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 신문 청년의사] - 박종두 (38, 광명성애병원 산부인과 과장) -

“힘, 힘 줘, 더 세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옳지, 옳지. 머리가 보이네. 자, 최선을 다 해야지.”

처제(妻弟)가 분만대 위에서 산고를 겪고 있었다. 벌써 8시간이 넘게 산통을 겪으면서 처제는 이미 탈진해 있었다. 인간이 겪어낼 수 있는 극한의 고통들 중에서 출산의 아픔을 그 첫째로 치지 않던가. 게다가 처제의 골반은 좁았다. 자궁경부가 완전히 열린 뒤에도 아기 머리의 하강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었다. 자궁 수축제를 써야했다. 그런데 수축제가 들어가자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얼굴이 방울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되었고, 입술을 깨물면서도 처제는 그러나, 의연했다. 간간이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긴 했지만….

‘이렇게 고생만 다하고 수술이라도 하게되면….’

별의 별 생각들이 들었다. 혹시 기형아라도 태어나면 어떻게 하지? 아기가 잘못돼서 뇌성마비가 된다거나, 처제가 분만 손상을 입게 되면 어쩌지…. 방정맞은 생각들이 주책없이 떠올랐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직업적 자존심도 상처를 입겠지만, 그 이전에 사위로서, 형부로서, 또 남편으로서 처갓집 식구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형부가 가장 솜씨가 좋은 산과 의사라고 굳게 믿고 있는 처제에게 가장 미안한 일이었다.

다른 산부인과 의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자연분만이다. 자연분만은 언제 진통이 걸릴지 모른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그래서 산모가 분만 예정일이 가까워오면 항상 준비상태로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 또 진통을 겪는 시간이 산모들마다 일정하지 않아서 몇 시간, 혹은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이전까지 아무 문제도 없던 아기가 태아 곤란증에 빠져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처제가 우리 병원에서 출산을 하겠다고 나설 때부터 말렸어야 했어.’

사실이 그랬다. 대개의 의사들은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분만이나 수술에 참여하길 꺼려한다. 잘 되어야 본전이라는 얄팍한 세상 물정 때문도 있겠지만 사실은 부담감 때문이다. 냉철한 판단과 신속한 처치를 해야할 순간에 어떤 인간적인 감정에 휩싸이다 보면 자칫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었다.

종합병원의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던 처제는 서른이 넘도록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인, 장모의 한숨 섞인 걱정에는 빙그레 웃기만 했고, 줄줄이 셋씩이나 되는 언니들의 짜증 어린 성화에도 묵묵히 자기 일만 했다. 결국 차례가 바뀌어 막내 처제가 먼저 시집을 가게 되고 나서도 처제는 결혼에 대해서는 도통한 사람 같았다. 소가 닭쳐다보는 듯한 무관심, 그 자체였다. 계절이 바뀌어 서로의 안부가 궁금해질 때면 캐나다로 이민을 가겠다는 둥, 아프리카의 오지로 선교 여행을 떠나겠다는 둥 생각지도 못한 말들로 사람들의 관심을 일거에 집중시키는 비상한 재주를 발휘하며 처제는 그렇게 나이만 먹어 가나 싶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처제가 결혼을 선언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이 나이에 이렇게 가슴 떨리는 사랑을 하게 될지 몰랐다고, 지금의 동서를 소개시켰다. 그런데 동서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당시의 동서는 처제의 배필감이 아니었다. 나이도 2살이나 어렸고, 직업이 꽤 유명한 선교단체의 선교사라는데 수입이라고 해봐야 간호사로서 경력이 10년 가까이 되었던 처제의 5분의 1도 되지 못했다. 어떻게 살림을 꾸려가겠냐는 질문에 처제가 돈을 벌어오고 자신은 선교사업을 계속하겠다고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바람에 동서는 ‘도둑놈 심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남자보는 눈이 그토록 고상하고 지고했다는 처제의 눈에 돼지비계처럼 두꺼운 콩 꺼풀이 어떻게 덮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제의 결혼은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과장님, 아무래도 수술실에 연락을 해놓아야겠는데요.”

출산을 도와주던 레지던트 김 선생이었다. 김 선생이 제대로 판단을 하고 있었다. 분만의 진행이 너무 느렸기 때문에 만약의 응급상황이 생기면 한시라도 빨리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처제, 이제 마지막이야, 이번에도 아기가 나오지 않으면 그땐 수술할 수밖에 없어.”

일단 그렇게 말을 하자 나는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떤 비장감에 어깨가 무거웠다. 그때도 그랬다. 내가 장인의 부탁으로 처갓집으로 내려갔을 때 처제는 외롭고, 또 비장한 모습이었다.

처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

“사랑이란 사람의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자신도 자기가 하려는 결혼이 평범하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단다. 그러나 자기는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그러므로 지금 겪고 있는 조그만 난관들이 결국은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처제는 자수정처럼 영롱히 빛나는 눈물을 보였다. 그때 나는 처제에게 감동했다, 아니 그 반짝이는 사랑에 감복하고 말았다. 결국 결혼을 뜯어말리려던 나는 그만 결혼을 동조하고 지원해주는 입장이 되었다.

“김 선생, 안되겠네. 조금 눌러줘야겠어.”

산모가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해서 아기가 산도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되면 산모의 복부를 눌러서 출산의 추진력을 얻기도 한다. 그러다가 자궁파열이나 태반 박리 등의 무서운 합병증이 생길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김 선생이 처제의 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이쯤이 되면 그야말로 힘으로 눌러서 출산을 하던가, 아니면 수술실로 들어가 제왕절개를 하던가 양자택일만이 남은 것이다.

