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청소년 완화의료 시범사업 5년차…전국 9개 기관 참여
투병기간 긴 소아환자, 안정적으로 나갈 수 있는 환경 마련돼야
연세암병원 권승연 교수 “의료진들, 완화의료에도 관심 가져야”

흔히 완화의료라고 하면 치료를 중단한 임종 환자의 평온하고 존엄한 마지막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는 완화의료도 있다. 바로 ‘소아청소년 완화의료’가 그것이다.

소아청소년 완화의료서비스란 암 뿐만 아니라 심장, 신장, 대사, 신경근육질환, 미숙아 등 다양한 질환을 대상으로 심각한 상태에 있는 소아청소년 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돌봄 서비스까지 제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소아청소년 완화의료의 싹이 이제 막 움트기 시작했다. 첫 씨앗을 뿌린 사람은 연세대 간호대학의 황애란 교수다.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통해 소아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호스피스의 중요성을 깨달은 황 교수는 지난 2002년 세브란스병원 호스피스실에서 가족상담사로 활동하며 국내 3차 병원에서 최초로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는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김민선 교수에 의해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지난 2013년 서울대어린이병원 사업 공모에 김 교수가 제안한 소아청소년 완화의료가 선정돼 지난 2014년 1월부터 전담팀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2018년 7월부터 서울대어린이병원과 세브란스병원을 시작으로 ‘소아청소년 완화의료 시범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2022년 1월 기준 전국 9개 병원이 소아청소년 완화의료 시범사업에 참여하며 의료계 뿌리내리기에 노력하고 있다.

연세암병원에서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를 담당하는 소아혈액종양과 권승연 교수는 “내일을 바라보기 위해 오늘을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너무 극심하다면 의료를 통해 늘어난 시간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없다”며 “소아청소년 완화의료의 목표가 늘어난 시간을 삶으로 만들어주는데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서울대어린이병원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 '꿈틀꽃씨' 쉼터
서울대어린이병원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 '꿈틀꽃씨' 쉼터

환자와 가족의 삶, 모두를 끌어안는 ‘소아청소년 완화의료’

말기암 등 임종기에 가까워졌을 때 받을 수 있는 성인 완화의료와 달리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는 진단명, 병의 진행 단계와 관계없이 언제든지 이용 가능하다. 최근 의료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소아청소년 환자들의 생존율은 높아지고 있지만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소아중증질환의 특성상 강도 높은 치료와 예후의 불확실성, 장기간의 치료와 간병으로 인해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세암병원 권승연 교수는 “불과 10~20년 사이에 중환자의학, 보조요법, 기계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예전에 비해 아이들은 어떻게든 생존할 수 있게 됐다”며 “그러다보니 여러 가지 의료장비를 달고 살아가거나 계속 보존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완화의료의 내용은 환자와 가족의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 과정에서 환자에게 최선의 의료가 무엇인지에 대해 주치의, 그리고 가족과 함께 상의하고 결정하는 ‘공동의사결정지원’을 하게 된다.

또 진통제 등을 이용한 통증 조절과 환자의 질환에 따른 증상 조절 등의 의학적 처치를 시행해 투병중인 환자의 삶의 질을 개선시키며, 심리적인 지지와 함께 놀이치료·미술치료 등을 통해 치료과정에서 오는 우울감이나 불안감을 해소해준다.

더불어 양육 및 돌봄에 매진하는 보호자들에게 쉼을 지원하고, 자칫 소외될 수 있는 환자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상담을 통해 그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 짐을 덜어준다.

환자가 투병 끝에 임종한 경우에도 사별 돌봄을 제공해 정상적인 애도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상담을 연계해 남은 가족들이 환자에 대한 기억을 마음속에 안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걸음 더 내딛은 청소년·청년 완화의료와 리스파이트케어

더욱이 병원들은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를 발전시키기 위해 완화의료의 대상을 더 확장하거나 가족의 돌봄 소진을 해소하기 위한 센터 개설 등을 준비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은 최근 청소년·청년 완화의료 도입을 위해 인력을 충원했다. 오랜 투병 기간으로 부모로부터 온전히 독립하지 못한 청년들에게도 심리적·다학제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병원의 특성상 젊은 암 환자가 많아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에서 성인 환자들도 담당하고 있다”며 “성인이지만 부모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본인이 의사결정을 못 하는 부분들도 많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청년기는 여러 가지 다양한 고통이 더 얹어지는 시기다. 사회적 성취를 쌓아야 하는 시기인데 남들보다 늦어진다는 불안감 등으로 고민도 크다”며 “하지만 이를 관심있게 볼 인력이 부족해 최근 이들을 담당할 간호사도 채용했다”고 했다.

