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목적사용승인, 환자지원프로그램 등 인도적 차원 제도 활용 가능

약이 있어도 쓰지 못하는 환자들이 있다. 특히 요즘과 같이 유전체 분석 기술로 희귀난치질환 치료제들이 속속 개발되고, 약제의 가격이 연이어 최고가를 갱신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직 국내에 허가 전이거나 허가는 받았지만 보험급여를 적용 받지 못한 고가의 신약을 쓴다는 건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언감생심', 그야말로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국내 환자들은 이 같은 미허가·비급여 신약을 사용할 길이 아예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허가 전이라면 '임상시험용의약품 동정적 사용 제도'

'미국이나 유럽과 마찬가지로 국내 역시 다른 치료수단이 없고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인도적 차원으로 치료 기회를 제공·지원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임상시험용의약품 동정적 사용제도'가 있다.

임상시험용의약품은 안전성, 유효성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약이므로 반드시 임상시험 목적으로만 사용돼야 하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긴 기간이 소요되는 시판허가 과정을 기다리는 건 어려운 일. 때문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허가 전이라도 환자와 의료진에게 새로운 치료 기회를 부여하는 길을 열어두었다.

이 제도를 통해 국내 환자들에게 치료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제약기업으로는 '한국화이자제약'이 대표적이다.

한국화이자제약은 화이자가 개발한 ROS1/ALK 억제제 '로비큐아(성분명 롤라티닙)'를 무려 식약처 시판허가 5년 전인 2016년부터 제공해왔다.

현재까지 식약처로부터 승인 받은 로비큐아의 치료목적사용승인 건수만 해도 560여 건에 달한다.

로비큐아는 ALK 양성 비소세포폐암 치료에 사용되는 표적항암제다. 국내에서는 작년 7월 시판허가를 받았고, 올해 9월부터 타 ALK 억제제 투여 후 질병이 진행된 환자에서 2차 이상 치료에 급여 적용되고 있다.

ALK 변이는 전체 폐암 환자의 약 5%에서만 발견되는 희귀 유전자 변이다. 환자수가 많지 않아 대규모의 3상 임상시험 진행이 어려울 뿐더러 결과를 내기까지 오랜 기간이 소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질환의 중대성과 환자의 치료 접근성을 고려해 2상 임상시험 데이터만으로 로비큐아를 허가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는 조건부허가제도가 없어 로비큐아의 허가가 차일피일 미뤄질 수밖에 없었던 것.

기존 ALK 억제제로 치료 받고 내성이 발생한 ALK 양성 비소세포폐암 환자에서 사용할 수 있는 표적치료 옵션은 현재까지도 로비큐아가 유일하다. 로비큐아를 쓸 수 없다면 환자들은 견디기 힘든 항암화학요법을 받아야만 한다. 때문에 화이자가 동정적 사용 제도를 통해 국내 환자들에게 로비큐아를 제공해 온 것이다.

로비큐아의 동정적 사용은 현재 진행형이다. 허가사항이 아닌 ROS1 양성 비소세포폐암 환자에서도 로비큐아는 '마지막 보루' 격인 치료제이기 때문. ROS1 변이는 ALK 변이보다 더 희귀한 유전자 변이에 속한다. 전체 폐암 환자의 1~2%에서만 보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임상시험용의약품의 동정적 사용은 어떻게 이뤄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환자의 주치의가 직접 식약처에 치료목적 사용승인을 신청하는 경우와 제약업체가 다수의 환자 사용을 위한 사용계획서를 마련해 식약처에 사용승인을 신청하는 경우이다.

두 가지 모두 식약처장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후자는 치료가 이뤄지는 기관의 임상시험심사위원회(IRB) 승인까지 받아야 한다.

