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떠나 우리 동네 누비는 사직 전공의

[수련병원 떠난 전공의는 지금②] 내과 사직 전공의 신천연합병원 방문진료 담당 의사로 홀로서기 시작 "방문진료 환자와 깊은 '라포', 매력…계속 하고 싶다" 대학병원과 달라도 "방문진료로 삶의 질 개선 가능"

2024-09-19     고정민 기자

수련병원에서 전공의들이 사라진 지 7개월째다. 일부는 아예 전문의가 되길 포기했고 일부는 돌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전공의 대표가 말했듯이 이들은 과학적인 근거도 내놓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된 의대 증원 정책에 ‘화가 나 있다’. 그래도 마냥 화만 내고 있을 수 없기에 전화위복을 위해 각자도생하고 있다. 청년의사는 전문의가 되길 포기하지 않은 사직 전공의와 새로운 길을 찾은 사직 전공의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10일 오전, 경기도 시흥시 신천연합병원 통합돌봄센터 이세한(가명) 과장은 병원 10분 거리인 오인택(가명) 씨 집을 찾았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자세가 익숙하다. 오 씨는 밥상을 옆으로 밀고 엉덩이 걸음으로 다가와 앉았다. "선생님 바쁘신데 어떡해." 말은 그래도 기분 좋은 눈치다.

오 씨는 관절염이 심하다. 전날 낙상 사고까지 당해 다리를 잘 펴지 못한다. "다리가 짤라질 거 같아." 검사를 해야 하는데 병원에 함께 갈 보호자가 없다. 자녀는 모두 다른 지역에 있다. 함께 사는 손녀는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돌아온다. "돈도 없다." 그래서 오 씨는 '검사받자'는 말에 지레 손사래부터 쳤다. "젊어서부터 아팠어. 병원 가봤자야."

이럴 때면 이 과장은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낯설었다. "대학병원에서는 너무 당연한 검사와 처치"인데 여기서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어렵게" 해야 한다. 보호자 부재와 경제적 사정만 문제가 아니다. 환자들은 집에 찾아오는 의사를 반기면서도 "병이 나으리란 희망은 품지 않는다."

국립대병원 내과를 사직한 이세한 사직 전공의는 신천연합병원 통합돌봄센터 과장으로 시흥 지역 방문진료를 담당하고 있다(ⓒ청년의사).

다음 가정인 한정수(가명) 씨도 비슷하다. 이 과장은 챙겨온 치매 선별 검사 설문지를 선뜻 펼치지 못했다. "의사가 집에 와보는 것 이상의 검사와 처치"를 자녀가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한 씨의 자녀는 일주일에 하루 머물다 간다. 영양 상태와 혈압·당 수치를 묻는 윤혜란 실장(간호사)에게는 한 씨의 요양보호사가 대신 답했다.

"대학병원은 늘 보호자를 대동하잖아요. 검사나 처치도 비용을 신경 쓰지 않고요. 그런데 여기는 약 먹는 것조차 챙길 사람이 없으니 제가 몇 번이고 강조하고 필요성을 설득해야 해요. 방문진료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 점을 유념했으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아요." 그만큼 이 과장은 "배울 게 여전히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젠 수련생도 아니고 교수님도 안 계시니" 더 잘 챙겨야 한다며 웃었다.

이 과장은 '사직 전공의'다. 다른 지역에 위치한 국립대병원 내과 수련을 중단하고 지난 6월 사직했다. 신천연합병원에서 방문진료 의사로 홀로서기한 지 삼 개월째다. 첫 한 달은 기존 방문진료 의료진과 현장을 다니며 배웠다. 홍승권 센터장도 현장에 나와 "뒤를 받쳐줬다." 틈틈 연수 강좌를 다니고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그 사이 몇 번씩 찾아간 집이 많아졌다. 알아보는 환자도 늘었다. 환자 집에서 가까운 약국이 어디인지, 어느 의원에 진료 협조를 구해야 하는지 동네 지리도 훤하다.

이 과장은 환자와 깊은 '라포'를 쌓을 수 있는 환경이 방문진료의 매력이라고 했다(ⓒ청년의사).

한 씨가 다른 의원에서 타온 약봉지를 살펴본 이 과장은 그 의원에 진료의뢰서를 보내기로 했다. 치매 증세를 보이는 데다 "지난 방문보다 오히려 상태가 나빠지셨다"는 윤 실장과 이수지 사회복지사 말이 걸렸다. 의원에는 "먹던 약"이라고 요양보호사에게 대리처방만 하지 말고 "의사가 환자를 직접 보고" 진료와 처방을 다시 하라고 권하려 한다.

꼭 한 씨 같은 경우가 아니라도 이 과장은 "협진 요청을 열심히 한다." 집에 혼자 누워 있다가 병이 악화되거나 정신 건강 문제가 친 환자를 자주 발견한다. "최악의 상황을 면하고 빠른 회복을 도와" 보람차지만 한편으로 아쉽다. "대학병원에 있을 때처럼 환자의 치료 과정을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서"다. 의사로서 느끼는 한계도 털어놨다. "수련을 다 마친 내과 전문의였다면 더 잘 해내지 않았을까" 고민도 없지 않다. 그래도 "앞으로 방문진료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방문진료의 매력을 묻자 이 과장은 "환자와 오래 이야기 나누는 점"을 꼽았다. 이 과장은 한 가정당 평균 30분 이상 진료한다. 처음 방문하는 집은 1시간 이상도 머문다. 환자 대부분이 혼자 사는 고령층 환자다. "누군가 집에 와서 말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좀처럼 가시지 않는 아픔, 늘 누워있다 보니 찾아오는 우울처럼 "환자 내면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방문진료 의사는 이를 치료에 반영한다. 대화로 환자의 치료 의지가 높아지면 더할 나위 없다.

환자 의지에 따라 방문진료 효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신천연합병원은 방문진료팀 외 다른 부서도 방문진료를 지원하고 있다. 방문진료팀이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는 모습(ⓒ청년의사).

이날 마지막 환자인 박민희(가명) 씨가 그렇다. 오십견을 앓는 박 씨는 방문진료에서 배운 물리치료 동작을 꾸준히 실천해 크게 호전됐다. 방문진료팀이 직접 치료 영상을 촬영해 제공하고 신천연합병원 물리치료사가 함께 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환자가 낫겠다는 의지가 높고 치료에 적극적이다." 윤 실장과 이 복지사도 "의지가 있는 환자는 상태가 빠르게 좋아진다"고 입을 모았다.

이 과장은 환자들이 "의사가 집에 왔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길" 바랐다. 잘못 나간 처방을 바로잡을 수도 있고 "며칠만 입원하고 다시 집에 돌아오도록" 하는 게 방문진료다. "방문진료로 병을 고칠 수 있고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다고, 집에서 아프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믿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집을 나설 때 방문진료팀은 환자에게 "다음에 또 오겠다"고 인사한다. 그래서 이 과장은 "모쪼록 방문진료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부 의료기관의 의지에 기대 이어가기에는 "찾아가야 할 곳이 정말 많다."

삼 개월 전 내과 전문의이자 "평범한 병원 봉직의"를 그리던 전공의가 우리 동네 방문진료 의사로서 첫발을 뗐다. 수련병원을 떠나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이번 여름이 더워서 방문 가정 위생 관리가 어렵다"고 답했다. 그만큼 그는 여기 온 마음을 다하고 있다.

방문진료는 이제 한 의료기관의 의지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방문진료 의사가 "찾아가야 할 곳이 정말 많다." 진료를 마치고 다음 가정으로 이동하는 신천연합병원 방문진료팀(ⓒ청년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