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PA 제도화, 잊혀진 ‘면허’의 본질
문석균 의협 의료정책연구원 부원장
영국 소설가 이안 플레밍이 집필한 첩보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007 시리즈는 1962년 처음 제작된 이후로 60년 넘게 후속편을 만들고 있다. 미디어 믹스 역사상 가장 성공한 프랜차이즈 중 하나다. 소설은 1억부를 돌파했고, 영화 시리즈는 약 7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의 첩보원 명인 007에서 ‘00’은 영국 외무부 MI6에서 허가해 준 살인 면허이고, ‘7’은 ‘살인면허를 가진 일곱 번째 요원’이라는 뜻이다. 영국 비밀정보국법(Intelligence Services Act 1994) 제7조는 국외에서 벌어지는 비밀작전이 외무장관의 허가 아래 이뤄지는 경우 민형사상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이를 이용해 극적인 가상의 상황을 연출했지만, 현실에서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면허가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면허’는 배타적 허가로서 이걸 취득한 사람만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규제를 의미한다. 때문에 면허는 주로 국가에서 관리하며 해당 영역에 있어서 과점적 권리를 인정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사나 약사 같은 보건의료 관련 일을 하거나 도로에서 자동차 혹은 특수장비를 운전하려는 사람이 받는 운전면허가 대표적이다.
이는 어느 분야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과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자격’과는 다르다. 자격증(certification)은 숙련도가 어느 정도 되는지 일정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 평가해 발급해주는 증서다. 하지만 면허증(license)은 특수 행위에 있어서 이를 행할 수 있는 허가 증서이다. 따라서 ‘자격’과는 달리 ‘면허’는 업무 영역을 넘은 행위를 할 경우 법적 판단을 받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최근 의료계에서 ‘면허’와 ‘자격’이 혼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21일 간호법이 시행됐다. 간호법은 간호인력 역할을 재정립하고 간호사 면허 자격, 업무, 권리, 책무, 인력, 교육, 처우 등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중 간호법 제14조 진료지원업무 수행에 관한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
외국에서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진료를 보조하는 전문 의료인으로 PA(physician assistant)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간호사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일정 교육과정을 거쳐 의사를 보조하는 의료인으로, 의사 업무의 일정 부분을 대신 수행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PA 간호사라고 부르면서 진료지원업무를 간호사만 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고, 의사 면허나 간호사 면허와 같이 또 다른 면허가 필요한 진료지원업무를 단순히 자격만 보고 특정 의료행위를 할 수 있게 허용한 것이다. 이것이 국민 건강을 위해 올바른 일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특히 진료지원업무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나 내용이 없고 해당 업무 분야 전문성이 담보가 되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 향후 개정과정에서 몇 가지를 고려해 잘 대비를 해야 한다.
첫째, PA를 위한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간호사가 일정한 자격을 갖추기만 하면 특정 의료행위에 대해 법적 책임 없이 권한만 가지고 일할 수 있게 됐다. PA 제도가 정착된 미국은 PA가 되려면 4년제 학사 학위(전공은 반드시 간호학일 필요가 없으며, 생물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일반 학사 학위도 인정)와 보건의료 경력(3년 정도의 간호조무사나 응급구조사 등 보건의료 현장 경험) 그리고 인증된 PA 석사 과정을 이수한 뒤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이후에도 정기적인 보수교육과 재인증 시험을 통해 면허를 유지하게 한다.
둘째, 환자 안전을 위해서라도 PA 면허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간호법이 시행되기 한 달 전 보건복지부는 진료지원업무 제도화 공청회를 열고 간호법 하위법령인 ‘간호사 진료지원 업무 수행에 관한 규칙’ 주요 내용을 공개했다. 수술 부위 드레싱과 피부 봉합, 골수·복수 천자, 진단서 초안 작성 등 45개 행위를 진료지원업무로 제시했다. 지금까지는 의사라는 면허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간호법이 시행되면서 간호사 면허가 있고 일정 자격만 갖추면, 예전에 의사만이 해오던 일들을 아무 제한 없이 할 수 있게 됐다. ‘자격’만으로는 국민의 건강을 보장할 수 없다.
셋째, 전공의 교육 보호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전공의 교육은 지속돼야 한다. 하지만 PA로 인해 특정 술기나 증례를 배울 기회가 줄면 의사 수련 시스템의 근간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 PA 제도를 오래전부터 시작한 미국에서 응급의학과 전공의를 대상(AAEM/RSA Survey, 2023)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6.9%가 PA가 전공의 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다. 외과 전공의 대상(Clark et al.,2018)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4%가 PA로 인해 수술의 핵심 부분을 배울 가능성이 낮다고 응답했다.
넷째, PA 교육은 의사 주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진료지원업무는 기존에 의사가 하던 행위들인데, 간호법으로 인해 간호사가 이 행위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대한간호협회가 교육을 맡겠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PA 역할은 의사가 하는 역할의 일부를 위임받아 의사 지도하에 진행하는 것이다.
이제는 전공의의 근무 시간과 교육 체계가 바뀔 것이기에, 외국과 같이 잘 준비된 PA 제도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면허’와 ‘자격’은 다르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1종 보통면허 소지자가 무사고 운전을 해왔다고 해도 1종 대형면허가 필요한 버스 운전을 허용하지 않듯이, 높은 수준의 책임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의료행위 역시 단순히 ‘자격’만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의료의 질과 환자 안전을 위해 국가가 지켜야 할 막중한 책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