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건의료연구원 임태환 前 원장·이상무 연구기획실장

전 세계 각국이 보건의료산업 발전을 위한 연구개발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투자를 강화하고 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 없을 정도다.

우리나라 역시 국제적으로 손색없을 정도의 국가 R&D자금이 여러 부처에 걸쳐 투자되고, 여기에 우수한 의료 인력과 섬세한 의료기술, 전 국민 건강보험 데이터를 갖고 있는 국내 환경을 더하면 바이오헬스산업을 미래 먹을거리산업으로 키우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 이상무 연구기획실장(왼쪽)·임태환 前 원장


그러나 R&D 예산 대부분은 의료제품 개발을 위한 후보물질 발견 및 식품의약품안전처 인허가를 받기 위한 ‘허가임상시험’에 투입되는 실정이다. 해당 제품·기술이 정책당국의 관문을 통과하면 정부는 고부가가치 산업육성에 제 역할을 다한 것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이러한 탓인지 임상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의료기술에 대한 임상연구 투자가 필요하다고 하면 “왜?”라는 질문을 종종 받게 된다.

의료기술의 생애주기에서 인허가 이후실제 의료현장에서 사용 중인 의료기술의성과를 비교하는 ‘후기(post) 임상연구’는 앞서 설명한 허가임상시험에 비해 턱없이부족하다.

정부와 국민들의 인식 또한 무관심에 가까워 이에 대한 국가적 투자는 열악하기만 하다. 더욱이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임상연구에 건강보험 재원을 활용코자 하면 냉소적 반응이 뒤따른다.

하지만 의료현장의 임상연구에 정부 예산과 건강보험 차원의 투자는 필요하다.

불확실한 의료현장과 국제적 동향2010년 세계보건기구 World Health Report에 따르면, 보수적으로 추계해도 국가 의료비 지출의 20~40%는 낭비되고 있다.

미국의 ‘다트머스 건강정책 및 임상진료 연구소(The Dartmouth Institute for Health Policy and Clinical Practice)’도 메디케어 지출 30%에 낭비적 요소가 있음을 지적했고, 2010년 ‘미국의학연구소(Institute of Medicine, IOM)’ 또한 미국 총의료비 지출 2.8조 달러 중 30%가 허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4년 영국의 ‘왕립의과대학 학술원(The Academy of Medical Royal Colleges)’은 영국 국가의료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 지출 중 20억 파운드 가량이 불필요하게 쓰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임상현장에서 쓰이는 의료기술에 대한 가치평가가 이뤄지지 않음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즉, 특정 의료기술이 저렴한 대안 의료기술에 비해 더 나은 건강개선 효과를 가져오는지 근거가 부족함에도 추가적인 검증 기회가 없어 고비용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어떤 의료가 가장 효과적인 것인지 더 나은 지식과 합의점을 찾는 노력이야말로 국민건강에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미국의학연구소(IOM)의 권고에 따라,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을 통해 보건의료분야에 대한연구투자를 활발히 진행 중이다.

오바마 정권은 ‘환자중심성과연구소(Patient-Centered Outcomes Research Institute, PCORI)’를 통해 2010~2019년까지 1조2,600억원에 달하는 재정을 의료현장 임상연구에 투자하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했고, 매년 공보험에 해당하는 메디케어·메디케이드와 사보험(PCOR fee)으로부터 2,000억원 이상의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다.

영국의 국가의료서비스 NHS는 우리나라 건강보험에 상응하는 체계로(영국은 조세, 우리나라는 사회보험으로 조달), 국영기관 중 영국철도와 더불어 R&D 투자가 없는 기관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에NHS에서는 2006년 ‘국립보건연구소(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Research, NIHR)’를 설립해 영국 국민들이 질 높고 효과적인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NHS 예산의 1%를 임상연구에 투자하고 있다. 최근에는 10억 파운드(1조500억원) 가량을 임상연구와 의료기술평가연구에 투입했는데, 이를 통해 생성된 연구결과들은 250여개의 NICE 임상진료지침에 활용됐다.

