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고령화와 재해로 제도화 촉진
진료부터 배달까지 비대면 환경 조성
드론 이용한 약 배달 실험도 활발

일본에는 패스트푸드 체인점 '맥도날드' 신용카드 결제보다 먼저 보급된 의외의 제도가 있다. 온라인진료(비대면진료)와 의약품 배달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고령화와 잦은 재해는 패스트푸드 체인점조차 현금만 받는 '아날로그의 나라'를 원격의료 최전선에 세웠다.

일본은 지난 1997년 12월 의사와 환자 간 비대면진료를 시작했다. 당시 후생노동성은 '정보통신기기를 이용한 진료 통지'를 발표하고 도서지역처럼 의사가 부족한 의료과소지(의료취약지)에 한해 비대면진료를 하도록 했다. 대면진료를 원칙으로 9가지 만성질환이 비대면진료 대상으로 지정됐다. 일본 맥도날드가 2017년 11월 비자(VISA) 등 신용카드 결제 서비스를 도입하기 20년 전이다.

비대면진료 허용 이듬해인 1998년 12월에는 후생성 의약안전국 명의로 "와상 환자처럼 약국 방문이 어려운 경우 이전에 대면 복약지도했던 의약품에 한해 약제사(약사)가 처방전을 팩스로 전송받아 조제하고 전화로 비대면 복약지도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조제한 의약품을 다른 사람이 대신 전달하는 것도 허가했다.

일본 정부가 환자를 대상으로 한 원격의료 제한을 푼 배경에는 인구 고령화 문제가 있다. 1997년은 일본에서 65세 이상 고령층이 14세 이하 인구 수를 넘어선 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율은 100%를 돌파했다. 생산가능인구는 부족한데 의료비와 연금 등 사회보장비용은 치솟았고 부족한 세수를 충당하려면 나랏빚을 질 수밖에 없다. 원격의료는 고령화가 불러온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 중 하나로 여겨졌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법제도가 완비되지 않아 현장 혼란과 마찰을 겪기도 했다. 1997년과 1998년 허가된 비대면진료와 비대면 복약지도는 모두 후생성이 의료법을 자체적으로 해석해 지자체에 보낸 '통지'가 근거다. 느슨한 법망 사이로 일부 약국이 환자 편의를 명목으로 배달 서비스를 시도했고 그때마다 후생성이 규제에 나서는 '두더지 잡기'가 몇 년 동안 이어졌다.

일본은 비대면진료와 비대면 복약지도, 약 배달이 빠르게 시작된 나라 중 하나다(사진 출처: 게티이미지).
일본은 비대면진료와 비대면 복약지도, 약 배달이 빠르게 시작된 나라 중 하나다(사진 출처: 게티이미지).

원격의료 규제 완화와 법제도 정비는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본격화됐다. 지진과 해일로 대도시 의료 인프라조차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먼저 재해 지역에 의사 처방이 필요한 의료용 의약품(전문의약품) 배달이 허용됐다. 지난 2013년에는 약사법이 개정돼 의사 처방이 필요 없는 일반용 의악품(일반의약품)은 모두 비대면(온라인) 판매와 배달이 가능해졌다. 또한 지난 2015년 도서지역 외 일본 전국 비대면진료 규제가 풀렸다.

전문의약품 배달 규제 완화도 시작됐다. 지난 2015년 1월 발족한 일본 내각부 근미래기술 실증특구 검토회는 '온라인 복약지도' 정착 방향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비대면진료 전면 허용 다음해인 2016년에는 비대면진료 처방에 대해서는 약사도 화상전화를 이용해 온라인 복약지도가 가능하다고 명시했다. 온라인 복약지도는 전송된 처방전에 따라 의약품을 제조하고 비대면으로 복약지도한 후 약사가 환자에게 배달하는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이어 2019년 '의약품, 의료기기 등의 품질, 유효성 및 안전성 확보 등에 관한 법(약기법)'을 개정해 약사 복약지도에 대면 외에도 영상과 음성을 통한 방법을 인정했다. 일반의약품은 물론 전문의약품 비대면 판매와 배달 규제도 완화하기로 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시작해 코로나19로 제도화된 온라인 복약지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본격화된 온라인 복약지도와 약배달은 2020년 코로나19로 급격히 제도화됐다(사진 출처: 게티이미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본격화된 온라인 복약지도와 약배달은 2020년 코로나19로 급격히 제도화됐다(사진 출처: 게티이미지).

