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준수하라 하지만 매출목표 압박하면 규정위반 불가피…문제 생기면 개인 책임전가"

다국적제약사에 근무하는 영업사원 A씨는 오늘도 이른 새벽 길을 나섰다. 자신이 담당하는 대학병원 교수가 부산으로 내려가는데, 서울역까지 배웅하기 위해서다. 최근 공정경쟁규약이 강화되고, 김영란법의 시행으로 리베이트 관행 등 제약업계의 영업환경이 크게 달라졌다고 하지만, A씨는 그리 큰 감흥이 없다. 자신의 회사는 이미 수년전부터 ‘공식적’으로 주고받는 영업을 못하게 했고, 또 ‘공식적’으로 김영란법 보다 더 엄격한 내규를 운영해 왔다. 그럼에도 그의 영업활동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공식적’으로 없어졌을 뿐, ‘개인적’으로는 과거와 다를 바 없다. 여전히 병원 회식을 지원하고 고객(의사)의 개인사를 도와주며, 개인일정도 참여한다. ‘공식적’이 아닌 ‘개인적’으로 말이다.


다국적 기업에 대해 ‘높은 연봉’, ‘다양한 복리후생’, ‘공정한 기회’, ‘투명하고 선진적 운영 시스템’ 등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제약업계 영업 현장에서 활동하는 영업사원들에겐 모두 통용되는 말은 아니다.

리베이트 쌍벌제, 공정경쟁규약 강화, 김영란법 시행 등의 일련의 과정은 제약업계의 불법리베이트 관행을 변화시켰다. 다국적제약사는 물론, 국내제약사들도 내규를 강화해 불법적인 요소를 금지시키고 이를 임직원들에게 서약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A씨와 같은 모습은 남아 있다. 투명하고 공정함을 강조하는 다국적제약사임에도 말이다. A씨가 회사에서 공식적으로는 금지된 구태의 영업 관행을 비공식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업목표를 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자와 만난 한 다국적제약사 노동조합 소속 관계자는 “과거보다 영업환경이 투명해진 건 분명하다. 회사도 직원도 의사도 모두 서로 조심하는 분위기가 생겼다”면서도 “문제는 매출 목표 달성에 대한 압박이다. 물론 회사는 내규 하에서 움직이고 (의사를) 만나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영업현장에선 내규대로 움직이면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렵다. 결국 영업사원 개인이 책임을 각오하고 영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국적제약사나 국내제약사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토로했다.

B다국적제약사 노조위원장은 “밖에선 (다국적제약사에 대해) 높은 임금, 우수한 복리후생 등이 강조되고 있지만, 과거 얘기일 뿐”이라며 “현재는 (국내제약사와) 큰 차이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빛좋은 개살구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휴일근로수당 등 실정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들이 근무하기 좋은 기업, 존경받는 기업 등과 상을 수시로(?) 받는 다국적제약사들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박한 평가다. 왜일까.

구조조정하면서 뒤로는 직원을 모집?
지난해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 쥴릭파마코리아 등 일부 다국적제약사들은 노조와 마찰을 빚었다. 사노피는 부당해고 및 임금협상 문제였고, 쥴릭파마는 비정규직 문제와 반노조 행위에 대한 불신이 쟁의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선진국의 운영 시스템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국내의 다국적제약사들에서 사노피 노조 등과 같은 노동자들의 당연한 권리인 노조 활동이 활발해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약사 노조 단체인 한국민주제약노동조합(이하 민주제약노조)이 2012년 출범한 후, 한국머크, 한국페링, 한국엘러간, 프레지니우스카비코리아, 한국노보노디스크 등에서 노조가 속속 결성됐다. 현재 민주제약노조에는 13개 지부, 1,200명의 노조원들이 소속돼 있다.

민주제약노조 소속 C다국적제약사 노조위원장은 “민주제약노조 출범으로 얻은 성과 중 하나가 휴일근로수당”이라며 “2~3년 사이에서야 대부분의 다국적제약사에서 휴일근로수당을 주게 됐다. 다국적 기업이 말이다. 그동안은 영업사원들의 휴일근로에 대해 애매하게 판단하고 평가해 왔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부당해고 문제도 비단 사노피만의 일이 아니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사노피 노조는 수개월째 해고 직원들을 복직시키라고 요구하며 수개월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사노피는 지난해 내규를 어긴 두 직원에 대해 해고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노조는 해고직원들이 팀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며, 금액도 수십만액에 불과하고, 팀장은 권고사직인 반면 지시를 이행한 직원들은 해고라는 조치를 내린 건 부당하다며 철회를 주장하고 있다.

D다국적제약사 영업사원은 “다국적제약사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혹자는 꿈의 직장에 다닌다고 말하더라. 과거 임금이나 복리후생이 국내 제약사보다 좋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는 국내사나 다국적사나 대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옥죄는 부분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이어 “다국적사들이 흔히 하는 정리해고 방식인 희망퇴직프로그램(ERP)만 해도 그렇다. 구조조정을 한다며 ERP를 시행하면서 한편에선 직원을 뽑기도 한다. ERP란 미명 아래 (직원을) 찍어서 내쫓는 꼴”이라고 덧붙였다.

내근하는 영업사원들?
최근 수년간 제약업계의 가장 큰 화두는 역시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CP)이었다. 정부가 리베이트 쌍벌제 등과 같은 칼을 들었기 때문이지만, 의사나 제약사 모두 불법 리베이트 관행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는 상황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부에선 CP 강화가 영업사원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위에서 언급한 A씨의 사례가 대표적인 예다. 심지어 기자가 만난 한 영업사원 D씨는 최근 리베이트 사건이 터지면 회사가 개인으로 일탈이라고 발표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영업사원도 다국적제약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D씨는 “우리 회사도 오래전부터 CP를 운영해 왔다. 절대로 규약을 어기지 말라고 하고, 서약서에 서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에서 매출목표에 대해 압박하면, 규정위반을 하기도 한다 ”며 “이를 위에서 모르겠나.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개인에게만 미룬다. (규정위반에 대한)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많은 이(영업사원)들이 나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고 토로했다.

CP 강화로 인해 업무 강도가 세졌다는 불만도 있다.

또 다른 다국적제약사 영업사원은 “고객활동이 많은 영업부서에 규제가 많아졌다. 수시로 바뀌는 CP에 따라 영업관리 시스템을 만들고 따라가야 하고, 보고서도 많아졌다. 과거 영업사원들의 일이 현장에서 의사들과 같이 호흡하는 활동이 주였다면, 지금은 서류 작업이 더 많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한 다국적제약사 영업마케팅 이사는 "상위 국내제약사들하곤 격차가 줄어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국내사보다 다국적사의 연봉 등 근로여건이 여전히 낫다. 일부 불만이 있겠지만, 여느 기업군과 마찬가지로 문제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고 본다"면서도 "노조를 통해 간혹 과한 요구를 한다는 말이 들린다. 또 현 시점이 국내 제약업계의 변화의 과정임을 인식할 필요도 있다"고 피력했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