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재택의료 현장을 가다① 영화 '플랜75'가 보여준 현실
방문진료 중심 제도·전문화 거치며 영향력 확대
부정적 인식 해소하고 '간병 지옥' 부담 해결 과제

고령화 사회도 아니고 이제 초고령화 사회다. 의료와 돌봄도 그에 맞춰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그 해법을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화 사회를 맞닥뜨린 일본에서 찾기도 한다. 일찌감치 재택의료로 눈을 돌린 일본은 인구 감소, 의료비 급증, 간병 지옥 위기 속에서 실험을 계속 하고 있다. 청년의사는 분당서울대병원 초고령사회의료연구소 이혜진 교수와 함께 일본 재택의료 현장을 찾았다. 일본은 동네의원부터 연 매출 1,000억원대 기업까지 모두 각자 방식으로 재택의료를 하고 있다.

2025년 초고령화사회를 맞게 될 일본은 지역사회 재택의료로 활로를 찾고 있다. 일본 사회 고민을 담은 영화 '플랜75' 한 장면(사진 출처: 플랜75 공식 예고편).

[도쿄=고정민 기자] “75세 이상 국민 중 죽고 싶은 분은 국가가 지원합니다. 오늘 바로 문의하세요.”

가까운 미래 일본, 75세 이상 국민은 안락사가 권장된다. 공무원 안내에 따라 노인들은 죽을 날을 고른다. 안락사 확정자는 격려금 10만엔(약 95만원)을 준다. 더 고민해보겠다는 주인공에게 담당자는 마음이 바뀌면 알려달라고 한다. 정책 성과는 아주 좋다.

일본에서 지난 17일 개봉한 ‘플랜75(プラン75)’가 그리는 사회 모습이다. 장수대국을 자랑하던 나라가 국민에게 미래를 위해 죽길 권한다. 말도 안 된다는 혹평보다 ‘현실과 견줘보니 섬뜩했다’는 반응이 많다. 주인공이 ‘25’가 적힌 낡은 LP판을 꺼내지 않더라도 관객들은 오래전부터 일본 사회를 압박해온 ‘2025년 문제’를 떠올린다.

오는 2025년 일본 사회를 움직였던 베이비부머, 단카이 세대가 75세 후기고령자가 된다. 앞으로 3년 뒤 일본 국민 3명 중 1명은 고령층에 속한다. 일본은 유례없는 초고령화 사회를 앞뒀다. 그 뒤로 사망 인구가 속출하는 다사(多死)사회가 기다리고 있다.

생산가능인구는 부족한데 의료비와 연금 등 사회보장비용은 치솟고 있다. 2022년도 일본 정부 예산 107조5,964억엔(약 1,022조원) 중 33.7%인 36조2,735억엔(약 344조원)이 사회보장비다. 일반세출 증가분의 90%가 사회보장비다. 오는 2025년에는 의료비만 54조9,000억엔(약 520조원)이 필요하다. 부족한 세수를 충당하려면 나랏빚을 질 수밖에 없다. 일본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250%를 넘어 세계 1위다.

“2025년 문제에 대비할 병원이나 요양시설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노동력이 감소해 의료진도 부족하다. 지자체가 운영하는 저렴한 노인요양시설은 대기자가 넘친다. 앞으로 연간 3만명이 고립사한다는 추계도 있다. 사회 시스템 변혁이 필요했다."

일본사회사업대 복지매니지먼트연구소 쓰루오카 고우키 교수는 2025년을 앞두고 재택의료가 일본 의료체계 전면에 선 배경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의사로서 재택의료 전문가인 쓰루오카 교수는 수도권인 도치기현에서 방문진료 전문 진료소(의원급 의료기관)를 운영하고 있다.

현실에서 일본 정부는 '플랜75'가 아닌 지역포괄케어(커뮤니티케어)와 재택의료를 선택했다. 15년 전 단카이 세대 은퇴를 계기로 정년 제도를 바꾼 것처럼 보건·복지제도 구조 자체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오는 2025년까지 병상 20만개를 감축하고 의료와 돌봄을 병원에서 지역사회로 옮길 계획이다. 입원 진료에 따른 의료비 지출은 억제하고 지역사회 차원에서 의료와 복지 수요에 대응한다. 재택의료는 그 핵심이다.

일본 도쿄도 기요세시에 위치한 일본사회사업대학 쓰루오카 고우키 교수는 재택의료가 '2025년 문제'로 대표되는 사회보장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적 재택의료 발전 30년…제도 고도화하고 전문성 강화

일본에서 현대적 관점의 재택의료가 시작된 건 1990년대다. 1986년 방문진료가 의료보험에 포함된 뒤 이를 전문으로 하는 재택의료기관이 등장했다. 환자가 부르면 가는 왕진과 달리 한 달에 2~3회씩 정해진 시간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게 기본이다. 지역 내 동료 의사나 간호사는 물론 약제사, 물리치료사와 협업도 중요해졌다.