반면 우리나라는 임상연구에 대한 건강보험의 투자가 전혀 없으며, 그동안 보장성강화 및 재정 효율화 논리에 밀려 임상연구의 중요성은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건강보험 재원을 임상연구에 투자해 의료현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진료의 질적 향상을 가져다 줄 근거를 생성한다면 효율적인 건보재정 운영과 의료자원 활용에 분명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근거와 가치’ 기반한 임상연구로 전환‘허가임상’은 주로 의료시장에 진입할 목적으로 의약품·의료기기의 효능과 안전성을 입증하고자 시행된다. 이를 위해 ‘이질적이지 않은’ 환자군을 대상으로 비교적 짧은 추적기간 동안 관찰해 해당 제품의‘효능(efficacy)’을 측정한다.

그러나 실제 의료현장에서는 어린이, 노인, 합병증이 동반된 환자 등 ‘다양하고 이질적인’ 환자들에게 해당 의료기술이 사용되고, 장기 관찰시 사망, 심혈관계 합병증과 같은 최종 건강결과들에 대한 데이터가 축적된다.

이처럼 의료현장에서 얻게 되는 결과를‘효과(effectiveness)’라는 개념으로 정리해 최적화된 조건에서 도출된 허가임상의 ‘효능’과는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보편적 의료환경에서 장기간에 걸쳐 관찰된 치료효과 및 안전성, 대안 기술과의 비교결과야말로 의료기술의 실제 가치에 해당한다.

의료현장에서의 임상연구에 공적 투자가 필요한 이유는 이렇듯 허가 임상과 ‘진짜효과’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거와 가치’에 기반한 임상연구 결과는 환자가 받을 의료의 질을 높이고, 보다 비용효과적인 의료분야에 대해 건강보험 및 국가재정 등 공적 보장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뒷받침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쳐 절감된 공적 재원을 임상연구에 투자하는 선순환이야말로 국민건강 향상과 보건의료산업 발전이라는 이질적인 정책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균형자로서 정부의 역할과 맞닿아 있다.

산업계 주도 임상연구로 충분한가? 같은 맥락에서 ‘산업계 주도의 연구’로 해당 의료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산업계 재원과 NIH 등 공적 재원으로 수행된 연구결과들을 비교분석한 리아즈(Riaz, 2015)의 연구에 따르면, 전자의경우가 후자보다 긍정적 결과들이 많았다.

공적 지원 연구는 20.8%만 긍정적 결과를 얻은 반면, 산업체 지원 연구는 50.9%로 파악됐다. 반대로 부정적인 결과는 공적 지원연구가 42.9%, 산업체 지원 연구가 13.3%였다. 이러한 경향은 심장순환기계, 감염질환, 신경과, 호흡기계, 내분비계 등에 걸쳐 고르게 나타났다.

2001년 NEJM과 JAMA에 게재된 문헌398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재원뿐 아니라 저자들의 해당분야 이해관계도 긍정적 연구결과와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오즈비 2.35(95% CI, 1.08 to 5.09)).

또한 표기된 논문저자들이 실제 논문작성에 관여하지 않고 제3자가 논문을 작성하는 유령 논문(ghost writing), 실제 필요한 샘플 수보다 많은 수의 대상자를 모집해 임상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으나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보이도록 하거나 경쟁우위를 점하려 하는 경우(overpowered trials), 부적절한 대상과의 비교임상연구,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은 연구는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는 등산업계 주도 임상연구의 많은 문제점들도 지적됐다.

그동안 보건의료 산업계와 수많은 의약학자들의 노력으로 과거 불치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질환들의 진단·치료방법들이 개발돼 전 인류가 그 혜택을 보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진보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성과는 국가와 민간의 기초연구투자에서 기인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으로 충분한지 끊임없이 질문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의료기술이 속속 개발되고 있지만 의료현장의무수한 불확실성을 해소하려면? 국민 대다수가 이용하는 일상적 의료현장에서 의료의 질과 효과, 안전성을 담보하려면? 개인과 병원, 나아가 국가 단위에서 한정된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금까지 논의한 후기 임상연구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상현장에 도입된 의료기술의‘실제 가치’를 파악하기 위한 국가적 투자가 절실히 필요하며, 건강보험과 민간보험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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