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상대로 일하는 의사


WHO. 192개 회원국과 8천명의 직원이 있으며, 1년에 11억불을 쓰는 거대한 국제기구. 오는 7월 21일부터 5년 동안 이 기구의 수장(사무총장)으로 일할 사람은 바로 한국인 의사 이종욱 박사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기구 수장이며 국제사회에서 UN사무총장과 동급의 대우를 받는다는 그를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눠봤다. <편집자 주>


- WHO와 처음 인연을 맺은 계기는?

WHO는 내가 의대에 입학했을 때에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단어였다. WHO 기준치라든지 하는 곳에서. 그러나 그것은 UN이라는 이름을 자주 들어도 그 실체를 잘 모르는 것처럼, 좀 막연한 이름이었다.

하와이 대학에 있던 내가 83년부터 WHO에서 일하게 된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남태평양 나병 팀장이 제네바로 옮기면서, 당시 남태평양에서 나병 환자를 볼 수 있는 젊은 사람을 나병 팀장으로 찾고 있었다. 사모아에 있는 열태평양 연구소에서 선임자를 처음 만났고, 하와이 대학에 있던 교수의 추천으로 서류를 제출한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 임지가 남태평양 피지섬이었는데, 그곳이 매우 매력적인 섬이었고, 남태평양 곳곳을 충분한 출장비와 함께 다닐 수 있는 점도 좋았다. 원래는 2∼3년 정도 할 생각이었는데, 3년쯤 후에 마닐라에 있는 WHO 지역사무소의 전염병 국장으로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결국 87년부터 94년까지는 소아마비, 천연두 관련 일을 했다. 이후 98년까지는 WHO 전체의 백신국장으로 일을 했다. 백신국장은 경쟁이 매우 치열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뽑힌 것이다.

- 마치 ‘우연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WHO 사무총장이 되시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을 법한데?

내가 94년부터 98년까지 백신국장으로 일하며 공중보건과 예방의학 분야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98년에 현 사무총장이 나를 보좌관으로 썼는데, 요즘말로 서로 코드가 맞지 않았다. 나는 프로그램을 맡아서 하는 것은 잘 하는데, 누구를 보좌하는 일은 잘 못하는 편인 것 같다. 그래서 높은 자리였지만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에는 결핵 프로그램을 맡아서 진행했다. 작년에 현 사무총장이 연임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무총장에 도전할 생각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 사람이 한다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정부에도 떼를 쓰다시피 하며 도움을 청했고, 정부와 의료계 등 여러 사람들이 도움을 줘서 사무총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WHO와 함께 한 20년

- 현재 WHO 본부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사람은 몇 명인가?

정식 직원은 나 한 사람이고, 정부에서 파견 나와 있는 사람이 3명 있다. 내가 제네바의 WHO 본부에 온 첫 번째 한국인이고, 첫 번째 한국인 국장이었고, 첫 번째 한국인 사무총장이다.

- 한국의 후배들이 WHO에 진출할 수 있도록 ‘역할’을 좀 하시지 그랬나?

후배를 양성한다는 것은 바빠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예산이 1억불에 달하는 부서의 책임자로 일하는 것은 생각보다 바쁘다. 하지만 전세계의 WHO 지부에서 백신 관련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100명 정도인데, 그들 모두가 나의 후배라고 생각한다. 한국사람만 특별히 더 생각한다면 내가 WHO에서 근무할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 분담금에 따라 직원 티오가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나라에는 몇 자리가 배정되어 있나?

본부와 지부 전체를 합쳐서 16자리다. 공무원 파견까지 생각하면 현재 6명의 한국인이 있으니 10자리 정도는 비어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이 지원하면 무조건 된다는 것은 아니다. 분담금에 따른 티오가 그렇다는 뜻이다.

- 우리나라가 내는 WHO 분담금이 세계에서 10번째라던데, 국력에 비해 많이 내는 것은 아닌가?

딱 적정하게 내고 있는 것이다. GNP와 인구 등 여러 가지 기준이 있는데, 그에 따라 액수가 결정된다. 작년에는 470만불을 냈고, 올해부터는 750만불을 내야 한다. 참고로, 북한은 3만불을 내고 있다.

- 혹시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라서 분담금이 오른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 경제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25%를 분담하던 미국이 21%만 분담하겠다고 방침을 바꾸어서 다른 여러 나라들의 부담이 좀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돈은 없어도 나는 백만장자

- 최근 우리나라의 의사들 중에도 WHO와 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박사님의 생활은 어떠한가?

나는 의사 면허를 받은 후부터 지금까지 돈은 적게 벌었지만 사는 모양은 백만장자처럼 살아왔다.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하고, 가고 싶은데 다 가고, 보고 싶은 것 다 보면서 말이다. 휴가가 많은 것도 큰 장점이다. 휴가가 1년에 3개월 정도 되는데, 다 찾아먹을 수가 없을 정도다. 내가 3개월을 쉬어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면 혹시 사람들이 나를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두려워서도 다 쉴 수가 없다(웃음). 봉급은 미국의 연방공무원 수준으로 받는다. 자녀 교육비 따로 나오고 연금도 괜찮고, 환자에게 시달리지 않는 점까지 생각하면 보수가 적지는 않다.

