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의 모노태스킹

가이도 다케루는 일본의 의사이자 소설가다. 메디컬 엔터테인먼트라는 장르의 개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책은 일본에서만 850만권이 넘게 팔렸다. 그의 책들에 등장하는 주인공 다구치는 어느 대학병원에서 ‘부정수소외래’를 담당하고 있다.

부정수소(不定愁訴)란 ‘경미하지만 끈덕지게 환자에게 달라붙어 검사를 해도 기질적인 원인이 발견되지 않는 사소한 증세 전반’을 말한다. 이 용어 자체는 원래 있는 것이지만, 이런 증상을 전담하는 ‘부정수소외래’라는 것은 소설 속에만 존재한다.


다구치의 역할은 여러 과를 전전했지만 해결되지 않는 증상 때문에 괴롭고 답답한 환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별명이 ‘하소연외래’다. 처방은 ‘흘려듣기’와 ‘내버려두기’에 불과하지만, 환자들의 만족도는 높다. 물론 병원 매출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부정수소외래는 소설 속의 이야기지만, 여러 과를 전전하는 환자들은 현실에 아주 많다. 그들의 증상이 반드시 경미한 것도 아니다. 병명이 명확하지 않지만 환자는 아주 괴로운 경우도 있고, 진단명이 너무 여러 개가 붙어 한 명의 의사가 전담하기 어려운 경우는 더 많고, 어느 과에서 진료해도 되지만 환자의 까다로운 ‘캐릭터’ 등 복잡한 속사정으로 소위 ‘폭탄 돌리기’가 벌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올해 한미수필문학상에서 대상을 받은 강북삼성병원 피부과 김원석 교수의 작품 ‘악수’에는 이런 고백이 있다. “작은 사마귀 하나도 치료가 힘든데, 손바닥 전체를 다 점령한 사마귀에 대한 치료는 막막했고 내 첫 번째 선택은 회피였다. 손바닥을 다 도려내거나 딴 살을 떼서 이식을 하는 게 가능할 리 없었지만 난 그를 정형외과로 보내버렸다. 폭탄 돌리기일 뿐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땐 그냥 피하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환자가 그러다 지쳐 딴 병원으로 가버렸으면 했다.”

이 글이 대상을 수상한 첫째 이유는 글 자체의 훌륭함이겠지만, 폭탄 돌리기가 점점 흔해지는 세상에서 그 폭탄을 기꺼이 떠안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심사위원들이 감복한 것이 둘째 이유일 듯하다.

“우리 과 문제는 아닙니다.” 의사들이 점점 더 자주 사용하는 말이지 싶다. 의학이 극단적으로 세분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령화로 여러 가지 질병을 함께 갖고 있는 환자들이 늘어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3분에 불과한 진료시간으로 인해 더 자세히 환자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때로는 ‘실적 압박’이 그 원인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말을 듣는 환자들의 답답한 마음을 헤아린다면, 이 말을 하기 전에 조금은 더 신중했으면 좋겠다.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어디에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도 잘 알려주면 좋겠다.

좀 다른 경우로, 암환자 진료 등에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의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내는 바람에 혼란이 생기기도 한다. 의료진 사이에 의견 조율이 되지 않으면 ‘환자의 자율성 존중’이라는 명분으로 환자에게 선택권을 넘기기도 하지만, 아무리 많은 정보를 주더라도 환자가 자신에게 최선이 되는 결정을 스스로 내리기는 쉽지 않다.

미국에서는 이런 문제를 WICOS(Who Is the Captain Of the Ship: 이 배의 선장은 누구인가?) 문제라고 하는 모양이다. 화제의 책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저자 폴 칼라니티도 자신이 환자로 겪은 이 상황을 서술해 놓았다. 그는 자신이 의사였기에 본인이 책임감도 느꼈고 최종 선택도 본인이 했지만, 보통의 환자들에게는 ‘선장’이 되어 줄 현명하고 사려 깊은 의사가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들이 그런 숙고와 배려의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의사들에게 책임감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1년에 한 번이라도, 혹은 전체 치료 과정 중에 한 번이라도, 특히 복잡한 몇몇 질병에 한해서라도, 의사가 환자에게 30분쯤을 할애해서 환자의 기구한 사연도 들어주고 어려운 의학적 사실들도 쉽게 풀어 설명해 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해 보면 어떨까. 그 30분에 가령 30만원을 지불한다고 해도 낭비는 아닐 것이다. 그런 ‘대화’의 부족으로 인해 시행되는 불필요한 검사 비용이 그보다 결코 적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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