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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카스트로식 혁명이 남긴 것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쿠바 아바나
  • 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 승인 2017.01.0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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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앞으로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번 여행지는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에 이은 우리나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라틴아메리카로,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얼굴을 새긴 통신부건물(좌) 체 게바라의 얼굴을 새긴 내무부 건물(우)


혁명광장 주변에는 국립도서관을 비롯한 정부청사들이 흩어져 있다. 호세마르티 기념관 맞은편 건물에서 쿠바의 두 영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내무부 건물은 체 게바라(Che Guevara)의 모습을, 그 옆에 있는 통신부건물에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의 모습을 새겼다. 체 게바라의 얼굴에는 “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까지, 줄곧)”이라는 인용구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얼굴에는 "Vas bien, Fidel" (잘했어, 피델)이라는 인용구가 새겨져 있다. 필자처럼 시엔푸에고스의 얼굴을 카스트로로 오인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쿠바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은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이다. 물론 카스트로가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동상은 물론 어디에도 자신의 모습을 내걸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로 카스트로는 신비한 인물로 남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체 게바라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쿠바혁명의 전모도 파악할 수 있다. 체 게바라(Che Guevara)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이자 공산주의 혁명가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 졸업을 앞두고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를 여행하면서 민중들의 열악한 삶에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그가 남긴 체 게바라의 『라틴여행 일기』를 보면 그런 계기가 분명치 않아 보인다.)

과테말라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과테말라로 망명중이던 페루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를 만나 결혼한 것이 아마도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아닐까 싶다. 당시 미국 CIA가 뒤를 봐준 가스티요 아르마스에 의하여 민주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 정통 혁명정권이 붕괴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력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지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테말라에 새로 들어선 아르마스정권의 위협을 피해 멕시코로 망명했을 때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으로 조우하면서 혁명가로서의 그의 삶이 결정되었다.

체는 바티스타정권 타도의 기치를 든 카스트로가 이끄는 반군에 가담하여 1956년 11월 25일 82명의 대원과 함께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 동부해안의 라스콜로라다스에 상륙하였다. 그런데 카스트로가 상륙계획을 미리 발표하는 바람에 잠복해있던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겨우 12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숨어들어 반정부세력을 규합해나갔다. 초반에는 농민들의 밀고 등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농민들의 질병을 돌봐주면서 민심을 얻고, 손해를 보면서도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은 까닭에 조금씩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반군활동 초반 체는 군의관 역할을 맡았지만 이내 전투에도 참여하여 지도자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2년여의 투쟁 끝에 1959년 1월 8일 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혁명이 완성되었다. 혁명정부는 체에게 쿠바 시민권을 부여하였을 뿐 아니라 국립은행 총재, 재무부장관 등 혁명정부의 요직에 임명하였다.(1)

체는 쿠바의 자립을 위하여 세계 각국을 순방하는 등 외교적인 노력도 하였지만, 끝내는 자신이 꿈꾸어 왔던 혁명의 확산에 나섰다. 독재타도를 위하여 쿠바의 지원군을 이끌고 콩고내전에도 참가하였고, 볼리비아의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병력을 직접 이끌고 참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쿠바 혁명 때와는 제반 사정이 달랐던 탓에 결국은 볼리비아의 어느 산속에서 정부군에 사로잡혀 총살형을 당하였다. 그는 혁명을 통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기보다는 혁명 그 자체를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사후에도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이 일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그의 진면목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다.

통신부건물에 얼굴을 새긴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라스콜로라다스 해안에서 살아남은 12명의 전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58년 12월 30일 야과하이에서 벌어진 전투는 쿠바혁명의 결정적 고비였다. 시엔푸에고스는 이 전투에서 정부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서 야과하이의 영웅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쿠바혁명군의 핵심 인물이었다. 혁명 후에도 쿠바군의 장군으로 복무하였는데, 혁명에 성공한 아홉 달 뒤 비행기 사고로 실종되었다. 1959년 1월 8일 카스트로가 아바나 시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는 도중 말을 끊고, 옆에 있던 시엔푸에고스에서 ‘카밀로, 나 지금 잘하고 있는거지?(Voy bien, Camilo?)’라고 물었을 때, ‘잘하고 있어, 피델(Vas bien, Fidel)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시엔푸에고스의 답변은 뒤에 혁명의 구호가 되었다고 한다.(2) 통신부 건물 벽에 새긴 시엔푸에고스의 모습에 인용된 구절이다. 시엔푸에고스는 카스트로나 체와 같이 정치적으로 세련되지는 않았으며 특별히 교조적이지도 않았다. 혁명 뒤에 카스트로의 혁명평의회가 보인 교조적 행태에 유감을 보이며 공직에서 사퇴할 뜻을 표하기도 했다.


혁명광장 주차장에 늘어선 올드 카들


혁명광장 주차장에는 20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올드 카들이 몰려 있어 눈길을 끈다. 아마도 관광객들을 태우기 위하여 기다리는 듯하다. 쿠바가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다 보니 신종 차를 도입할 사정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올드 카들을 손질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차들은 겉만 옛날 모습이고 부품은 모두 처음 것들이 아니라 새로 제작한 것들이다. 어떻거나 올드 카에 향수를 느끼는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아 오늘날 관광자원이 되고 있으니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다.


