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떠나 우리 동네 누비는 사직 전공의
[수련병원 떠난 전공의는 지금②] 내과 사직 전공의 신천연합병원 방문진료 담당 의사로 홀로서기 시작 "방문진료 환자와 깊은 '라포', 매력…계속 하고 싶다" 대학병원과 달라도 "방문진료로 삶의 질 개선 가능"
수련병원에서 전공의들이 사라진 지 7개월째다. 일부는 아예 전문의가 되길 포기했고 일부는 돌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전공의 대표가 말했듯이 이들은 과학적인 근거도 내놓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된 의대 증원 정책에 ‘화가 나 있다’. 그래도 마냥 화만 내고 있을 수 없기에 전화위복을 위해 각자도생하고 있다. 청년의사는 전문의가 되길 포기하지 않은 사직 전공의와 새로운 길을 찾은 사직 전공의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10일 오전, 경기도 시흥시 신천연합병원 통합돌봄센터 이세한(가명) 과장은 병원 10분 거리인 오인택(가명) 씨 집을 찾았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자세가 익숙하다. 오 씨는 밥상을 옆으로 밀고 엉덩이 걸음으로 다가와 앉았다. "선생님 바쁘신데 어떡해." 말은 그래도 기분 좋은 눈치다.
오 씨는 관절염이 심하다. 전날 낙상 사고까지 당해 다리를 잘 펴지 못한다. "다리가 짤라질 거 같아." 검사를 해야 하는데 병원에 함께 갈 보호자가 없다. 자녀는 모두 다른 지역에 있다. 함께 사는 손녀는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돌아온다. "돈도 없다." 그래서 오 씨는 '검사받자'는 말에 지레 손사래부터 쳤다. "젊어서부터 아팠어. 병원 가봤자야."
이럴 때면 이 과장은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낯설었다. "대학병원에서는 너무 당연한 검사와 처치"인데 여기서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어렵게" 해야 한다. 보호자 부재와 경제적 사정만 문제가 아니다. 환자들은 집에 찾아오는 의사를 반기면서도 "병이 나으리란 희망은 품지 않는다."
다음 가정인 한정수(가명) 씨도 비슷하다. 이 과장은 챙겨온 치매 선별 검사 설문지를 선뜻 펼치지 못했다. "의사가 집에 와보는 것 이상의 검사와 처치"를 자녀가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한 씨의 자녀는 일주일에 하루 머물다 간다. 영양 상태와 혈압·당 수치를 묻는 윤혜란 실장(간호사)에게는 한 씨의 요양보호사가 대신 답했다.
"대학병원은 늘 보호자를 대동하잖아요. 검사나 처치도 비용을 신경 쓰지 않고요. 그런데 여기는 약 먹는 것조차 챙길 사람이 없으니 제가 몇 번이고 강조하고 필요성을 설득해야 해요. 방문진료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 점을 유념했으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아요." 그만큼 이 과장은 "배울 게 여전히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젠 수련생도 아니고 교수님도 안 계시니" 더 잘 챙겨야 한다며 웃었다.
이 과장은 '사직 전공의'다. 다른 지역에 위치한 국립대병원 내과 수련을 중단하고 지난 6월 사직했다. 신천연합병원에서 방문진료 의사로 홀로서기한 지 삼 개월째다. 첫 한 달은 기존 방문진료 의료진과 현장을 다니며 배웠다. 홍승권 센터장도 현장에 나와 "뒤를 받쳐줬다." 틈틈 연수 강좌를 다니고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그 사이 몇 번씩 찾아간 집이 많아졌다. 알아보는 환자도 늘었다. 환자 집에서 가까운 약국이 어디인지, 어느 의원에 진료 협조를 구해야 하는지 동네 지리도 훤하다.
한 씨가 다른 의원에서 타온 약봉지를 살펴본 이 과장은 그 의원에 진료의뢰서를 보내기로 했다. 치매 증세를 보이는 데다 "지난 방문보다 오히려 상태가 나빠지셨다"는 윤 실장과 이수지 사회복지사 말이 걸렸다. 의원에는 "먹던 약"이라고 요양보호사에게 대리처방만 하지 말고 "의사가 환자를 직접 보고" 진료와 처방을 다시 하라고 권하려 한다.
꼭 한 씨 같은 경우가 아니라도 이 과장은 "협진 요청을 열심히 한다." 집에 혼자 누워 있다가 병이 악화되거나 정신 건강 문제가 친 환자를 자주 발견한다. "최악의 상황을 면하고 빠른 회복을 도와" 보람차지만 한편으로 아쉽다. "대학병원에 있을 때처럼 환자의 치료 과정을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서"다. 의사로서 느끼는 한계도 털어놨다. "수련을 다 마친 내과 전문의였다면 더 잘 해내지 않았을까" 고민도 없지 않다. 그래도 "앞으로 방문진료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방문진료의 매력을 묻자 이 과장은 "환자와 오래 이야기 나누는 점"을 꼽았다. 이 과장은 한 가정당 평균 30분 이상 진료한다. 처음 방문하는 집은 1시간 이상도 머문다. 환자 대부분이 혼자 사는 고령층 환자다. "누군가 집에 와서 말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좀처럼 가시지 않는 아픔, 늘 누워있다 보니 찾아오는 우울처럼 "환자 내면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방문진료 의사는 이를 치료에 반영한다. 대화로 환자의 치료 의지가 높아지면 더할 나위 없다.
이날 마지막 환자인 박민희(가명) 씨가 그렇다. 오십견을 앓는 박 씨는 방문진료에서 배운 물리치료 동작을 꾸준히 실천해 크게 호전됐다. 방문진료팀이 직접 치료 영상을 촬영해 제공하고 신천연합병원 물리치료사가 함께 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환자가 낫겠다는 의지가 높고 치료에 적극적이다." 윤 실장과 이 복지사도 "의지가 있는 환자는 상태가 빠르게 좋아진다"고 입을 모았다.
이 과장은 환자들이 "의사가 집에 왔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길" 바랐다. 잘못 나간 처방을 바로잡을 수도 있고 "며칠만 입원하고 다시 집에 돌아오도록" 하는 게 방문진료다. "방문진료로 병을 고칠 수 있고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다고, 집에서 아프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믿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집을 나설 때 방문진료팀은 환자에게 "다음에 또 오겠다"고 인사한다. 그래서 이 과장은 "모쪼록 방문진료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부 의료기관의 의지에 기대 이어가기에는 "찾아가야 할 곳이 정말 많다."
삼 개월 전 내과 전문의이자 "평범한 병원 봉직의"를 그리던 전공의가 우리 동네 방문진료 의사로서 첫발을 뗐다. 수련병원을 떠나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이번 여름이 더워서 방문 가정 위생 관리가 어렵다"고 답했다. 그만큼 그는 여기 온 마음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