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화의료 자리 못 잡았는데 조력자살 도입 논의 성급
"제도도 의료계도 조력자살을 다룰 준비 안 돼 있어"

전문가들은 사회가 '존엄사'를 요구하고 있지만 제도도 의료 현장도 이에 대한 준비가 돼있지 않다면서 성급한 추진이라고 비판했다(ⓒ 청년의사).
전문가들은 사회가 '존엄사'를 요구하고 있지만 제도도 의료 현장도 이에 대한 준비가 돼있지 않다면서 성급한 추진이라고 비판했다(ⓒ 청년의사).

일명 '의사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되고 국민 70% 이상이 찬성한다지만 의료계는 이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다. '조력존엄사'가 아니라 의사의 조력 하에 이뤄지는 '자살'이며 한국 의료는 그런 죽음을 다룰 준비가 돼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한국정신종양학회가 '의사조력자살을 이야기할 때 고려해야 할 것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주제로 지난 3일 진행한 제10회 추계학술대회에서 전문가들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 개정안' 발의가 불러온 의사조력자살 논란을 짚었다.

서울아산병원 내과 고윤석 교수는 "호스피스·완화의료 인프라나 의료인에 대한 죽음 교육 수준을 봤을 때 의료계가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준비가 돼있다고 보지 않는다"면서 "의과대학조차 죽음을 교육하지 않는 시점에서 조력자살을 의사에게 맡기는 것은 초등학생에게 복잡한 미적분 문제를 풀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고 비판했다.

충남대병원 내과 문재영 교수 역시 현장은 의사조력자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했다. 환자의 죽음에 일조하는 조력자살이 의료인 정체성까지 흔들 수 있다고도 했다.

문 교수는 "사회적으로는 존엄한 죽음을 요구하는데 현장은 생애말기돌봄조차 제대로 해주기 어려운 환경이다. 우리 의료현장은 환자의 죽음에 대한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 교수는 "의사 70%가 환자가 사망할 때마다 힘들어하고 간호사들은 번아웃에 빠진다. 의사조력자살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의료인은 정체성과 전문직업성에 대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제도부터 갖춰야 한다"고 했다.

의사조력자살 도입이 완화의료 인프라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박혜윤 교수는 "지금도 연명의료를 말기환자에만 적용하는 상황에서 환자의 고통을 다루기 위해 자살을 정당화하고 의료시스템에서 이를 제공하자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의사조력자살이 도입되면) 현실적으로 현재 말기 돌봄 서비스 자원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말기 돌봄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제도 도입에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면 완화의료 인프라가 흔들릴 위험이 크다"고 했다.

'의사조력존엄사'라는 용어도 지적됐다. '존엄사'라는 표현으로 의사의 조력으로 이뤄지는 '자살'이라는 행위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의사조력존엄사'를 바란다는 여론도 이런 표현 오류로 빚어진 현상이라는 지적이다.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김대균 교수는 "국민 70~80%가 '의사조력존엄사'에 찬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화스피스완화의료학회가 용어를 존엄사에서 '의사조력자살'로 정확히 하고 다시 물었을 때 합법화해야 한다는 의견은 13% 수준에 불과하다. 또 생애 말기를 존엄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의사조력자살을 우선순위에 둔 국민은 15%밖에 안 됐다"고 지적했다.

고윤석 교수 역시 "'자살'이라는 표현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조력존엄사'라는 이상한 표현이 나왔다"면서 불명확한 표현이 개념의 혼동까지 가져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락사는 생명을 단축하는 개념이다. 반면 연명의료 중단은 의료행위 중단이지 안락사 개념이 아니다. '조력존엄사'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도 의료행위로서도 전혀 다른 개념"이라면서 "이를 연명의료결정법 보완 형식으로 다뤄선 안된다.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논의와 제도적 고찰을 거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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