약기법 개정으로 2020년 9월 시행 예정이던 온라인 복약지도는 5개월 앞당겨져 그해 4월 10일부터 시작됐다. 코로나19 유행에 따른 감염병 전파를 막기 위해서다. 일본 정부는 2020년 4월 비대면진료 초진과 온라인 복약지도를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감염 예방이 목적인 만큼 시행 예정안보다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비대면진료 외에 외래진료와 재택진료 처방전도 취급할 수 있고 대면 복약지도 이력 유무에 상관없이 복약지도가 가능해졌다. 화상 시스템 없이 전화(음성)만으로 복약지도 해도 인정했다. 코로나19 환자 치료 차원에서 국가가 약제 배달비를 지원했다.

'0410대응'으로 불리는 이 조치는 원격의료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듬해인 2021년 8월 일본 정부는 온라인 진료 특례조치를 '항구화'하면서 0410대응도 공식적으로 제도화했다. 올해 4월에는 대면진료 환자까지 온라인 복약지도 대상을 확대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전에 따라 복약지도를 한 후 처방의약품을 전달하는 과정 모두 비대면(온라인)으로 할 수 있게 됐다.

의사 처방 없이 쓸 수 있는 일반의약품 판매와 배달은 더 활발하다. 2021년 기준 일반의약품을 취급하는 온라인 쇼핑몰이 2,000개가 넘는다. 라쿠텐이나 아마존처럼 대형유통업체도 진출해 있다.

드론 약 배달 실험도 활발…가이드라인 공표하고 표준화

일본이 추진하는 원격의료 인프라에는 드론을 이용한 의약품 배달도 포함돼 있다. 의료취약지와 재해지역은 물론 감염병 사태에 사람 간 접촉과 이동을 최소화하면서 의약품을 환자에게 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주목받았다.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이나 약사 대면 복약지도가 원칙인 요(要)지도의약품도 배달 대상으로 상정됐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5년부터 순차적으로 미야기·기타·지바 3개현에 드론 자동비행 실증특구를 설치하고 실증사업에 들어갔다. 의약업체는 물론 라쿠텐 등 유통업체들도 처방의약품 드론 배달에 뛰어들었다. 라쿠텐은 의료취약지 외 드론 배달 전면 허용을 염두에 두고 초고층아파트 의약품 배달 실험을 진행해 성공하기도 했다. 일본 양대 항공사인 일본항공(JAL)과 전일본공수(ANA)도 독자적으로 실증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 약국 체인인 QOL이 도서지역 등 의료취약지 배달을 목표로 진행 중인 드론 의약품 배달 실증사업 모습(사진 출처: QOL 공식 홈페이지).
일본 약국 체인인 QOL이 도서지역 등 의료취약지 배달을 목표로 진행 중인 드론 의약품 배달 실증사업 모습(사진 출처: QOL 공식 홈페이지).

기업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후생성과 국토교통성은 지난 2021년 6월 '드론을 이용한 의약품 배달 가이드라인'을 공표하고 표준적인 의약품 배달 절차를 제시했다. 특히 의약품 안전 관리 중요성과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다.

약사나 의료기관은 약제를 포장해 드론에 설치하고 환자 본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을 모두 관리해야 한다. 약사가 반드시 드론까지 조종할 필요는 없다. 드론 운전 능력과 경력을 보유한 이에게 맡기는 대신 책임 소재를 명시해야 한다. 드론 배달 책임은 이 '드론 운전자'에게 있다.

의약품 관리와 환자 진료정보 보호를 위해 처방의약품은 간호사 등 의료종사자가 수령한 뒤 환자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의료종사자가 없으면 개인정보와 처방 내용이 노출되지 않도록 추가 밀봉 조치해야 한다. 만약 드론이 추락하거나 불시착하면 의약품은 즉시 회수 처리하고 마약이나 향정신성의약품, 방사성의약품 배달은 피하길 권고했다.

지난 5일 일본 항공법 개정으로 주거지나 도심에서도 드론 비행이 가능해졌다. 일본 정부와 산업계는 비행 제한 지역 해제로 드론을 이용한 의약품 배달 사업이 탄력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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