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 전공의가 서울아산병원 피부과에 남긴 ‘선물’
[수련병원 떠난 전공의는 지금①] 김경훈 사직전공의 취미로 하던 코딩으로 ‘잡일’ 없애고 진료 효율 높여 “사직전공의들 대부분 이 시간 현명하게 쓰고 있다” “정치 문제 됐지만 잘 풀려서 피부과 의사로 돌아가고파”
수련병원에서 전공의들이 사라진 지 7개월째다. 일부는 아예 전문의가 되길 포기했고 일부는 돌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전공의 대표가 말했듯이 이들은 과학적인 근거도 내놓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된 의대 증원 정책에 ‘화가 나 있다’. 그래도 마냥 화만 내고 있을 수 없기에 전화위복을 위해 각자도생하고 있다. 청년의사는 전문의가 되길 포기하지 않은 사직 전공의와 새로운 길을 찾은 사직 전공의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지금 병원에 없지만 그 자리에 있는 교수와 간호사들은 진료할 때마다 ‘그의 도움’을 받는다. 그가 바꿔 놓은 시스템 덕분에 누군가는 해야 할 ‘잡일’ 중 일부가 사라졌고 진료는 더 편해졌다. 전공의 1명이 서울아산병원 피부과에 가져온 변화다.
서울아산병원 피부과는 ‘DermaView(더마뷰)’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환자 피부 임상 사진을 간편하게 저장하고 손쉽게 검색해서 진료에 활용하고 있다. 지난 2월 말 사직한 김경훈 전공의가 개발한 프로그램이다.
대학병원 피부과 대부분은 임상 사진을 일일이 폴더에 저장해 관리한다. 전자의무기록(EMR)이나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PACS)을 이용하는 곳도 있지만 피부 질환 사진을 저장하고 데이터로 활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나마 서울아산병원 피부과는 임상 사진을 관리하는 전용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너무 오래됐고 에러도 많아”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환자별로 임상 사진을 저장하고 관리하는데 너무 많은 품이 들었다.
지난 2021년 당시 서울아산병원 인턴이었던 김 전공의가 피부과에서 했던 ‘인턴잡’ 중 하나가 매주 ‘슬립(Slip)지’ 140장 정도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모든 내용을 사진처럼 한 장에 정리한 슬립지를 만들려면 조직 검사 결과를 하나하나 붙여 넣고 흰 박스를 그리고 그 안에 번호도 넣어야 했다. 몇 시간이나 걸리는 일이고 실수하면 레지던트에게 혼나곤 했다.”
여기서 ‘개발자 본능’이 발동했다. 의대생 시절 주식 투자를 위해 “코딩 좀 해봤던” 경험을 살려 슬립지 작성 작업을 하루 만에 자동화했다. “300줄도 안 되는 짧은 코드로 구현이 가능”했고 9시간이나 걸렸던 일은 “이미지 작업이 100% 자동화됐기에” 2시간으로 줄었다. 김 전공의는 인턴을 마치면서 이 프로그램을 피부과를 도는 후배 인턴들에게 ‘전수’했고 지금도 감사 인사를 받고 있다.
이 경험으로 김 전공의는 “코딩을 이용해 병원 내 비효율적인 부분을 개선하고 실수를 예방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기회는 빨리 왔다. 피부과 전공의 1년 차가 되자 또 다른 ‘잡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들이 연구할 때 필요한 차트 리뷰를 만드는 일이었다. “2,000명이 넘는 환자의 EMR을 리뷰해 엑셀에 하나하나 채워 넣는 작업을 수도 없이 해야 했다.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냐고 윗년 차 선배에게 물었더니 그냥 하나하나 수 주 동안 몇십 시간을 하면 다 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는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이 시스템을 자동화하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했다. 그는 “1년 차 때 컴퓨터를 이용해 하는 업무 대부분을 코딩으로 자동화했고 1년 차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병원에는 비효율적인 일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환자 피부의 병변을 찍은 임상 사진 관리가 대표적이었다. ‘더마뷰’를 개발한 계기이기도 하다. 피부과 의사들에게 “CT나 EKG보다 더 중요한 데이터가 임상 사진”이지만 관리는 허술하고 비효율적이었다. 윈도우에 연도·월·일별 폴더를 만들고 그 안에 임상 사진을 저장했다. 임상 사진 제목은 환자 등록번호와 진단명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환자를 진료하는 도중 의사가 과거 사진을 보려면 일일이 폴더를 뒤져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는 “피부 임상 사진이 병원 의료 데이터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다른 대학병원 피부과는 임상 사진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카메라로 촬영한 피부 임상 사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조회하는 전용 프로그램이 없다”는 걸 알게 됐고 직접 개발하기로 했다.
그는 교수들이 환자를 진료하고 판독할 때 빠르게 임상 사진을 검색하고 날짜별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임상 사진 정리 업무를 담당하는 전공의 1년 차와 간호사들의 품이 덜 들어야 했다.
그는 퇴근 후 1시간씩 투자해서 한 달 만에 더마뷰를 개발했다. 피부과 교수들 앞에서 더마뷰를 시연했고 교수들은 그 자리에서 도입을 결정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더마뷰를 써본 교수들과 동료 전공의들, 간호사들은 “활발한 피드백”을 줬고 개선할 부분이 쏟아졌다. 피드백을 반영해 조직 검사 결과를 더마뷰에 연동해 바로 볼 수 있도록 개선했다. 치료 전후 사진을 비교할 수 있는 기능도 갖췄다. 또 환자 피부 병변을 찍고 그 사진마다 일일이 정보를 입력해야 했던 일도 자동화했다. 간호사들이 매일 4~5시간 이상 해야 했던 이 업무는 100% 자동화됐다.
“2년 동안 여러 피드백과 추가 개발 과정을 거쳐 완성된 더마뷰가 서울아산병원 피부과에 도입됐고 현재 모든 피부과 의료진과 직원들이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곳에 없다. 의대 증원 사태로 지난 2월 말 사직서를 냈고 7월 수리됐다. 그는 “나는 떠났지만 내가 개발한 프로그램이 병원에 남아 있으니 내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며 “개인의 결정을 넘어서는 정치 문제가 돼 버렸지만 일이 잘 풀려서 환자를 보는 피부과 의사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피부과 전문의로서 대학병원에 남고 싶다는 그는 ‘의사 개발자’ 꿈도 꾸고 있다. “취미로 하던 코딩”을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 지난해 울산대 대학원 의공학과에 진학했고 현재 울산의대 융합의학과 김남국 교수 연구실에 있다.
그는 “의사 개발자의 힘은 임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임상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없다”며 “병원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하는데 전문가로 관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전문의 자격을 취득해서 할 게 많고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외부 요인에 의해 그가 바라는 전문의 자격 취득이 기약 없이 미뤄지는 상황이지만 그는 “이 시간을 의미 있게 쓰고 싶다. 오히려 연구에 집중할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그처럼 사직한 다른 동료들도 “이 시간을 현명하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스타트업 인턴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고 로컬에 취직해 대학병원에서 경험하지 못한 부분을 경험하기도 한다”며 “저마다 전화위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