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심평통신

지난 연말은 연단위로 평가가 이루어지는 4대 암에 대한 요양급여적정성평가의 마무리에 집중했다. 특히 전문가들로 구성된 평가분과위원회에서 사례별로 받아온 여러 가지 사유에 대한 인정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절차이다. 즉, 평가지표별로 일정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지만, 사례별로 인정이 가능한지 검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요양기관들이 평가지표를 충족하지 못한 사유로 적어낸 것을 보면 환자측 요인이 가장 많다. 진료지침에 따를 수 없을 정도로 환자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환자가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환자가 거부하는 사연은 다양해서 일률적으로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암종에 따라서 환자의 민감도도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거부의 인정범위도 암평가의 종류에 따라서 다소의 차이가 있다.

대체로 환자거부를 포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의 배경에는 환자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물론 당연한 주장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구입했던 상품을 교환하거나 반환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담당자가 사유를 물었을 때, ‘아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라고 대답하는 경우에는 군말 없이 받아주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소비자의 권리가 인정받는 사회라는 뜻이다.

하지만 진료시점보다 최소한 수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조사표를 받아 평가를 진행하기 때문에 지표를 충족하지 못한 사유로 환자 거부를 활용하는 사례도 전혀 없지 않다는 뒷이야기도 듣고 있는 입장에서 환자거부를 포괄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심평원의 입장이다. 그래서 거부의사가 있는 ‘환자를 설득하는 것도 치료과정의 하나가 아닐까요?’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비치기도 하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필자의 이런 생각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신경외과 수련과정을 마칠 무렵 발견된 폐암으로 서른여섯의 안타까운 나이에 사망한 폴 칼라티니가 쓴 <숨결이 바람 될 때>이다. 칼라티니는 아버지를 비롯하여 의사들이 많은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문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문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의사만이 진정으로 생리적·영적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한 휘트먼의 말에 따라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가장 도전적으로 (인간의) 의미, 정체성, 죽음과 대면하게 해줄 것 같다고 생각’하여 신경외과를 전공하게 되었다.

신경외과 수련과정에서 그는 죽음의 무게가 손에 잡힐 듯 뚜렷하게 느껴진 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죽음과 맞서 싸우는 전사가 아닌 죽음의 전령사 역할에 머물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부터 환자를 대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바로 그 방식 가운데 암평가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환자거부에 관하여 참고할 만한 대목이 있다. “만약 내가 수술 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예상되는 합병증을 무심하게 떠들어댄다면 그녀는 수술을 거부할 것이 뻔했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챠트에 환자가 수술을 거부했다고 기록하고, 내 일은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하며 다음 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물론 칼라티니의 그녀는 수술을 받았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가 그녀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궁금하면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서른여섯, 젊은 신경외과 의사가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과정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암진료를 하는 모든 의사들은 치료방향에 대하여 환자와 보호자에게 최선을 다하여 설명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고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정말 아주 일부 거부의사를 밝히는 환자의 경우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봐주기를 당부한다. 필자는 여전히 그런 환자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것까지도 담당의사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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