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에 대한 신뢰가 불러온 가짜 한방 당뇨약 판매 사건

한의사 3명이 식용 불가능한 숯가루 등을 섞어 불법 한방 당뇨약을 제조·판매한 혐의로 검거된 가운데, 이 가짜 한방 당뇨약을 처음으로 제조하고 유통시킨 사람이 강남의 유명 Y한의원의 전 원장 K씨인 것으로 드러났다.

K원장은 2005년경 전문의약품 성분이 함유된 가짜 한방 당뇨약의 원료를 중국에서 불법으로 들여와 식용이 불가능한 숯가루 등을 섞어 당뇨환자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검거된 한의사들은 K원장으로부터 가짜 당뇨약을 제공받아 판매하다가 K원장이 사망한 2007년 10월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중국에서 직접 원료를 불법 수입해 한방 당뇨약을 제조·판매하거나 국내에서 제조된 한방 당뇨약을 구입해 환자들에게 판매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 한의사는 당뇨약 원료 구입 대금과 제조 비법 전수 명목으로 7년간 9억원 가량을 중국 중의사에게 지불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특별시 특별사법경찰단 발표에 따르면 이들에게서 한방 당뇨약을 구입한 환자만 1만3,000여명에 달하며 판매 금액만 38억원에 이른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환자들을 속이고 가짜 한방 당뇨약을 제조·판매할 수 있었던 과정과 사건의 뒷이야기를 이번 수사를 맡았던 사법경찰단 관계자를 만나 들어봤다.

서울특별시 특별사법경찰단 제공


명약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
K원장은 ‘한방 당뇨치료의 선구자’로 불리며 여러 차례 언론을 통해 한방 당뇨치료를 소개한 인물로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의사는 자신이 처방한 한약 성분을 꿰뚫고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양약보다 한약이 더 진일보한 당뇨치료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며 환자들을 안심시키고 지난 2005년부터 자신이 만든 한방 당뇨약(청혈익기환, 청혈환)을 판매했다.
K원장의 청혈익기환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며 고가로 팔렸고 한의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K원장은 자신의 한의원에서 한방 당뇨약 관련 세미나를 개최해 청혈익기환을 자신이 개발한 약으로 선전했다.

이때 세미나에 참석했던 한의사 중 일부가 이번에 검거된 한의사 A, J, T원장들이다. 이들은 세미나 후 K원장으로부터 청혈익기환을 구입해 자신들의 한의원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6년, K원장으로부터 청혈익기환을 구매해 판매하던 한의사 J씨는 K원장이 판매하는 청혈익기환이 K원장이 개발한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게 됐고, 이에 K원장을 추궁했다.

끈질긴 추궁 끝에 결국 K원장은 대전의 모 식당에서 자신의 청혈익기환을 구입해 판매하던 한의사들에게 비밀을 털어놓게 된다.

K원장이 밝힌 비밀은 자신이 직접 개발했다고 선전한 청혈익기환이 사실은 자신이 개발한 것이 아니라 중국 H병원 W원장(중의사)으로부터 제조법을 전수받은 것이며, 국내에서 자신이 만든 청혈익기환은 중국에 있는 W원장으로부터 원료를 불법 수입해 만든 약이라는 것이었다.

K원장의 비밀을 알고 더 이상 K원장을 믿을 수 없게 된 한의사들은 K원장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청혈익기환의 원료를 판매한 W원장(중의사)을 만나게 된다.

한의사들은 W원장에게 “K원장이 팔고 있는 청혈익기환에 (양)약 성분이 들어있냐”고 물었고, W원장 “청혈익기환은 중국에서 천연성분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의사들은 W원장을 말을 믿고 계속해서 K원장에게 청혈익기환을 구입해 판매했다.

K원장 사망, 나타나는 브로커
2007년 10월, 처음 한의사들에게 청혈익기환의 존재를 알려줬던 K원장이 사망했다.

K원장은 사망 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청혈익기환의 남은 원료와 제조법을 대구의 J원장에게 넘겨줬고 자신이 운영하던 Y한의원은 A원장에게 팔며 A원장에게도 제조법을 알려줬다.

