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과학대 보건의료산업학과 이평수 교수

지난 5월 말에 모든 유형의 요양기관과 2017년도 건강보험 수가협상이 타결된 바 있다. 당사자 모두가 만족하는 성공적인 협상이었을까? 답은 아니다. 현 상황에서 협상 당사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협상 결렬보다는 타결이 실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규칙이 없는 게임처럼 원칙도 없는 협상을 10여 년 동안 경험한 학습효과가 반영된 결과이다. 그러나 제도 시행 기간이나 경험 그리고 결과를 고려할 때 수가협상의 새로운 전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현재의 수가협상은 어느 당사자에게도 합리적이거나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의 뜻에 따라 받는 자들이 정해진 총액 내에서 최대한 자신의 몫을 챙겨가는 형국이다. 총액을 정하는 원칙도, 총액을 유형별로 배분하거나 자기 몫을 요구하는 원칙도 없다. 그렇다면 칼자루를 쥔 자는 누구인가. 형식적으로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고 그 뒤에 명시적으로 재정운영위원회가 있으며 묵시적으로 정부가 있다.

공단이 제시하는 수가 평균인상률인 소위 밴딩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밴딩은 공단이 지정한 연구자가 그들의 자료와 논리를 토대로 마련한 대안을 재정운영위원회가 참고해 정한다. 밴딩 폭은 협상 대상도 아닌 요지부동의 것으로 협상 당사자 중 공단만 활용한다. 협상이라는 용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방적인 상황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자신의 몫을 챙기는 공급자들의 논리도 궁색하고, 빈약하고, 천편일률적이다. 원가 보전을 요구하면서, 요양기관의 살림살이가 어려우니 이를 반영해달라고 한다. 당사자들이 원하는 원가 산출은 가능할까? 산출방법은 물론 공급자들이 제출하는 자료로 객관적이고 정확한 원가 산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2005년에 경험했다. 원가를 보전하는 수가 책정 또한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요양기관의 살림살이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원가와 유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현 수가협상 방법과 과정은 실질적으로 유형별 총액계약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요양기관 종별 전체의 총액을 정하는 원칙이나 기준은 물론 유형별 총액을 정하는 원칙이나 기준도 없다는 것이다. 협상의 과정은 공급자들의 근거 없는 높은 인상 요구와 공단의 자기 논리에 따른 일방적인 인상율과 조건 제시의 반복이다. 공단이 제시한 대안을 수용하는 유형은 협상 타결이고, 수용하지 않는 유형은 결렬이다. 그 근거와 이유는 없다.

지금은 근거와 이유인 원칙이 필요한 시점이다. 실질적인 총액계약제를 현실화하는 대안으로 협상원칙을 정하는 협상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선 총액계약제에 대한 편견부터 정리해야 한다. 공단은 총액계약제를 건강보험재정의 통제수단으로 활용하려 했고, 공급자들은 공단의 통제에 묶이지 않으려는 상황이 전개돼왔다.

이제 총액계약제를 보험재정 관리 뿐 아니라 적정 보상의 방법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해봐야 한다. 이러한 계기가 없으면 보험재정의 충분 정도 즉, 흑자나 적자에 상관없이 수가인상률은 2% 중반 선에서 운용될 것이다. 현재와 같이 보험자인 공단이 일방적인 협상을 하는 상황에서는 재정상태가 좋아질 경우 밴딩 폭이 상향되는 것보다는 나빠질 경우 하향하는 정도가 클 것이다.

건강보험재정의 변화추세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2008년 이후 건강보험재정 증가분 중 수가인상분과 급여 확대분을 제외한 자연증가율은 계속 감소하는 추세로 10%선에서 2%선으로 하향 안정 추세이다. 일부 유형은 감소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총액계약제 활용 가능성을 시사하는 변화이다.

총액계약제는 현재의 밴딩 폭을 정하는 원칙과 밴딩 내에서 유형별 인상률을 정하는 원칙을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수가를 정하는 방법에는 두 단계가 활용될 수 있다. 첫 단계는 정해진 원칙에 따라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한 기계적인 인상이다. 즉, 물가, 인건비, 경제성장 또는 인구변화 등의 통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협상을 통한 인상이다. 유형별로 급여확대, 새로운 기술이나 공급체계 등 새로운 제도의 도입 등에 따른 영향과 영향의 수용 여부 그리고 그에 따른 수지변화의 정도를 수가와 연계하는 협상이다.

매년 5월에 2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근거와 원칙도 없는 형식적인 협상으로 의료서비스의 수준과 보험재정을 정하는 무모한 행태는 개선돼야 한다.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당사자 간 의견을 교환하고 설득하는 협상다운 협상으로 동의할 수 있고 수용 가능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어야한다. 협상을 위한 협상의 방법과 과정에 대한 원칙과 기준을 정하는 협상이 우선 진행돼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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