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대 은퇴한 허준용 교수, 1년 전 인제군 보건소장으로 새출발
부임 후 가장 먼저 '여성의학과’ 설립…“분만취약지에 거점병원 있어야"

최근 강원도 홍천의 한 임신부가 양수가 터져 서울 시내 산부인과로 가던 중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출산하는 일이 발생했다. 태아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는 긴급한 상황이었지만 분만 가능한 산부인과가 집에서 1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던 그들로서는 대도시로의 '원정출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구급차 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한 때 호흡이 없었지만 구급대원의 침착한 처치로 무사히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강원도 홍천의 경우 분만취약지로 지정된 곳이다. 보건복지부는 분만실까지 접근이 60분 내로 가능하지 않은 가임인구 비율이 30% 이상이면서 분만실까지 60분 내 이동해 의료서비스를 이용한 비율이 30% 미만인 지역을 분만취약지로 지정하고 있다. 지난 2011년부터 분만취약지 지원 사업을 통해 지역 병원에 분만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 등을 설치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지만 대도시 대형병원들조차 구하기 어려운 산부인과 의사를 지역의 작은 병원들이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인제군의 사정도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제 지역 여성들은 천군만마를 얻었다. 지난해 3월 인제군 보건소장으로 산부인과 명의인 고대구로병원 허준용 교수가 취임한 것이다. 허 소장은 국내에 자궁경부암 복강경 전자궁 절제술을 소개하고, 대한산부인과학회 자궁내막증 연구회장 등을 역임한 부인과 분야 명의이다.

정년퇴임한 허 소장이 인제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의료봉사 때 알게 된 한 간호사 때문이다. 주말마다 옆에서 도와주던 간호사가 6년만에 우연히 연락이 닿았는데 병원에서 수술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허 소장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간호사는 다행히 허 소장의 권유로 고대구로병원에서 복강경수술을 받고 완치됐다.

허 소장은 "매년 자궁경부암 검사를 했다면 초기에 발견할 수 있었는데 조기진단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춘천까지 가서 검진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방에서 여성암 조기진단에 일조하고 싶은 생각에 보건소장에 지원하게 됐다고 했다.

이에 허 소장은 취임 후 가장 먼저 보건소에 '여성의학과'를 개설했다. 부인과 정밀검진을 받기 위해 춘천까지 가야했던 이 지역 주민들로서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고. 지난해 12월까지 인제군 보건소 여성의학과를 찾은 환자들만 730여명에 달한다.

곧 취임 1년이 되는 허 소장은 청년의사와의 인터뷰에서 “공무원 사회에 적응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리까지 하느라 1년은 정말 정신없이 보냈다"며 "하지만 (인제군을 선택한 것에)매일매일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 인제로 온 지도 1년이 다되어 간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벌써 한 해가 되어간다. 33년 동안 대학에서 생활하다 공무원 사회에 들어와 적응하는 게 쉽진 않았다. 군대에 가면 모든 게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대학에 있을 때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여기는 30분을 외출하려고 해도 시스템에 입력을 해야 한다. 출결사항이 정확하다보니 꼭 군대에 온 것만 같다. 더욱이 4월 개소한 여성의학과를 본궤도에 올려놓는 것과 지역사회에서 코로나19를 관리하는 일까지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느라 정신 없이 보냈던 것 같다.

- 인제군보건소 최초의 의사 출신 보건소장이라고 들었다. 정년 퇴임 후 분만취약지 보건소장을 결심한 이유가 궁금하다.

시골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영화 ‘집으로’의 배경인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의사생활을 하셨다. 그 때 아버지가 진료하시는 것을 보면서 농촌의 생활이나 의료 환경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인제군과는 인연도 깊다. 지난 2005년부터 여러 취미 활동을 하면서 사진을 찍으러 곰배령에 왔었는데, 그 때 우연한 계기로 교회의 요청을 받아 주말마다 인제군에 의료봉사를 왔다. 그 때 봉사를 도와주던 인제군 출신 간호사를 알게 됐는데, 봉사가 끝난 후 6년간 연락이 끊겼다 우연히 연락이 닿았다. 자기가 자궁경부암 2기 말인데 대학병원에 가니 수술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하더라. 고대구로병원에서 진료 받을 것을 권유했고, 다행히 복강경수술을 받고 완치됐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는 충격적이었다. 2년에 한번 자궁경부암을 검사했다면 초기에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호사로 일하고 애를 키우면서 춘천까지 가서 검진하기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암의 조기발견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그 때의 경험이 인제군 보건소장에 지원하고 여성의학과를 설립하는데 큰 동기가 됐다.

- 여성의학과 개소가 인제군에서는 최초라고 들었다.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산부인과는 문진을 통한 병력 청취와 초음파 검사로 질환의 70~80%는 진단이 되기 때문에 초음파 검사장비가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학병원에서 쓰는 1억5,000만원 상당의 초음파 장비를 들였다. 4월 말 개소한 이후 12월 말까지 약 73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의미있는 성과도 있었다. 자궁경부암을 진단하기 위해선 세포진 검사, 인유두종 바이러스(Human Papilloma Virus, HPV) 검사를 받아야 한다. 보건소에서 진행한 검사를 통해 자궁경부암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자궁경부 상피내 종양(Cervical Intraepithelial Neoplasia, CIN)을 발견했고, 이후 환자에게 대학병원의 정밀검사와 조기치료를 권한 적이 있다.