지난 2000년 개호보험이 신설된 후로 의료와 개호를 연계하는 케어매니저 역할이 대두됐다. 개호보험은 한국의 노인장기요양보험에 해당한다. 방문간호와 재활, 요양지도는 기본적으로 개호보험에 포함된다. 의료시설과 개호시설이 협력관계를 맺거나 재택의료팀이 꾸려졌다.

일본이 단카이 세대 정년제 개혁을 추진하던 지난 2006년, 재택요양지원진료소(在宅療養支援診療所)도 제도화됐다. 재택요양지원진료소는 365일 24시간 방문진료와 왕진이 가능한 재택의료서비스 의료기관이다. 방문간호에 필요한 의료지시서 발급도 담당한다. 지난 2008년에는 병원급으로 확대됐다.

후생노동성 의료시설조사에 따르면 지난 2020년 기준 병원 65.3%, 진료소 34.3%가 의료보험에서 보장하는 재택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2014년 이후 재택의료를 실시하는 진료소는 2만여 곳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개호보험과 연결된 방문간호 스테이션은 1만2,000여 곳이다.

재택의료 이용자도 증가했다. 방문진료 환자는 재택의료가 처음 도입된 지난 2006년 19만8,166명을 시작으로 2019년 79만5,316명까지 늘었다. 오는 2025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재택의료 이용자의 90% 이상이 75세 이상 후기고령자다.

의료계도 재택의료 전문성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과 커리큘럼에 재택의료가 포함됐고 지난 2010년부터 일본재택의료연합학회가 재택의료 인정 전문의를 배출하고 있다. 쓰루오카 교수가 운영하는 진료소에도 각 지역에서 의대 실습생들이 찾아와 지도받고 있다.

코로나19·존엄사로 재택의료 위상 강화…사업 모델 다변화

도쿄에서 노인 인구가 많은 주거지역은 '재택의료(在宅医療)' 글자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방문진료 의사가 주택가에 세워둔 방문진료 전용 차량.

지난 1~2년 사이 재택의료 입지는 달라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이다. 일본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등장 이전부터 확진자 재택치료(자택요양)를 시행했다. 병상 부족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이미 갖춰진 인프라가 있어 가능한 선택이기도 했다. 면회 제한으로 병실에 혼자 남겨지자 자의 반 타의 반 퇴원해 재택의료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존엄한 죽음'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이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2017년 후생성 인식 조사에서 국민 69.2%가 집에서 임종을 맞고 싶다고 답했다. 재택의료가 그 기회를 제공한다. 10%까지 떨어졌던 '재택사' 비율은 지난 2020년 15.7%를 기록하며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다. 완화의료 기능을 강화한 재택완화케어충실진료소(在宅緩和ケア充実診療所)도 늘고 있다.

재택의료 시장이 커지면서 다양한 모델이 등장했다. 재택의료기관 70% 이상이 1인 진료 체제다. 365일 24시간 대응해야 하는 기준을 충족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병원이나 대형 클리닉에 심야나 응급진료를 맡기는 진료소가 늘고 있다. 퇴원 환자를 인계 받기도 한다. 쓰루오카 교수가 운영하는 진료소처럼 소규모 진료소끼리 연합하는 경우도 있다. 정부도 가산 수가를 주며 독려하고 있다.

대규모 사업체도 진출했다. 재택형 의료병상 개념을 도입해 한국에도 알려진 암비스홀딩스(アンビスホールディングス)가 대표적이다. 재택 기능을 갖춘 요양시설과 지역 내 방문진료의사를 연계한 '이신칸(医心館)' 모델을 중심으로 150억엔(약 1,450억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다.

재택진료 현황 기대 못 미쳐…부정적 인식, 간병 문제 풀어야

그러나 전체적인 재택의료 상황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실제로 '365일 24시간' 운영하는 재택의료 기관은 극소수다. 유의미한 규모로 재택의료를 하는 곳도 적다.

일본의사회 종합정책연구기구가 지난 2017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재택의료시설 1곳 당 평균 재택의료(방문진료) 환자 수는 32.4명이다. 5명 이하인 시설이 전체 32%를 차지한다. 100명 이상을 담당하는 곳은 6.8%에 그쳤다.

부정적인 인식도 발목을 잡는다. 제도 도입 초기인 지난 2008년 후생성 재택의료추진실 조사에서 일본 국민 60%가 재택의료를 이용했다가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할까봐 걱정된다고 대답했다. 제때 병원 입원이 어려울 거란 응답도 30%였다.

약 15년이 지났지만 인식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대다수 일본 국민이 재택의료하면 암 말기 환자 대상 완화의료만 떠올린다. 재택의료 전문가들이 제도보다 인식 개선이 우선이라고 하는 이유다.

쓰루오카 교수는 “휴대 장비와 ICT 기술이 보급되고 전문과 연계가 강화돼 재택의료도 수술 외 대부분 진료를 병원과 동일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됐다"며 "'병원에 가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국민 인식이 바뀌도록 하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간병 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다. 병상과 재원 기간 축소로 의료비 감소 효과를 볼지 몰라도 재택환자 간병에 드는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지적이다. 가계가 흔들리고 온 가족이 고통받는 '간병 지옥'은 2025년을 앞둔 일본 사회에 드리운 또다른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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