쿠바국립호텔의 오래된 엘리베이터(좌), 바다로 열려 있는 정원(중), 칵테일바에 걸려있는 전화기(우)


혁명광장을 떠난 일행은 아바나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말레콘(방파제)거리에 있는 쿠바국립호텔로 향한다. 묵기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니고, 다만 유서 깊은 호텔이라는 이유로 관광일정에 넣은 모양이다. 골동품 수준의 엘리베이터는 물론, 호텔 곳곳에 놓인 오래된 기물들이 눈길을 끈다.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후원은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칵테일코너에서 모히토(mojito)를 한 잔씩 들었다. 그런데 일행 중에 ‘모히토에 가서 몰디브를 한 잔 해야 된다’는 영화 『내부자들』의 유명한 대사를 이해하는 분이 없어 놀랐다.


모히토를 준비하는 바텐더(좌) 반기문총장님과 함께 하신 강승규님 내외(우; 강승규님 제공)


마이애미의 리틀 아바나에서 잠깐 이야기가 나왔던 칵테일, 모히토는 쿠바의 전통 음료로 ‘마법의 부적’이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모호(Mojo)에서 유래했다. 모히토는 럼 피즈에 민트를 첨가하는 것인데, 청량한 느낌의 민트향 때문에 산뜻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만드는 방법은 라임즙, 쥬스를 넣은 글라스에 설탕과 민트 잎을 넣고 찧는다. 여기에 잘게 부순 얼음과 럼을 넣어 잘 섞고 탄산수로 채운다. 주문한 사람에 따라서는 라임 조각 혹은 민트 잎이나 줄기 등을 곁들인다. 헤밍웨이는 생전에 모이토와 다이키리 두 종류의 칵테일을 사랑했는데, "나의 모히토는 라 보데기타에서, 나의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다타에서."(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3)

칵테일바의 벽에는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 등 유명 인사들의 초상을 모아놓았다. 이 호텔을 자주 이용했던 사람들인가 보다. 필자도 아는 이름과 얼굴들이 적지 않아서 반갑기도 하고 공연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런데 일행가운데 누군가 ‘여기 사진이 걸려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상사람 아니네’라고 말하는 바람에 갑자기 멍해졌다. 요즘 잘나가는 드라마에서 불멸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불멸하는 존재는 없음을 일찍 깨달았다.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탐욕적으로 삶에 집착하다가 끝내 세상을 떠난 자들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것’이라고 했다.(4) 물론 살아있는 사람도 있다. 칵테일바의 벽에서 우리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의 관심이 쿠바에까지 두루 나누어지고 있었구나.


반얀트리공원


쿠바국립호텔에서 나와으로 이동한다. 마이애미 식물원에서는 반얀트리 한 그루 있는 것으로 엄청 주름잡았는데 이 공원에서는 적어도 10그루 이상이 자생하고 있다. 밀림에서 타잔이 매달려 이동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나무인지라 필자도 타잔의 흉내를 내보려 했지만 근력이 달려 사진을 찍는 순간을 버티는 것도 어렵다. 나이 생각도 해야겠지?


모로요새 정문(좌) 포격식을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우)


가정식 레스토랑 라카사에서 가자미를 튀긴 것으로 저녁식사를 들었는데 좋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삼인조 가수들이 와서 옛날 노래들을 불러주었다. 베사메무초, 라밤바, 따나메라, 엘콘도파사, 라팔로마, 등 대부분 아는 노래들로 흥을 돋구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바나만 입구에 있는 모로요새에서 진행하는 포사격행사를 보았다. 모로요새는 스페인식민시절 외적이나 해적의 침입으로부터 하바나시를 지키기 위하여 건설된 것이다. 행사가 열리는 요새의 성벽 위에 이르는 길에는 기념품을 파는 풍물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포격은 9시에 단 한 발을 발사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도 해방 전후에는 시계를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정오에 포를 쏘았다 그래서 오포라고 했다. 그런데 모로요새의 포격은 통금을 알리던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인정과 바라를 울리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모로요새에서 포를 터뜨리면 아바나성곽의 문을 닫고 아바나항으로 들어오는 뱃길에도 쇠사슬을 드리워 배가 드나들지 못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모루요새의 포격행사는 군이나 관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이 주관한다고 한다. 아마도 관광객을 위한 행사가 아닐까? 군기라고는 전혀 들어 보이지 않는 것이 이해된다. 하지만 포사격은 나름대로의 격식이 있다. 의장대가 인도하는 포수들이 도착해서 포신을 닦고 포 일발 장전 후 바다를 향해 발사하는 것으로 행사가 종료되었다.


참고자료

(1) 위키 백과. 체 게바라.

(2) Wikipedia. Camilo Cienfuegos.

(3) 나무위키. 모히토.

(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77쪽, 리더북스 펴냄, 2014년

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yang412@hira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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