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형곤의 심장압박

198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신군부의 집권연장을 위해 대권을 노태우씨에게 넘겨주려 할 때가 생각난다. 신군부에 의해 탄생한 제5공화국은 박정희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은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4.13 호헌 조치를 통해 대통령간선제를 유지할 것을 천명하자 정국이 혼란에 빠져들며 6월 항쟁이 촉발됐다

그때 나는 혈기방장(血氣方壯) 했던 의예과 2학년이었는데,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후부터 초여름을 거의 매일같이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는 캠퍼스에서 집회와 시위를 하며 보냈다. 당시 우리가 원했던 한 가지는 바로 대통령 직선제였다. 1961년 5.16 군사혁명에서 시작된 26년의 군부, 신군부 독재에 시달려 온 국민이 원했던 것은 민주화였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직선제가 그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신군부는 박종철·이한열 열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음에도 1987년 6월 10일 노태우씨를 민주정의당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결정했다. 이후 국민들은 거리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위를 했고 소위 넥타이 부대라고 불리던 직장인들까지 합세해 국민의 염원을 전달했다. 서슬 퍼렇던 신군부는 결국 국민의 힘에 굴복해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정치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인들은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은 적이 없다. 그토록 열망한 대통령 직선제에서 김영삼, 김대중씨는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 노태우씨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혹자는 장기간 군부독재가 민간으로 이양되기 위한 일종의 경과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결국 양 김씨의 욕심이 국민의 열망을 저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로 끝없이 이어진 여러 대통령들의 측근 비리와 각종 구설수, 그리고 국민의 뜻에 반하는 정책들. 혹시나 해서 뽑으면 역시나로 귀결되는 배신…. 국민들은 피를 흘려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의 초석을 만들어 놓았는데 정권을 잡은 이들은 어김없이 국민을 실망시켜 왔다.

급기야 한 나라의 국가 정책이 근본을 모르겠고, 딸을 말 태워 소위 잘나가는 명문 여대에 입학시키는 용감함을 보이는, 막장 아줌마의 손바닥에서 결정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를 포함한 이 나라의 국민들은 끝없는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집단 공황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정치는 그 나라 국민 모두를 잘 살게 해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주주의란 국민을 잘 살게 해주는 최선의 방법론으로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민주화는 것만 번지르르한 껍데기 민주화가 아니다. 모두가 노력한 만큼 잘 살 수 있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그런 민주사회를 원한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군화발로 짓밟고 총으로 겁박하지는 않지만 치졸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국민을 기망하는 지능형 독재를 계속 이어 왔다. 대통령의 통치행위가 절대 다수의 행복과 존엄을 위해 이뤄지지 않고 권력의 중심에 있는 몇몇 인간의 영달을 위해 행해지는 그런 상황이 확인됐다.

요즘 대한민국 정책은 동남아(동네 남아도는 아줌마)의 조언을 통해 결정된다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된다. 완전히 멘붕 상황인 것이다. 또한 막장 아줌마와 그 아바타 대통령이 벌인 희대의 사기극은 이 시대를 사는 청춘의 마음에 화염방사기를 분사해 희망이라는 숲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 비싼 등록금을 내가며 대학 4년 동안 죽어라 공부하고 스펙을 쌓아도 취업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 현실에 살아가는 대다수 청춘들이 용감한 엄마를 둔 덕택에 고등학교는 출석도 안하고, 비싼 말 타고 명문 대학에 입학해 걸레 같은 리포트를 내고도 학점을 받는 이 상황을 보면서 과연 어떤 느낌이 들까. 화가 나고 욕이 나오는 것을 넘어 자괴감과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위대했다. 지난 12일 우리 국민들은 배신감과 상실감을 이성적으로 표출하고 폭력시위를 자제해 대통령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물러나라고. 그런데 여든 야든 정치권은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고 각자의 주판알을 튀기기에 급급하다. 지금은 자기 정파의 유불리를 떠나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위한 대승적 결단과 화합이 필요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들만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하야든 탄핵이든 거국내각이든 뭐든 매듭을 지어야 하는 상황인데 이토록 뭉개고 있으니 설령 조기 대선을 통해서 지금의 정치 지도자란 자들이 새로운 대통령이 되고 그 정파가 집권한다고 한들 과연 무엇이 얼마만큼 바뀔 것인가. 아예 싹수가 노랗다고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멘붕에 노답’이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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