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의료기기법, 새로운 변화 제시하는 나침반 돼야
정용익 의료기기산업혁신연구회장
5월 29일은 ‘의료기기의 날’이다. 지난 2003년 ‘의료기기법’이 제정된 날이기도 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8년 5월 29일을 의료기기의 날로 지정했고 올해로 17주년을 맞는다. 당시 의료기기법은 의약품 중심의 약사법 체계에서 의료기기를 분리해 독립적인 법적 지위를 부여한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이 법은 지난 22년간 의료기기 산업의 성장과 국민 건강 보호라는 두 축을 안정적으로 뒤받치며, 안전성과 품질 향상을 위한 규제 기반을 공고히 해왔다.
의료기기법은 국내 의료기기 산업의 성장을 위한 초석이 됐다. 법률 제정 당시 2조원에도 미치지 못하던 시장 규모는 이미 10조원을 넘어섰고, 국산 의료기기 수출도 꾸준히 증가해 연간 70억 달러를 상회하고 있다. GMP 제도, 인허가 절차, 사후관리 체계 등은 의료기기의 품질과 안전성을 확보하며 제도의 실효성을 입증해왔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체외진단기기 긴급사용승인 제도는 위기 속에서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그러나 기술과 산업 환경은 이미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의료기기의 중심은 하드웨어에서 AI, 소프트웨어, 디지털 헬스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으며, 사용 환경 역시 병원에서 가정과 모바일 플랫폼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고정적인 규제 틀로는 포용하기 어려운 새로운 특성과 속도를 요구한다.
현행 제도는 여전히 정적인 인허가 중심 구조에 머물고 있으며, 기술의 빠른 발전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유연성이 부족하다. 소프트웨어의 경미한 변경조차도 새로운 허가 절차를 거쳐야 하고, 동일한 제품이 여러 법령에 따라 중복 심사를 받아야 하는 등 제도의 효율성과 실질적 관리 능력 모두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새로운 형태의 의료기기를 어떻게 정의하고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여전히 불명확하다는 점은 제도 전반에 불확실성을 남긴다.
정부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인식하고 ‘체외진단의료기기법’, ‘혁신의료기기지원법’, ‘디지털의료제품법’ 등을 제정해 대응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 개별 법률은 기존 체계의 보완에 그칠 뿐, 빠르게 융합되는 기술 환경과 복합적 제품 구조에 전면적으로 대응하기엔 한계가 뚜렷하다.
이제는 단순한 조항 개정이나 행정지침 보완을 넘어 규제 시스템 전반을 미래 지향적으로 재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제품의 위험도에 따른 차등 규제, 설계부터 폐기까지 전 생애주기를 고려한 통합 관리, 예측 가능한 허가 체계, 제조사의 품질책임 강화, AI·디지털 기술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제도 기반, 국제 조화를 통한 글로벌 경쟁력 확보, 그리고 실제 사용 환경에 맞춘 사후관리 체계 재정비 등은 우리가 반드시 추진해야 할 핵심 과제다.
지금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법률의 개정이냐 제정이냐 하는 형식적 문제가 아니며, 그 명칭을 유행에 맞추어 그럴듯하게 만들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낡은 틀을 어떻게 미래형 규제 구조로 전환할 것인가이다. 규제는 과거를 관리하는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어야 한다.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시대에 법은 그보다 반 발 앞서 있어야 하며, 미래를 예측하고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22년 전, 의료기기법이 의료기기 산업의 ‘분리와 독립’을 실현했다면, 이제는 ‘현대화’를 통해 그 산업의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다가오는 AI·디지털 시대에 한국 의료기기 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바로 법과 제도의 새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산업의 혁신과 국민의 안전을 함께 지켜낼 수 있는 새로운 규제 철학이 절실하다. 그것이 지난 22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다음 20년을 준비하는 가장 현명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