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쿠바



본지는 앞으로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번 여행지는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에 이은 우리나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라틴아메리카로,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여행 14일째이다. 9시에 숙소를 나서면서 보니 우리가 묵은 5번가 호텔에서 바다가 그리 멀지 않다. 오늘과 내일 우리 일행을 안내할 현지가이드는 파트리시아씨다. 무궁화라는 우리 이름도 가지고 있는 파트리시아씨는 1986년부터 6년간 쿠바대사관에서 근무한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서 살았는데, 김일성대학에서 2년을 공부하면서 우리말을 익혔다고 한다.

국회의사당이 첫 번째 일정이다. 숙소를 나선 버스가 말레콘거리를 지난다. 대서양을 향한 해안을 따라 만든 방파제 아래로 낸 도로인데, 허리케인이 오면 바닷물이 넘쳐 사라지기도 한다. 도로변 건물의 1층까지 바닷물에 잠기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기아차나 현대차도 흔히 만날 수 있다. 쿠바사람들이 한국 상품을 좋아해서 한국과의 교역이 늘기를 희망한다는데, 파트리시아씨의 경우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꿈이다.

옛 국회의사당건물(좌) 중앙홀의 공화국 동상(우; Wikipedia에서 인용함)


옛 국회의사당(El Capitolio) 가는 길에 프라도거리를 지난다. 프라도거리에는 스페인풍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식민지시절 지은 것들이라고 한다. 681 x 300피트 면적의 옛 국회의사당 건물은 마차도가 집권하던 1926년 건설을 시작하여 1929년에 완공되었고, 1959년 쿠바혁명이 일어나기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혁명 후에는 과학기술환경부가 사용하였고, 현재 진행 중인 보수공사가 끝나는 대로 다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공부한 건축가 에우제니오 라이네리 피에드라(Eugenio Rayneri Piedra)가 네오클래식과 아르누보 건축양식으로 설계하였고, 지붕은 중세 르네상스 풍으로 돔형태의 큐폴라를 얹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팡테온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한눈에 보아도 미국 국회의사당 건물을 닮았다. 92m 높이의 큐폴라는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돔양식 건물이었고, 아바나에서는 호세 마르티 기념탑이 완공될 때까지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일정때문에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입구에 두 개의 동상이 서있는데, 왼쪽은 일(Work) 오른쪽은 수호(The Tutelary Virtue)를 상징한다. 중앙에 12개의 로마양식의 열주가 두 줄로 서 있다. 중앙홀의 돔 아래로 웅장한 공화국 동상(Statue of the Republic ; La Estatua de la Repblica)이 서 있다. 49톤의 무게에 금을 입힌 청동부조는 로마에서 제작하여 가져온 것으로 그리스의 지혜의 여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중앙홀의 중심에는 25캐럿의 모조금강석을 묻었는데, 이는 쿠바의 도로원표(道路元標)를 나타낸다.(1)

구시가지에서도 올드카들이 늘어서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최근 미국의 경제제제가 풀리면서 돈이 도는 때문인지 곳곳에서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국회의사당도 돔부분을 보수하고 있는 중이다. 이른 아침에 하바나 구시가지를 돌아 본 느낌은 어제 공항에서 숙소에 들기까지의 인상,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과는 천양지차였다. 좁고 지저분하며 거리곳곳에 소변을 누었는지 지린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를 안내하는 파트리시아씨가 일하는 관광안내회사도 국가에 속하는 것처럼 쿠바의 대부분의 기관이 국가관리 아래 있고 국가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월급이 작아 불만사항이 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 개인자격으로 일할 수 있기도 한데 이 경우는 소득에 대한 고율의 세금을 내야 한다.

핑카 비히야 뒤편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 숲 너머 멀리 아바나시가 보인다.


국회의사당을 떠난 일행은 헤밍웨이 박물관, 핑카 비히야(Finca Viga)로 향한다.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는 핑카 비히야는 ‘전망대 농장’이라는 뜻이다. 1886년 카날로니아 건축가 미구엘 파스쿠알 바구에르(Miguel Pascual y Bague)가 지은 이 집의 뒷편 베란다와 3층 부속건물에서 바라보는 아바나 도심의 정경은 기가 막히다. 헤밍웨이는 1939년 중반 이 집을 빌었는데, 마음에 들었던지 1940년 12월 세번째 아내 마사 겔혼(Martha Gellhorn)과 결혼한 후 이 집을 샀다. 당시 핑카는 15 에이커(61,0002) 넓이의 농장이 딸린 집이었다. 하지만 겔혼이 시골에 있는 이 집에 머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바나의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 머물기도 했다. 키웨스트에서 숫공작을 키웠던 헤밍웨이는 핑카에서는 고양이를 길렀는데, 한때 11마리에 달하기도 했다.