A원장은 K원장이 사망한 후에도 J원장에게 계속 원료를 공급받아 청혈익기환을 제조·판매했다.

그러던 2009년 어느 날, 자신을 중국 H병원의 대리인이라고h 소개한 브로커 L씨가 A원장에게 접근했다.

브로커 L씨는 “H병원으로부터 직접 원료를 수입할 수 있도록 연결해 줄 테니 H병원과 계약을 맺으라”고 A원장을 설득했다.

이에 A원장은 중국으로 건너가 H병원과 계약을 맺어 J원장을 거치지 않고 청혈익기환의 원료를 직접 수입하게 된다.

A원장은 지속적으로 원료를 구매하면 원료를 만드는 비법을 알려준다는 W원장의 말을 믿고 수년에 걸쳐 매달 13kg의 원료를 구입했고, 그에게 7년간 원료 수입 대금으로 건넨 금액만 9억원에 달한다.

그렇게 A원장은 지난 7년간 당국의 수입허가 없이 총 1,050kg의 청혈익기환의 원료를 수입했다.

중국의 원료가 A원장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중국에서 한국으로 불법 반입된 원료가 한국에 거주했던 또 다른 브로커 B씨(잠적)에 의해 택배로 A원장에게 전달됐다는 사실만 밝혀졌다.

청혈익기환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A원장은 이렇게 직접 구입한 청혈익기환의 원료를 가지고 환자별 처방전도 없이 경동시장 내 식품제분소에 의뢰해 청혈익기환을 대량 제조했다.

A원장은 조사과정에서 탕제실이 아닌 식품제분소에서 청혈익기환을 제조한 이유에 대해 “비법공개를 막기 위해”라고 말했다.

한의원 내 탕제실을 갖추지 못한 A원장은 탕제실을 갖춘 다른 한의원 탕제실을 이용해 한약을 제조해야 했지만, 이때 청혈익기환이 만들어지는 방법이 알려질까 염려돼 이를 막기 위해 식품제분소에서 제조했다는 것이다.

또한 A원장은 예전 K원장이 주최한 한방 당뇨약 관련 세미나에서 만난 T원장에게 자신이 제조한 청혈익기환을 공급했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중국에서 불법으로 유입된 원료로 탕제실이 아닌 식품제분소에서 불법으로 제조된 청혈익기환을 효능이 있는 약으로 믿고, 약국에서 판매하는 당뇨병 치료제보다 최고 24배 비싼 가격(23만원~35만원)으로 구입해 복용한 것이다.

가짜 한방 당뇨약의 비밀은? 전문의약품 성분
K원장에서 J원장을 거쳐 A원장으로 이어진 청혈익기환이 2005년부터 지금까지 팔리던 중 사법경찰단에 ‘강남 유명한의원에서 전문의약품 성분이 포함된 당뇨약을 불법으로 제조·판매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마침내 10여년에 걸친 청혈익기환의 꼬리가 잡힌 순간이다.

사법경찰단은 인터넷으로 한방 당뇨약을 팔고 있는 강남지역 한의원들을 검색한 후 판매되고 있는 당뇨약의 성분을 알아보기 위해 강남 6개 한의원에서 당뇨약을 구매했고, 이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서울시보건환경연구원에 성분조사를 의뢰했다.

성분분석 검사 결과 강남 일부 한의원에서 판매하고 있는 당뇨약에서 당뇨병 치료제 성분인 ‘메트포르민(Metformin)’과 ‘글리벤클라미드(Glibenclamide)’ 성분이 검출됐다.

메트포르민(상품명 그린페지정 등)과 글리벤클라미드(상품명 다오닐정 등)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전문의약품으로 천연 물질로 만든 이들의 청혈익기환에서는 검출될 수 없는 성분이다.

일반적인 당뇨 치료제는 500mg의 메트포르민 성분이 함유되는데, 이들이 사용한 원료에는 100mg정도의 메트포르민 성분이 검출됐다.

또한 여러 차례 성분 검사를 진행한 결과, 원료에 포함된 전문의약품 성분(메트포르민, 글리벤클라미드)이 균일하지 않게 함유된 것으로 나타났다. 애당초 치료제 원료의 정확한 제조법은 없었던 셈이다.

