기소작기는 75%의 병원에서 갖춰지지 않았다. 비상전력 설비는 83.3%에서 아예 없거나 고장 난 상태다. 도 단위 병원의 상황이 조금 나을 뿐, 근본적인 문제는 같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은 곧바로 생명과 직결된다. 신생아 사망률과 5세 이하 사망률은 1997년 최악의 상황을 기록한 후 개선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국제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평균 기대수명 역시 남성 65.6세, 여성 72.4세로 남한과 비교할 때 10년 이상의 격차를 보인다.
북한의 보건발전 중기전략계획(2010년~2015년)은 다섯 가지 전략 분야를 제시했다. 보건 체계 강화, 비전염성 질병, 전염성 질병, 여성 및 어린이 건강, 건강에 대한 사회환경 인자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여성 및 어린이 건강' 분야는 총 예상 자금 1억848만 달러 중 지출 가능액이 극히 적어 자금 부족률이 89%에 이른다. 가장 시급하면서도 가장 지원이 부족한 영역이다.
이는 매우 전략적인 접근이다. 모자보건은 인도적 지원의 가장 명분 있는 분야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영역이다. 영유아와 산모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정치적 이념을 넘어 남북이 함께 손잡을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 대북 인도적 지원은 단순 물량 제공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의료장비를 보내도 사용법을 모르거나, 고장 나도 수리할 방법이 없어 창고에 방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일회성 지원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
필요한 전략은 '지속가능한 협력'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장비 지원과 함께 현지 의료진에 대한 사용 교육, 사후 관리 체계 구축, 효율적인 의료기기 관리 시스템 전수를 묶어야 한다. 현장의 실정에 맞춘 맞춤형 지원, 현지 인적 역량 강화, 기존 지원단체와의 긴밀한 연계를 통한 파급효과 창출이 핵심 전략이다.
실제로 WHO, UNICEF, WFP 등 국제기구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남북어린이어깨동무 등 국내 22개 민간단체가 이미 북한 각급 병원에 의료장비와 소모품, 재활기구, 아동용 의약품 등을 지원해 왔다. 이들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면, 보다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현실적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남북관계의 안정성에 따른 불확실성, 예산 부족, 북한 인프라의 전반적 노후화, 정보 접근의 어려움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시작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북한 주민의 건강권은 인류 보편의 가치이자, 같은 민족으로서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책임이다. 보건의료 협력은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지속되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도적 교류다. 산모와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이념의 장벽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번영은 거창한 정치 선언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남북 보건의료 협력이 바로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국제기구와 민간의 참여, 정부의 체계적 지원, 중장기 전략의 수립이 조화를 이룬다면, 북한 주민의 건강권 향상과 함께 남북 간 신뢰 구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일방적 퍼주기식 지원을 하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선순위가 합의되고 중장기적인 전략을 세울 때 우리나라에 기회의 땅이 될 수도 있다.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이 중심이 되는 교류를 시작할 때다. 북한 어머니와 아이들의 건강한 미소가, 한반도 평화의 첫 번째 결실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