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대장암 치료법으로 암질심 통과 후 1년째 심사 제자리

예후가 불량한 BRAF V600E 변이 대장암 환자에서 표준요법제로 권고되고 있는 표적항암제 '비라토비(성분명 엔코라페닙)'의 급여 심사가 1년째 제자리인 가운데, 그 사이 환자들은 고가의 약제비 부담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국회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비라토비의 빠른 약제급여평가위원회(이하 약평위) 상정 및 급여화를 촉구하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대장암 가족력을 가진 청원인 정 모씨는 지난 2020년 4기 대장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중 작년 9월에야 유전자 검사를 통해 자신이 BRAF V600E 변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소개했다.

이후 병원으로부터 자신에게 '비라토비 + 얼비툭스(성분명 세툭시맙)' 병용요법이 가장 좋은 치료법임을 전달받고 치료를 진행 중이지만, 이 모든 치료가 비급여인 탓에 한달에 1,200만원이 넘는 비용을 온전히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기자에게 메일을 통해 해당 청원 사실을 알려온 정 모씨는 "항암치료엔 정해진 기간이 없어 계속 치료를 해나가야 하지만, 이대로라면 1년에 1억4,000만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한다"며 "자신은 적극적으로 치료 받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생을 더 이어나가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이어 정 모씨는 "비라토비가 작년 1월 암질환심의위원회(암질심)를 통과했지만, 아직까지도 약평위에 상정되지 않았다"라며 "비라토비가 빠르게 급여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덧붙였다.

정 모씨의 말대로, 비라토비 급여 안건은 현재 약평위 소위 단계에 머물러 있다. 비라토비의 판매사인 한국오노약품공업은 지난 2021년 8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품목허가를 받고 곧바로 심평원에 급여 신청을 진행해 이듬해인 1월 암질심까지 초고속으로 통과했지만, 이후 급여 논의는 멈춰버린 상태다.

현재 심평원은 국내 임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기존 치료요법(베바시주맙 + FOLFOX/FOLFIRI) 대비 '비라토비 + 얼비툭스'가 가진 혜택을 입증할 추가 자료를 요청한 상황이며, 판매사는 해당 자료를 만들기 위해 고심 중이다.

비라토비의 허가 임상시험에서 대조군으로 설정된 '이리노테칸/FOLFIRI + 얼비툭스' 병용요법이 국내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아, 실제 사용되고 있는 '베바시주맙 + FOLFOX/FOLFIRI'와 비교한 비라토비의 치료 혜택을 보여달라는 것이 심평원의 의중이다.

국내 대장암 전문가인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김태원 교수(前 대한종양내과학회 이사장)는 "국내에서 비라토비가 가진 임상적 가치를 정확히 알기 위해 심평원이 그 같은 자료를 요청한 것은 합당해 보인다"라면서도 "다만 한국의 경우 BRAF V600E 변이를 가진 환자가 5% 미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희귀암과 다르지 않고, 게다가 이 변이를 가진 환자에서 예후가 매우 나쁘다는 점을 감안해 리얼월드 데이터 등을 참고하는 방향도 생각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비라토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자는 연간 200명 이하다. 때문에 판매사 측도 비라토비의 급여를 경평면제 트랙으로 준비 중이다.

비라토비가 BRAF V600E 변이 대장암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표적치료 옵션으로 대체약제가 없고, 환자 수도 200명이 채 안된다는 점에서 경제성 평가를 생략할 수 있는 조건에 부합된다는 것.

경평면제제도가 당초 신약에 대한 환자 접근성 강화 및 치료옵션이 제한적인 희귀질환의 치료 환경 개선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현재 심평원이 요구하는 추가 자료 제출은 좀 과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비라토비는 이미 3상 임상시험에서 '글로벌리(globally)' 사용 중인 대조군을 상대로 효과 및 안전성을 입증했고, 전세계 유수의 가이드라인에서 BRAF V600E 변이 대장암 치료에 우선 권고된 유일한 약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라토비 사용으로 추가되는 재정 증가분이 연간 30억원 정도(판매사 추산)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입니다.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제발 환자 목소리에 기를 기울여 비라토비의 급여화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정 모씨가 국민청원 게시글에 올린 호소문이다. 작년 1월 암질심 통과 이후 1년이 넘도록 심평원과 판매사 간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사이, 지금도 환자들은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치료를 포기하거나 혹은 빚을 져가며 생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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