식용 금지 숯가루 사용, 불법인지도 몰라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판매한 청혈익기환 원료에는 성분을 확인할 수 없는 원료와 식용으로도 사용이 금지된 숯가루도 검출됐다는 것이다.

이 결과를 토대로 사법경찰단은 해당 한의원들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전문의약품성분이 검출된 청혈익기환을 만든 한의원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고, 이를 제조·판매한 한의사들을 조사했다.

수사 과정에서 한의사들은 자신이 판매한 당뇨약은 천연성분으로 만들어진 약이라고 주장했다.

수사관들은 “한약에서도 메트포르민 성분이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고 A원장은 “천연물질에서도 메트포르민 성분이 검출 될 수 있다”고 답했다.

또한 “가짜 당뇨약에 왜 식용이 금지된 숯가루를 사용했냐”는 수사관의 질문에는 “약에 색을 입히고 코팅하려고 사용했다”고 답했다. 일반적으로 한약에 색을 내기 위해서 약용탄이라는 물질을 사용하지만 검거된 한의사들은 “예전부터 환을 코팅하는 데 숯을 이용했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더욱이 이들은 숯가루가 식용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수사과정에서 A원장은 지난 7년 동안 원료비와 비법 로열티 명목으로 중국 H병원 W원장에게 9억원을 줬다고 진술했다.

W원장은 매년 원료에 들어가는 성분을 일부만 공개하는 방법으로 A원장과의 거래를 이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원료의 성분 조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 원료는 애당초 비법 없이 제조된 것이다. W원장에게 수년간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또한 A원장, J원장과 함께 사망한 K씨의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이후 지속적으로 청혈익기환을 공급받아 판매한 T씨는 이 약을 순수 한약으로 만든 당뇨 치료제라고 속이기 위해 화학성분 분석보고서 내용을 위조해 환자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K원장 사망 시 국내에 남아있던 원료를 이어받은 J씨는 이후 중국에서 직접 원료를 수입하진 않았지만 남은 원료로 계속 청혈익기환을 제조·판매하다가 적발됐다.

환자 병원 보내서 효과 조작하기도
사법경찰단 조사에 따르면 이들에게 청혈익기환을 구매한 당뇨병 환자들만 1만3,000여 명에 달하지만 수사 관계자는 수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밝혔다.

관계자는 “의약품이라는 것은 전문적인 영역이기에 한의사들이 진술한 부분에 대해 자료 조사나 근거를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한약재의 개별 효능에 대한 연구가 없어 수사가 더욱 힘들다”고 전했다.

수사 관계자들이 검거된 한의사들에게 “한약재의 과학적 효능에 대해 입증된 자료가 존재하냐”고 물었지만 검거된 한의사들은 “자료가 없다”고 답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한약에 대한 유효성?안전성 검사를 실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 가지 한약재에 대한 효능 검증도 없는데, 여러 개의 한약재가 혼합된 한약이 어떤 효능을 발휘하는지 모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수사 과정에서 한의사들은 “자신들이 만든 약은 당뇨치료에 효능이 있으며, 이 약으로 혈당 관리에 성공한 사례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수사 결과 한의사들이 청혈익기환을 지속적으로 판매하기 위해 환자들을 병원에 보내 혈당을 관리하게 한 사실도 밝혀졌다. 한의사들이 청혈익기환을 처방하면서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 병용치료하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이 결과 당 수치가 높으면 약과 함께 청혈익기환을 복용하게 하고 혈당 수치가 떨어져 효과를 보이면 약 복용을 중단하고 청혈익기환만 복용하게끔 환자들에게 지시한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한의사들은 12년 동안 청혈익기환을 환자들에게 판매할 수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환자들의 치료시기에 관한 부분이다.

당뇨는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면 만성 합병증이 발생해 환자들에게 큰 고통을 주며 사망까지 유발할 수 있는 질병이다.

