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한특위 최근 5년 한의사 국시 '문제' 문항 공개
골수검사 등 의과 의료행위 제시 문항 꾸준히 등장
응급상황 묘사하고 한약 처방 물어 "의료윤리 문제"

28세 여자가 빈혈로 병원에 왔다. 혈액검사상 백혈구와 혈소판 수치도 낮다. 목소리에 힘이 없고 추위를 많이 타며 팔다리가 차고 허리가 시리다.

2021년도 한의사 국가시험에 출제된 문항 중 일부로, 빈혈로 병원을 찾은 28세 여성 환자의 골수검사 사진을 보고 알맞은 치료법을 찾는 문제다. "백혈구와 혈소판 수치가 낮다"는 혈액검사 결과도 제시됐다. 정답은 '대보진양(大補眞陽)'으로 한의학적 처방이다.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는 최근 5년간 실시된 한의사 국시 필기 문제를 분석한 결과를 17일 발표하며 이같은 일부 문항도 공개했다.

재생불량빈혈 환자의 한방 처방을 묻는 이 문제는 제79회 한의사 국시 1교시 50번 문항으로 출제됐다. 재생불량빈혈은 동종조혈모세포 이식까지 필요한 난치성 질환이다. 문제 내용처럼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 등 혈액세포 감소 위험이 커 중증으로 진행되기 전에 치료해야 한다. 한방 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의협 한방특위의 지적이다.

2021년 제79회 한의사 국가시험 1교시 50번 문항. 의과의료기기인 골수검사 사진을 제시했다(자료 출처: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
2021년 제79회 한의사 국가시험 1교시 50번 문항. 의과의료기기인 골수검사 사진을 제시했다(자료 출처: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

51번 문항은 호지킨 림프종에 대한 한방 처방을 고르는 문제였다. "림프절 조직검사에서 리드-스턴버그(Reed-Sternberg) 세포가 확인됐고 항암화학요법과 방사선치료 예정"인 20세 남성 환자에게는 '소핵환(消核丸)'을 처방하는 게 정답이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소핵환은 목과 귀 뒤에 멍울이 생겼을 때 처방한다. 그러나 호지킨 림프종은 방사선 치료가 필요한 악성 종양이다. 최근에는 질환에 따라 유전자 치료법까지 적용하고 있다.

의협 한방특위는 "국가가 관리하는 한의사 국가시험이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50번 문항처럼 '의과 검사'인 골수검사 사진을 제시한 밑바탕에 "(한방이) 의과 검사를 사용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도 했다.

이번 논란이 시작된 '직무기반 한의사 국가시험을 위한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도 예시 문항으로 뇌 컴퓨터단층촬영장치(CT) 사진과 심전도 검사 결과를 제시하고 한방 처방법을 물어 문제가 됐다. 최근 5년간 한의사 국시 필기시험에도 의과의료기기를 인용한 문항이 꾸준히 출제됐다. 재생불량빈혈 환자 골수검사 문항이 등장한 2021년 한의사 국시 의과의료기기 포함 문제는 53문항으로 전체 17.9%를 차지한다(관련 기사: 한의사 국시에 의과의료기기 문항 급증…의협 "한의학 존폐 기로").

의협 한방특위는 "의과의료기기 사진이나 영상은 한방에서는 '사족'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국시 문항에 출제한 것은 그 목적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면서 "골수검사는 의과에서만 시행할 수 있는 검사고 명백하게 한의학 원리에 근거한 한방 의료행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골수검사 결과를 시험 문제로 내고 있다"고 했다.

응급상황 묘사하고 한약 처방법 출제…"심각한 의료윤리 문제"

응급상황에서 부적절한 판단을 답으로 제시해 의료윤리에 반하는 문항도 있었다.

지난 2018년 제73회 한의사 국가시험 4교시 12번 문항은 급성백혈병 치료 중인 3세 소아 환자 사례를 제시하고 적절한 한의학 처방을 물었다.

2018년 제73회 한의사 국시 4교시 12번 문항. 응급상황을 묘사하고 한방 처방을 제시하도록 했다(자료 출처: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
2018년 제73회 한의사 국시 4교시 12번 문항. 응급상황을 묘사하고 한방 처방을 제시하도록 했다(자료 출처: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

문제에 따르면 이 환자는 "5일 전부터 고열이 지속됐고 맥삭(맥이 빠름)하다. 전신 경련과 함께 구토로 쓰러졌다. 목덜미와 혀가 뻣뻣해지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상태다. 모두 뇌염이나 뇌수막염처럼 중추신경계 감염이 일어났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패혈증 가능성도 있는 응급 상황이다.

그러나 한의학에서 제시한 적절한 '치법'은 청심개규(淸心開竅)와 청영투열(淸營透熱)이다. 대한한의학회 표준한의학용어집은 '온열병으로 인한 정신혼미를 치료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향 등으로 만든 한약을 처방한다. 의학계는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한약을 삼키게 하는 행위가 폐렴이나 질식사 위험이 크다고 지적한다.

의협 한방특위 "응급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한방치법을 고르게 해 진단과 치료가 지체돼 해당 환자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면서 "(이런) 한의학 교육을 받은 한의대생이 앞으로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다. 심각한 의료윤리 문제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개선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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