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의료기기 인허가, AI가 답일까
이진휴의 의기충천(醫機衝天)
우리나라 의료기기 산업은 세계 7위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으며, 향후 더 높은 순위 달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 2023년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자료를 보면, 이탈리아나 영국이 160억 달러 수준으로 우리나라 70억 달러보다 2배 정도 높지만, 성장 잠재율로 볼 때 지금과 같은 속도가 유지된다면 몇 년 안에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이다.
우리가 현장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의료기기들이 산업적 측면보다는 공공재의 일부로서 환자 안전과 치료 효과에 직결되는 만큼, 산업 성장은 곧 국민의 생명과 의료의 질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연평균 8%씩 성장하던 이 산업이 주춤하고 있다. 양적 성장은 이뤘지만, 질적 성장이 따라오지 못하는 전형적인 성장통을 겪고 있다.
그동안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세계 시장의 토대가 되는 각종 의료기기 규제에 관하여 국제조화에 힘썼고,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세계 최초라는 규정도 제정하여 전 세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정책에서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듯이, 높아진 규제 장벽으로 인하여 제조업체는 신규 제품에 대한 개발을 주저하게 되었고, 길어진 심사 기한으로 인하여 산업계나 심사인증업무 관계자 모두 피로감을 호소하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인허가 과정에 있다. 의료기기의 안전성 기준이 높아지면서 인허가 요구사항이 전면 상향 조정됐고, 이에 따라 고비용 규제 구조가 만들어졌다.
시험기관과 인증기관들이 이 과정에서 상당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데, 이는 양날의 검이다. 긍정적으로는 우리나라 의료기기 관련 전문성과 인프라가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섰지만, 부정적으로는 제조업체들에게 막대한 비용 부담을 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객관성이다. 아무리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있어도 결국 사람이 심사하다 보니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비슷한 사례인데 심사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이는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정말 답답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의료기기법과 각종 고시, 가이드라인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그동안의 심사 자료가 모두 문서화되어 인공지능이 학습하기 쉽도록 정리되어 있다. 이는 AI 도입에 최적화된 환경이라고 볼 수 있다.
인공지능 심사 체계가 도입된다면 우선 현재 6개월 이상 걸리는 인허가 업무를 3개월 이내로 단축할 수 있으며, 미국 FDA의 ELSA처럼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둘째는 비용 절감이다. 숙련된 심사관이 투입되어 사람 손으로 해야 하던 것이 인공지능 도입으로 요건 확인, 심사 초안에 대한 검토가 된다면, 투입 노동량의 감소로 보다 높은 심사 수준을 유지하며 심사 수수료를 대폭 절약하여 비용을 혁신 제품 지원에 재투자할 수 있는 부가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셋째는 객관성 확보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고 이로 인한 분쟁 발생이 매우 고질적인 현상이었다면, 인공지능은 일관된 기준으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민원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넷째는 예측 가능성이다. 제조업체가 개발 단계에서부터 인허가를 중심으로 제품을 다양하게 설계하여 인허가에 들이는 사전 준비 기간과 비용 절감을 기대할 수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다양한 제품이 출시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각종 민원에 대한 답변으로 소중한 행정력이 소요되고 기관별 입장차에 의한 보완이 70%에 달하는 지독한 규제 현실에서 의료기기 발전을 위한 생산적 선순환이 되기 위한 생태계 조성의 첫발이 인공지능을 도입한 각종 민원에 대한 답변과 심사 업무일 것이다.
더 빠르고 다양한 의료기기들이 시장에 나온다는 건 결국 우리가 환자를 치료할 때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뜻이다. 특히 국내 중소기업들이 개발한 혁신적인 기기들이 빠르게 상용화될 수 있다면, 우리 의료 현장의 경쟁력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물론 AI가 만능은 아니다. 복잡하고 새로운 형태의 의료기기는 여전히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할 테고, AI 시스템 자체의 신뢰성과 투명성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해외에서는 AI를 활용한 규제 혁신 사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 기술적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낼 시점이다.
사람의 역할이 없어질까 하는 기우가 있다면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규제가 소비로 인식되는 현실에서 역할의 전환으로 규제와 심사자가 한 몸이 되어 환자 안전과 회복을 돕는 더 높은 질적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