한의사들은 혈당을 지속적으로 관리해 치료시기를 놓치는 등의 문제는 없었다고 말했지만 이 약을 구매한 1만3,000여명의 환자들에 대한 관리가 전부 이뤄진 것은 아니며 실제 얼마의 환자가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한 내과 전문의는 “당뇨병은 장기 치료가 필요하고 합병증의 위험이 높은 질병인 만큼 성능이 입증되지 않은 치료제를 복용하다가 치료시기를 놓쳤을 경우 심혈관 질환, 중풍, 망막질환 같은 만성 합병증 증가 우려가 있다”며 “의약품으로서 갖춰야할 안전성과 유효성이 확보되지 않은 불법 의약품은 정확한 용량 투여가 되지 않아 기존 치료약 성분의 부작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중의사의 말만 믿고 엉터리 원료를 수입해 엉터리 한방 당뇨약을 제조?판매해 온 일부 한의사들이 1만명이 넘는 당뇨환자들을 위험에 노출시킨 것이다.

책에만 실려 있으면 만사 OK?
현재 우리나라는 ‘한약처방의 종류 및 조제방법에 관한 규정’(백처방)을 가지고 있다.

이 고시의 주요 내용은 한약사 및 한약조제 자격이 있는 약사가 한의사 처방 없이 직접 조제할 수 있는 100가지 한약과 그 조제방법을 수록한 것이다.

안전성·유효성이 검증되지 않은 것은 물론 한의사 처방 없는 한약들이 국민들에게 판매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시에 규정된 한약들은 ‘금궤요략’, ‘난실비장’, ‘화제국방’, ‘의학심오’ 등 일반인들은 듣거나 보지도 못한 옛날 의학서를 근거로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쌍화탕’의 경우는 ‘화제국방’에 실린 것으로 백처방에는 쌍화탕의 출전, 조성비, 용법, 효능, 적응증, 주의사항이 적혀있다. 하지만 이 약의 효능의 경우 ‘調中益氣’(조중익기-소화기를 포함한 인체의 중간부위를 조화롭게 해 허약한 원기를 돕는다), ‘養血補虛’(양혈보허-피를 서늘하게 해 허한 것을 보한다)라고만 적혀있다.

쌍화탕의 주의사항에 대해서도 ‘생으로 된 것이나 냉한 과일 등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만 기재돼 있다. 어떤 질병을 가진 환자가 먹어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게다가 이 약으로 발생할 부작용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수백년 전부터 제조해 먹었다고 해 유효성과 안전성 검사는 하지 않고 그냥 믿고 먹으라는 것이다.

약의 경우 몇 단계에 걸쳐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그를 통해 안전성과 유해성을 확인한다. 임상시험 도중에 안전성이나 유해성에 문제가 발생하면 일반 국민들에게 판매되지 못한다.

하지만 한약의 경우 이러한 안전성과 유해성 검사를 하지도 않고 일반 국민들에게 판매되고 있다.

어떤 약재가 어떤 효능을 보인다는 객관적인 데이터 없이 심지어 그 약재를 여러 가지 섞어서 만든 한약을 제조·판매하고 국민들은 전문가(한의사)가 만들었다는 부분을 신뢰하고 약을 구매해 복용한다.

한의사에 대한 국민 신뢰가 부른 사건
사법경찰단 관계자는 “이번 수사를 하며 한의학계에 이상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에 대해 아직도 동의보감 핑계를 대며 안전성, 유효성 검사를 하고 있지 않고 있다. 수사 과정에서 보니 자격도 없는 제분소에서 약을 만들고 설사 탕전실에서 한약을 만든다 해도 그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고 말했다.

사법경찰단 관계자는 물론 환자들도 자신들이 구입하고 복용한 청혈익기환이 의사들만 처방이 가능한 전문의약품 성분이 들어가고 안전성·유효성 검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렇게 청혈익기환은 판매된 금액만 38억원에 달하고 이 중 9억원은 존재하지도 않는 비법을 전수해준다는 명목으로 중의사 W원장에게 건너갔다.

사법경찰단 관계자는 12년간 한의사들이 청혈익기환을 제조하고 판매한 행위를 가능하게 한 것은 ‘한의사’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이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유명 한의원에서 한의사가 직접 만든 당뇨약을 판매했는데 누가 이 약을 의심했겠는가. 환자들은 한의사 그 자체를 믿고 구매한 것”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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