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문진 시스템? 삼성이 만들면 다릅니다

[인터뷰] 삼성서울병원 김혜정 의료정보팀장 디지털 문진 ‘PRISM’…진료·연구 효율성 제고

2025-06-05     송수연 기자

‘3분 진료’일 수밖에 없는 한국 의료 현실. 대학병원들은 3분 진료 틀을 깨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제도적 한계는 존재한다. 삼성서울병원은 그 속에서 진료 효율화를 위해 ‘문진’을 활용했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리는 삼성서울병원은 빅5병원 중 한 곳이다.

삼성서울병원이 개발해 진료 현장에 도입한 ‘PRISM(Patient-centered Responsive care and Integrated network for Sustainable Management system)’은 문진 시스템을 넘어 진료 효율화, 환자 중심 의료, 데이터 표준화까지 아우르는 혁신적인 플랫폼이다. 지난 2021년 12월 비뇨의학과 외래 진료에 시범 도입한 후 2022년 1월 다른 진료과로 확대 적용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문진이 필요한 모든 외래진료실과 응급실, 입원병동에서도 활용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김혜정 의료정보팀장은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작은 불편을 바꿔보고자 시작했지만 지금은 전체 진료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오는 18일부터 20일까지 세브란스병원에서 진행되는 HiPex(Hospital Innovation and Patient Experience Conference, 하이펙스) 2025에서 삼성서울병원이 경험한 ‘문진 환자의 손끝에서 시작되는 진료 혁신’을 공유한다.

삼성서울병원 김혜정 의료정보팀장은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문진 시스템 'PRISM' 개발과 고도화 과정을 설명하고 의료 현장에 불러온 변화를 이야기했다(ⓒ청년의사).

디지털 문진 시스템 구축은 ‘3분 진료’의 한계에서 출발했다. 짧은 외래 진료 시간 안에 환자의 증상과 이력을 빠르게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진료 대기 시간 동안 환자들이 작성해야 했던 종이 설문지는 관리·보관이 번거로웠다. 내용이 누락되기도 하고 의료진이 다시 입력해야 해서 비효율적이었다. 이에 삼성서울병원은 환자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사전 문진을 작성하면 그 내용이 EMR(전자의무기록)과 연동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문진 과정에서 설문 내용이 많은 비뇨의학과에 PRISM을 시범 적용한 결과, 진료 준비 시간과 간호사 업무 부담이 크게 줄었다. 당시 비뇨의학과 외래 진료실에서 간호사가 문진 설문을 받고 EMR에 입력하는데 환자 1명당 3분 정도 걸렸다. 하지만 PRISM 도입 후 이 과정이 사라졌다. 이는 다른 진료과도 마찬가지다.

김 팀장은 “환자가 외래 진료 전 문진을 작성하고 간호사가 빠진 부분을 확인해 입력하려면 진료 시간에 과부하가 걸린다”며 PRISM을 이용하면 환자들이 사전에 작성한 문진 내용이 EMR에 자동으로 기록되고 의료진도 진료 전 미리 확인할 수 있어 “진료 편의성도 높아졌다”고 했다.

문진 응답률이 98%나 될 정도로 환자 만족도도 높다. 디지털 소외계층이라고 하는 노년층도 개편된 문진 시스템에 쉽게 적응했다. 글자를 확대해서 볼 수 있고 사전에 꼼꼼히 작성할 수 있어 좋다는 긍정 반응이 쏟아졌다. 삼성서울병원은 외래 진료 일주일 전 환자에게 문진 설문 내용을 ‘카카오톡’으로 발송한다. 응답이 없으면 진료 3일 전 한 번 더 보낸다. 김 팀장은 “산부인과처럼 민감하고 사적인 내용을 작성해야 하는 경우 프라이버시가 보장돼서 좋았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고 전했다.

김 팀장은 “환자는 의사에게 자신의 증상을 제대로 설명하고 싶어 한다”며 이를 문진 시스템에 담아내려 노력했다고 했다. 이를 위해 표준화된 PRO(Patient-Reported Outcome, 환자보고결과) 측정 도구를 활용했다. PRO는 제3자인 의료진의 해석 없이 환자가 직접 보고하는 증상, 건강상태 등에 관한 정보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주도로 개발된 PROMIS(Patient-Reported Outcomes Measurement Information System) 등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PRO 측정 도구도 많다.

삼성서울병원은 PRO 측정 도구를 활용하면서도 환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한글화하는 작업에 공을 들였다. 김 팀장은 “환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의료현장에서 사용하는 의학용어를 최소화해 질문을 쉽게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며 “표준화된 국제 도구가 많지만 대부분 영어로 돼 있다. 조주희 교수를 중심으로 이를 한글로 번역하고 신뢰도와 타당성을 검증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0여개 도구를 조합해서 개발한 서식만 160종이다. 단순히 종이 설문지를 전산화한 게 아니라 진료 전 과정에 PRO를 녹여내는 데 초점을 맞춘 작업이었다.

김 팀장은 “질환별, 진료과별 특성에 맞춘 문항 개발, 표준화 코드 적용, 데이터 마스터 관리 등에서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했다”며 “각 분야에서 최선의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 많은 아이디어를 냈다”고 했다.

PRISM은 활용되지 않던 데이터에 가치를 부여했다. CDW(Clinical Data Warehouse)와 연동돼 연구자가 원하는 데이터를 추출해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암환자의 정신 건강 상태를 평가하는 ‘Distress Thermometer(DT)’나 유방암 환자의 만족도를 평가하는 ‘BREAST-Q’ 등 다양한 PRO 도구를 활용한 임상연구도 활발하다. 김 팀장은 “질환별, 진료과별로 흩어져 있던 환자 상태 평가 데이터를 통합해 분석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삼성서울병원은 그 이상을 계획하고 있다. 상급종합병원이 중증질환 중심으로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PRISM을 진료협력을 맺은 1·2차 의료기관과 공유해 연속성 있는 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PRISM을 클라우드 기반 포털 형태로 발전시켜 협력 병원들이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개방형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김 팀장은 “각 병원이 개별적으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미 잘 구축된 시스템을 같이 쓰는 것이 환자에게도, 국가 의료체계에도 기여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진이라는 도구 하나 바꿨을 뿐인데 의료 패러다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성서울병원의 도전은 이제 병원 밖으로 뻗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