주치의가 직접 치료목적 사용승인을 신청하는 경우도 제약은 존재한다. 해당 질환 분야에 대한 주치의의 전문의 자격은 물론이고 서류 작업이나 환자 안전성 모니터링 등 보조 인력이 필요 해 일부 대형병원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급여 전이라면…'Early access program' 고려

국내에서 허가는 받았지만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약을 쓸 수 없는 환자들도 존재한다. 특히, 최근에는 연간 치료비용이 인당 3억원을 훌쩍 넘거나 단 한번 투여에 약 20억원을 지불해야 하는 초고가 치료제도 등장하며, 비급여 약제의 사용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초고가 약제들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면 환자들이 치료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다. 하지만 건보재정에 대한 영향 평가와 함께 국민적 합의를 모을 필요가 있어 초고가 신약의 급여 등재는 통상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이 같은 이유로 제약사들은 급여 전 다양한 방법을 통해 환자 치료를 지원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이오젠이 진행한 '스핀라자(성분명 뉴시너넨)' 환자지원프로그램이다.

스핀라자는 영유아 사망 질환 1위인 척수성 근위축증(Spinal Muscular Atrophy, SMA) 치료에 최초로 개발된 유전자 치료제다. 특히 SMA 1형 환자의 90%는 2세 이전에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조기 진단 및 치료가 절실한 질환이다.

이에 바이오젠 글로벌은 스핀라자가 최초 허가된 2016년부터 유럽 17개국에서 치료가 시급한 영아기 발현 SMA 환자들에게 스핀라자를 무상으로 공급하는 'Early access program(EAP)'을 진행한 바 있다.

바이오젠코리아 역시 2018년 2월부터 본사와의 긴밀한 협의와 식약처 및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의 협조를 통해 국내 SMA 1형 환자를 대상으로 스핀라자 환자지원프로그램(약제비 전액 무상 공급)을 시작했다.

EAP는 원칙적으로 해당 국가에서 의약품이 승인되지 않은 경우에만 진행할 수 있어, 당시 바이오젠코리아는 가능한 모든 옵션에 대한 논의 및 검토를 거쳐야 했다. 국내 SMA 의료전문가 및 정부의 협조 끝에 바이오젠코리아는 예외적으로 식약처 허가 이후 EAP를 진행할 수 있었다.

2017년 12월 스핀라자 국내 허가 이후 2개월 만에 첫 환자 투약이 시작됐으며, 현재까지 약 30명의 국내 환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무상으로 치료를 받았다.

또한, 바이오젠코리아는 2019년 4월 스핀라자 보험급여 등재 시점에 이 프로그램에 등록된 환자 중 급여기준에 적용되지 않는 환자들에게 현재까지도 동일한 프로그램을 지속 운영하고 있다.

스핀라자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환자지원프로그램은 통상 제약사가 제3의 기관을 통해 환자에게 치료비용이나 약제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제3의 기관이 반드시 비영리단체일 필요는 없지만, 대부분(80~90%)의 환자지원프로그램은 한국혈액암협회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이때 제약사는 환자 선정 등에 관여할 수 없다.

환자들은 한국혈액암협회 홈페이지에서 지원 대상이나 방식, 절차, 지원 약제 등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약제별로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가장 먼저 주치의로부터 해당 약제 치료를 결정 받아야 하며, 추천 요건을 확인 받고 구비 서류를 준비해 신청서와 함께 협회로 신청하면 된다. 심사 기간은 약 1~2달이 소요되며, 지원이 결정되면 후원사와의 계약에 의해 정해진 환급 절차에 따라 현금이나 현물 지원을 받게 된다.

다만 일부에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환자지원프로그램을 통합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제약사나 약제별로 지원 내용이 다를 뿐더러 사업 주체도 산재돼 있어 환자들이 정보를 얻기가 어렵고, 지원 대상 선정의 투명성 등을 고려해 정부가 이를 통합해 관리할 수 있는 단일 기관을 정해두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국내 한 암전문가는 "의료 및 정보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앞으로 신약개발 속도는 점차 빨리질 것이고, 제약사별 환자지원프로그램 종류와 수도 증가할 것"이라며 "정부가 현재 산재돼 있는 환자지원사업을 통합해 관리할 주체를 정하고 적절히 감시한다면, 환자들의 정보 접근성도 개선될 것이며 지원 대상 선정의 투명성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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