헤밍웨이 기념관 핑카 비히야, 본관(좌) 3층의 부속건물(우)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대부분과 『노인과 바다』를 썼다. 1945년 겔혼과 이혼한 뒤에도 마지막 부인 마리 웰시 헤밍웨이와 핑카에 머물렀다. 1959년 1월 쿠바혁명이 일어난 뒤에도 헤밍웨이와 혁명세력과의 관계는 좋았다. 하지만 1960년 가을 쿠바와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미군이 피그만을 침공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헤밍웨이 개인적으로는 우울증이 심해져 쿠바로 돌아가지 않았다.(2)

헤밍웨이 기념관 내부 정경(위) 3층 집필실 내부(아래좌)와 헤밍웨이가 쓰던 타자기(아래우)


버스가 아바나 시내를 벗어나면서 울창한 숲 사이로 다소 낡아 보이는 집들이 들어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올라가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핑카 비히야가 서 있다. 집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집을 돌아가면서 창문을 통하여 각각의 방을 살펴 볼 수 있었다. 거실은 물론 침실 식당등 대부분의 방에는 책장이 있고 많은 책들이 꽂혀 있다. 그리고 벽에는 박제된 야생동물의 머리가 걸려있는데 아마도 헤밍웨이의 사냥취미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리라. 뒤꼍으로 돌아가면 작은 3층 건물이 있다. 맨 꼭대기층에서 집필을 한 듯 구형 타자기가 있고 한 쪽에 천문망원경도 있다. 역시 실내로 들어갈 수는 없었는데, 앞에 선 사람처럼 관리하는 직원에게 부탁해서 헤밍웨이의 타자기를 찍을 수 있었다.

수영장 끝에 있는 개 무덤과 헤밍웨이의 배, 필라


언덕을 조금 내려가면 수영장이 있다. 수영장 끝에는 그가 아끼던 네 마리의 개를 묻은 무덤이 있고, 그 뒤로 헤밍웨이의 배 필라(Pila)가 정박하고 있다. 수영장 주변에는 쉴 수 있는 작은 건물들이 두엇 있다.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열기도 했는데, 게리 쿠퍼, 잉그리드 버그먼, 에바 가드너 등 유명 배우들도 자주 들렀다고 한다. 헤밍웨이 박물관 곳곳에는 시설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부드럽고 친절했으며 심지어는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사진을 찍어주고는 작은 선물을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러 생각해서 달러화를 주었지만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약간의 쿠바페소동전을 주었더니 매우 감사하며 받았다. 쿠바는 이미 사회주의의 원형이 무너지기 시작한 느낌이다. 년전에 갔던 베트남사람들의 경직된 모습과 비교했을 때 같은 사회주의국가이면서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

코히마르의 평화로운 풍경(좌) 헤밍웨이 기념탑(우)


핑카 비히야를 떠난 일행은 코히마르(Cojimar)로 향했다. 헤밍웨이가 필라를 몰고 함께 낚시를 하던 친구 그레고리오 푸엔테스(Gregorio Fuentes)가 살던 마을이다. 헤밍웨이보다 두 살 많은 푸엔테스는 『노인과 바다』의 모델이기도 하다. 헤밍웨이와 푸엔테스는 죽을 때까지 같이 낚시를 하지만 누구 한 사람이 죽으면 남은 사람은 낚시를 그만 두기로 약속했다. 푸엔테스는 헤밍웨이가 죽은 뒤 약속대로 낚시를 접고 살다가 2002년 105세를 일기로 숨졌다.

푸엔테스가 헤밍웨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40대 무렵이니, ‘노인은 야위고 목덜미에 깊은 주름살이 잡힌 말라빠진 사람이었다. 뺨에는 열대의 햇살에 그을린 검버섯 같은 반점이 있었다.’라는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 선장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천생 바닷사람인 푸엔테스는 밤새 상어떼와 혈투를 벌이던 산티아고가 “인간은 파괴될 수 있으나 패배하지는 않는다”라고 외치는 대목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평생을 바다와 함께 살았지만 84일 동안 출어하여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산티아고 노인은 ‘이제는 한물갔다’라는 취급을 받는 것이 죽는 것만큼 괴로운 것이었으리라. 그동안 도와주던 어린 마놀린 더러 다른 배를 타라고 했지만, 막상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그가 없어 아쉽다. 혹자는 항구에 돌아온 산티아고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앙상한 뼈만 남은 청새치와 망가진 어구 그리고 상어와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뿐이라고 안타까워하지만, 산티아고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과시한 것으로 충분했다.

1952년 발표한 『노인과 바다』로 헤밍웨이는 1953년에 퓰리처상을,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헤밍웨이의 쿠바 사랑은 이때도 돋보였는데, 그는 노벨상으로 받은 상금을 아바나의 성당에 모두 기부했다.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소유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주었을 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3) 코히마루 마을의 바닷가 요새 앞에는 헤밍웨이 기념탑이 있다. 문득 생각이 나면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 낚시를 즐긴 헤밍웨이는 그야말로 자유인이었던 것 같다.


참고자료

(1) Wikipedia. El Capitolio.

(2) Wikipedia. Finca Viga

(3) Korea Joongang Daily. 2002년 1월 24일자 기사. And he was old and tough.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