서울대어린이병원은 보건복지부, 넥슨재단과 함께 올해 5월 개소를 목표로 ‘어린이 완화의료센터(가칭)’ 설립을 시도하고 있다. 국내 최초로 도입되는 ‘리스파이트케어(Respite Care, 단기의료돌봄) 센터’다.

이 센터에서는 24시간 가족의 돌봄이 필요한 중증소아청소년환자들이 단기적으로 보호자 없이 의료진들의 의료적 처치를 받을 수 있다. 총 16개의 병상이 도입될 예정이며, 보호자 없이 1회 6박 이하, 연간 최대 14일을 머물 수 있다. 돌봄에 매진하는 보호자와 가족에게 한 숨 돌릴 틈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대어린이병원 소아청소년과 김민선 교수는 “계속 석션을 해야 하거나 경관급식을 해야 하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365일 24시간 사실상 휴가도 없이 돌봄에 매진하고 있다”며 “부모들은 자기가 잘 돌보지 못하면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육체적·정신적 소진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24시간 의료진이 상주하게 되면 막대한 운영비가 들어가는 만큼 수가 신설 등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서울대병원 내에서도 리스파이트케어 센터 설립에 대한 이견도 있었다. 이에 김 교수는 리스파이트케어 센터가 전국에 보급될 수 있도록 모델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김 교수는 “복합적인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아이들이 입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료인력이 많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또 보호자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을 돌볼 간호사들도 필요하다”며 “현재 복지부와 의료 수가 신설에 대해 고민하고 기부금 모금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서울대병원 내에서도 최첨단 의료만 해도 버거운데 리스파이트케어까지 해야겠냐는 고민도 많았다. 하지만 다른 의료기관이나 복지시설에선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며 “기부금 모금, 수가 신설, 돌봄에 대한 표준 프로토콜 등을 만들어 여러 지역에 보급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 가겠다”고 했다.

증가하는 환자 수와 턱없이 부족한 의료진

문제는 인력이다. 소아청소년 완화의료서비스 의뢰 건수가 증가하고 있지만 이를 제공할 수 있는 의료인력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소아청소년 환자의 경우 투병기간이 길기 때문에 완화의료를 안정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환경 마련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연세암병원 권승연 교수는 “시범사업에 따르면 완화의료팀의 필수인력은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각 1명이다. 하지만 대상자들이 30~40명씩 되기 때문에 셋이서 환자의 어려움을 따라가기 굉장히 어렵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도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며 “환자들의 투병기간은 적어도 6~7개월에서 대개는 4년까지 가는데 환자 가족을 잘 알고 있는 인력이 계약으로 인해 바뀌는 경우가 굉장히 힘들다”고 했다.

서울대어린이병원 김민선 교수도 “환자 가족들에게서 ‘완화의료팀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지 너무 두렵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며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인력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그 힘든 시기에 더 잘 챙겨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아쉬운 점들이 많다”고 했다.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를 의료계에 뿌리내리려면?

소아청소년 완화의료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의료진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를 위해 의료진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정부의 병원 평가에서 완화의료에 대해 가산점을 부여해 병원 내에서도 완화의료의 중요성을 고취시켜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연세암병원 권승연 교수는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는 주치의에게 환자나 가족의 삶의 질에 대한 부분까지 맡길 수는 없다”며 “때문에 이를 도와줄 수 있는 팀이 있어야 하지만 이에 대한 (의료진의)인식이 적은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권 교수는 “최근에 의료진들 생각도 달라지고 있고 조금씩 관심을 가져주고 있지만 아직 다 바꿀 수는 없다”며 “일단 생명을 살려야 그 다음에 삶의 질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도 가지만 그 이면을 보기 위해선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완화의료는 생명에 직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 옵션으로 여겨진다”며 “정부에서 완화의료를 하는 의료기관에 대해선 가산점을 주는 방식을 도입해 완화의료가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