- 말이 나온 김에 구체적인 보수를 말씀해 주실 수 있나?

못할 것 있겠나. 결핵국장 시절에는 1년에 12만불이었다. 자녀 교육비는 1인당 1만4천불이 나온다. 미국 의사들 평균 소득이 월 2만불 정도 되지만, 우리는 세금을 안 내니까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나중에 연금도 한 달에 7천불 정도 나온다.

- 세금을 안 내도 되는 이유는?

외교관 신분이라서 그렇다.

- 사무총장이 되면 봉급 인상은?

본봉이 14만불, 생활비가 7만불, 품위 유지비가 2만불이니, 연 23만불 정도 된다.

- 이 이야기를 들으면 관심을 갖는 의사들이 더 많아질 것 같다. 보수와 휴가 말고, WHO에서 일하는 것의 매력은 무엇인가?

원리원칙대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국내에서는 처방 한 가지도 마음대로 못하지 않나. 또한 전세계 보건의료 분야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일은 보람있는 일이다. 일에 대한 긍지를 느낄 수 있으면서, 삶의 질도 높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임상을 한 의사로서, ‘환자’가 아니라 ‘지구’를 상대로 질병을 어떻게 퇴치할 것인가를 거시적으로 생각하는 일은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5배수 안에만 들면 뽑아줄 용의

- 실제로 도전하고 싶은 의사들은 맨 먼저 무엇을 해야 하나?

WHO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항상 공채 광고가 나와 있다. 뜻이 있는 사람은 자격 요건 등을 보고 맞는 게 있을 경우 응모하면 된다. 응모자 중에서 3∼5배수에 해당하는 사람의 서류가 사무총장에게 온다. 그 중에 한국인이 있으면 얼마든지 도와줄 의향이 있다(웃음). 3∼5배수에 끼지 못한 사람을 내가 뽑아줄 수는 없다. 거기까지는 자력으로 해야 한다. 국제기구의 사무총장이 자기 사람, 자기 지역을 어떻게 안배하는가 하는 문제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WHO에서 의사만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인문과학, 경제학, 행정학, 전통의학, 치과의사, 간호학 등 많은 분야에서 모두 8,000명 정도가 WHO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중 30% 정도가 의사다.

- 8,000명이 모두 본부에서 일하는 것인가?

제네바 본부에는 3,500명이 있고, 나머지는 6개 지부에서 일한다.

- 의사의 경우, WHO 진출에 특히 유리한 전공과목 같은 것이 있나?

없다. WHO 기구를 보면 전염병, 비전염병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비전염병에는 정신과, 영양, 백신, 생물학 등 보건의료, 질병과 관련된 모든 분야가 다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하더라도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공중보건에 대한 마인드가 우선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배경이 되어야 하지만, 임상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공중보건에 대한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 전공 외에 필요한 조건들이 있다면?

일단 언어가 되어야 하고, 다양한 문화권에서 외로움을 타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한다. 하루라도 김치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든지, 한국 사람과 얘기를 하지 않고는 못 살겠다는 사람은 곤란하다. 여러 가지 문화 속에서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국제기구에서는 우리나라에서처럼 학연이나 지연 따지면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분위기가 없다. 완전히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적인 규약 같은 것을 만들 때 WHO에서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을 부르는데, WHO가 부르면 전세계의 모든 전문가가 다 온다. 그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회의하고, 그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하려면 자신도 그에 못지 않은 능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매력적인 일, 젊은 의사들의 도전 기대

- 이 박사님이 국내 보건의료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WHO에서 세계적인 모델을 만들기 때문에 국내의 정책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게 된다.

- 국내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견해는?

우리나라를 떠난 지 25년이 됐다. 솔직히 아주 자세하게는 모른다. 의약분업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좋은 정책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많은 것을 보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국내의 외국인 노동자의 의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의사들도 많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WHO 차원의 정책 방향 같은 것은 없나?

인권과 보건의료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외국인 노동자의 의료 문제도 인권 차원에서 봐야 한다. 차별을 하는 것은 매우 야만적인 것이다. 내국인과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WHO 차원에서 특별히 정해진 방향은 없다.

- 혹자는 박사님을 가리켜 소의(小醫), 중의(中醫), 대의(大醫) 중에서 대의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하던데,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나?

대의라고까지야 할 것 있겠나.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생각하고, 또 구체적인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점이 좋다.

나는 기본적으로 돈 때문에 의사 생활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의사가 돈을 많이 번다고 해 봐야 사업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의사는 정말로 그 일이 좋아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다. 정말로 의사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의사가 돼야 하고, 의사가 된 후에는 의사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정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단하지 않은가.

- 한국의 의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의사라는 직업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고급 직업이며, 동시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직업이다.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인정받을 때에 따라오는 게 안정된 생활이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안정된 수입에만 급급해 데모하고 한다면, 안정된 수입이 확보되지 못하는 것 뿐 아니라 존경도 받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의사로 살지 않는가. 평범한 의사들이 주변에서 존경받게 된다면 의사 집단 전체도 존경받을 수 있다.

WHO사무총장을 하는 것과 동네의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똑같이 소중한 일이고 큰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의사들이 자존심을 지키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긍지를 느끼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대담 : 박재영 편집국장 medicaljourn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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