나는 일단 무영등의 불을 껐다. 아기가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가뜩이나 놀란 아이의 눈에 무영등의 강력한 불빛이 좋을 리 없다. 그래서 나는 아기의 머리가 만출 되는 순간, 모든 조명을 없애버린다. 그것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러나 처제의 경우에는 조금 다를 것이었다. 아기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사실은 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배를 눌러야만 하는 상황이 보기 싫었다.

처제는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아파하기만 한다. 누르는 사람의 거친 숨소리와 눌리는 사람의 힘겨운 신음만이 분만실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나는 기도라도 하는 심정이었다. 처제, 눌러주는 사람과 호흡을 같이 맞추어야해. 조금만 힘내. 힘내라고.

나의 기도는 그러나, 분절된 음성이나 의미를 갖춘 생각으로 채 만들어지지 못하고 그저 한숨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무엇을 원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가 산도를 통해 밀려나왔다. 아, 하나님…. 저 가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눈시울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머리, 눈, 입이 나왔다. 어깨가, 배가, 다리가 나오면서 그 동안의 불안과 흥분이 빠져나왔다. 아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 세상을 향해, 처제가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라던 아기가 탄생했다. 3.4킬로의 건강한 아기가 세상에서의 첫 호흡을 시작했다. 그리고 힘차게 울기 시작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서 입을 팔자로 벌리고 우는 모습이 처제를 빼어 닮았다. 우리네 삶의 감추어진 비밀하나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나는 동서에게 탯줄을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동서는 떨리는 손길로 탯줄을 잘라줌으로써 아기를 이 세상에 던져 놓는다. 그리고 역시 선교사답게 산모와 아기의 머리맡에서 기도를 시작한다. 동서의 기도는 자못 엄숙하다.

나는 처제의 품으로 아기를 옮기고 아기를 위해 좋은 말을 해주라고 부탁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녀 상봉을 하게 되었는데 무언가 의미 있는 말을 해주라고. 산부인과 의사로서 나는 분만을 할 때마다 항상 그런 말을 하곤 한다. 산모들은, 혹은 아빠들은 그 동안 준비한 말들을 감격에 겨워 말하곤 한다. 행복하거라, 베풀면서 살아라, 인생의 멋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거라…. 그들의 말은 어쩌면 그렇게도 예쁘고 멋있는지. 그들의 말속에서 나는 감동을 받곤 한다. 그러나 처제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기도도 할 수 없는 듯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보기만 한다, 회한과 감동이 교차하는 만감 어린 눈빛으로.

반대하는 결혼을 하기 위해 속상했던 일, 임신 초기의 그 혹독했던 입덧하며, 태아의 발길질에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오다가도 어느새 다정스런 다독거림으로 느껴지던 태동, 무엇보다 사랑을 키워 가는 뿌듯한 성취감으로 지내왔던 지난날들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리라. 아기에게는 인생의 첫 페이지인데 기억에 남을 덕담을 해 달라고, 나는 다시 한번 재촉한다. 그제 서야 처제는 쉬어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한다.

“아가, 건강해야돼. 아가, …사랑해.”

처제의 말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에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출산이라는 아름다운 고통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내가 산부인과 의사로서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힘이다. 사랑해…. 처제는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옛날에 보았던 자수정처럼 빛나던 바로 그 눈물방울이다.■

[당선소감] 가장 하고 싶고, 가장 하기 어려운 말


수필을 처음 써보았습니다. 입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 당황했습니다. 굳이 입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랬고, 처제에게 말하지 않고 쓴 수필인지라 미안함이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랴부랴 처제에게 전화해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처제는 생각보다 화내지 않았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분만을 도울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인간과 생명의 위대함입니다. 단말마의 비명으로 출산을 마친 산모가 흘리는 땀과 눈물, 그리고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이겨내고 그 꼬물거리는(!) 아기가 産道를 통과하는 모습은 나에게 敬畏를 가르칩니다. 내가 산부인과를 평생의 업으로 선택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게 醫業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만 매너리즘으로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처제의 출산은 내가 분만에 임하는 자세를 다시금 일깨워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정리한다는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상으로 다시금 나를 격려해주니 청년의사와 한미약품에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당선소감을 쓰라는 말에 나는 입선소식보다도 더욱 당황했습니다. 저간의 사정이 그러한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일간지의 신춘문예의 당선소감을 몇 개 읽어보았습니다.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당선소감과 일개 의사의 당선소감이 어찌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당선소감이라는 것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어색하거나 쑥스러워서 잘 하지 못하던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더란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그런 유치한 말을 하려고 하니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는 너무 비웃지 말아주시길….

우선 나에게 진료를 받고 있는 환자와 산모들에게 고마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 내가 몸담고 있는 광명 성애병원의 김윤광 이사장님을 비롯한 병원 분들에게도. 종남, 종익, 정식, 동철이와 ‘우리는’의 일곱 친구들, 그리고 노래 동아리 ‘높낮이 없는 세상을 위하여’와 편집반 ‘무영등’의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전합니다.

그러나 가장 하고 싶고, 또 가장 하기 어려운 말, 그래서 이런 자리를 통해서 밖에 하지 못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이 아픈 시부모님을 모시면서도 준수, 승수, 혜수 세 아이를 너무 예쁘게 키워주는 아내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혜경아,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박종두(38, 광명성애병원 산부인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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