또 불임과 생리통을 치료 받으러 온 30대 초반 자궁내막증 환자가 있었는데 전공 분야가 자궁내막증이라 내시경을 하지않고도 초음파를 통해 자궁내막증임을 진단할 수 있었다. 강원대병원에서 정밀검진 결과 자궁내막증 3기로 진단됐다. 수술 후 환자의 보호자에게서 감사의 전화를 받았다.

- 인제군은 분만취약지이기도 하다. 분만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분만병원이 없는 것은 정말 문제다. 보건소에서도 애를 받을 수 있지만 여러 응급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분만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산후출혈인데, 5분 안에 약 2,000cc의 혈액이 쏟아지더라도 지금의 환경에서는 지혈을 할 수가 없다. 그 외에도 난산, 태아 곤란증 등의 상황에선 제왕절개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수술방, 마취과 의사, 장비 등이 필요하다. 산부인과 의사 하나로는 절대 안된다. 하지만 지방에는 병원이 없다. 도시에서는 119를 부르면 30분 내 대학병원에 도착하겠지만, 인제군의 경우는 큰 대학병원으로 가려고 해도 춘천까지 1시간 30분이 걸린다.

때문에 코로나19 전담병원을 세우는 것처럼 분만도 거점병원을 만들어야 한다. 몇 개 군이 공통으로 갈 수 있는 교통지에 분만 거점병원이 있다면 주위에 3~4개의 군에서 분만환자를 받을 수 있다. 거점병원을 지역 곳곳에 세워두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재원의 경우 출산장려정책에 소요되는 예산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의료인력도 부족하다고 들었다. 더 많은 의사들이 분만취약지로 발걸음 하기 위해 어떤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보나.

도시가 아닌 지방이라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의사들의 급여 문제다. 도시에 있으려는 의사들을 부르려면 적어도 도시에 있을 때 만큼은 보장이 돼야 한다. 수익을 보장해주고 관사 제공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조건을 갖춰준다면 소신있는 의사들이 많이 올 것이다. 욕심을 더 부린다면 거점병원에서 분만사고 발생 시 정부가 이를 전액 보장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소신있는 의사들이 안 올 이유가 없다.

강원도 인제군보건소에서 지난해 4월 개소한 여성의학과는 1억5,000만원 상당의 초음파 장비를 갖춰 대학병원 산부인과 진료실과 다를 게 없게 꾸몄다.(사진제공: 허준용 소장)
강원도 인제군보건소에서 지난해 4월 개소한 여성의학과는 1억5,000만원 상당의 초음파 장비를 갖춰 대학병원 산부인과 진료실과 다를 게 없게 꾸몄다.(사진제공: 허준용 소장)

- 보건소장으로서 코로나19로 인한 업무에도 정신 없었을 것 같은데 일반진료에 공백은 없었는지.

인제군의 경우 확진자가 생길 때마다 전 직원이 동원되긴 했지만 다행히 일반진료나 건강증진업무를 전부 중지하는 상황까진 가진 않았다. 하지만 공중보건의사들이 생활치료센터나 백신접종센터로 파견돼 보건지소에 의사가 없는 상황이 종종 있었다. 그런 경우 약을 타러 온 고혈압 등 만성질환 환자들은 처방을 받을 수 없어 약을 못 받아가곤 했다. 또 멀리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온 노인들이 물리치료를 받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보름이나 한 달 정도로 장기처방을 내려 의사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환자가 그 처방으로 치료를 받고 약을 탈 수 있도록 했다. 지방에는 보건지소가 전부인 주민들도 많기 때문에 그런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보의가 원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지만 코로나19 상황이라 어려웠다.

- 코로나19를 계기로 보건소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지역에서 보건소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점이 있다면.

코로나19 이후 보건소의 가장 큰 문제는 인력 부족이었다. 역학조사 인력이 굉장히 많이 필요하다. 확진자의 동선을 따라 밀접접촉자를 찾아서 역학조사반이 CCTV도 봐야 하고, 만난 사람들도 밀접접촉인지 아닌지 분류해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평소에 인력 풀(Pool)을 만들어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코로나19와 같은 응급사태가 발생했을 때 중앙에서 즉각 예비군처럼 인력을 동원해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건강증진사업은 이미 제도가 정립됐다고 생각한다. 인제군의 경우는 오히려 도시보다 치매관리사업, 정신건강보건사업 등이 더 잘 되고 있다. 보건소 인력이 직접 환자를 관리하고 입원 절차를 도와주거나 의사를 소개 시켜주는 등 이런 부분은 오랜 기간 동안 많이 개선돼 왔다.

보건소도 최근 체제개편을 통해 과들을 늘려 시스템을 더 확충하려고 하고 있다. 인제군의 경우, 예전에는 1개 과에서 모든 업무를 총괄했는데, 지난해 4월부터 과를 2개로 나누어 1과는 보건행정, 2과는 건강증진 업무를 맡고 있다. 앞으로 체제가 더 커져 보건소의 기능이 공고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의료취약지 보건소에서 일하는 것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사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의사들이 새로운 면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길인 것 같다. 욕심만 조금 버리면 보람을 찾을 수 있고 시야도 넓어진다. 의대에서 배우지 못했던 공공의료의 현실 등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고, 하기에 따라 자신의 꿈을 충분히 펼칠 수도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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