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공·남수단에서 활동한 국경없는의사회 이효민·최용준 전문의
이효민 “중아공도 코로나 예방 위해 출입구 통제하고 위생 관리”
최용준 “코로나 외에도 의료구호 수요 꾸준…감염관리 더 필요”

무력 분쟁, 전염병, 자연재해 등으로 위협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구호 활동을 펼치는 단체가 있다. 바로 ‘국경없는의사회’다. 국경없는의사회의 구호활동가들은 세계 분쟁 지역을 누비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다.

최근 국내에서도 구호활동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국경없는의사회가 구호 현장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국경없는영화제' 때문이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올해로 5회를 맞이한 국경없는영화제를 지난달 12일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개최했다. 배우 김성령씨가 사회를 맡고, 국경없는의사회 티에리 코펜스 한국 사무총장이 환영사를 했다. 개막작으로는 ‘에고이스트: 이기심과 이타심의 경계’가 상영됐다.

그리고 이효민 전문의(마취통증의학과)와 최용준(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현장 토크를 통해 해외를 누비며 환자를 치료하는 구호활동가들의 모습을 소개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를 덮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도 이들의 구호 활동을 막지는 못했다. 이효민 전문의는 지난 4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중아공),으로 떠나 2개월 동안 지구 반대편에서 환자들을 치료했으며, 최용준 전문의는 2월부터 8월까지 총 6개월 동안 남수단에서 구호활동을 펼쳤다.

이효민 전문의는 서울의대를 졸업한 후 서울아산병원을 거쳐 한림대성심병원에서 조교수로 근무하던 중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면서 동시에 의사로서 배운 것을 수행할 수 있는 게 없는지 고민하다 국경없는의사회의 문을 두드렸다고 했다. 지난 2012년 나이지리아를 시작으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필리핀, 남수단, 파키스탄, 중아공, 콩고민주공화국, 라이베리아 등 9년 동안 13번의 구호활동에 나선 그야말로 베테랑 활동가다.

중학생 시절부터 의료 구호활동가의 꿈을 간직한 채 의대에 진학했다는 최용준 전문의는 서울아산병원에서 전임의로, 소아청소년과의원에서 약 2년 동안 근무한 뒤 올해 처음으로 떠난 남수단에서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오던 꿈을 이뤘다고 했다.

한국에 있어도 위험하다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베테랑 활동가와 이제 첫 발걸음을 뗀 신입 활동가가 지구 반대편의 더 위험한 지역에서 어떤 구호 활동을 펼치고 왔는지 들어봤다.

(왼쪽부터)국경없는 의사회 이효민 활동가, 최용준 활동가
(왼쪽부터)국경없는 의사회 이효민 활동가, 최용준 활동가

- 의사에서 구호활동가로 변신한 계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 구호활동가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효민 :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며 의사로서 살아오던 중 의사로서 배운 것을 실천하며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국경없는의사회를 찾았고, 구호 활동을 하다 보니 너무 즐거웠다. 현장에서의 모든 순간이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있다 보면 해외로 나가고 싶어진다. 결국 나의 즐거움을 위해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다. 중독되는 것 같기도 하다.

최용준 : 중학생 때 문득 ‘내가 죽을 때 어떻게 해야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계속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 바로 의료 구호활동가였다. 그래서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가 세워지기 전부터 구호활동가 지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현실적인 고민도 많았다. 남들은 부동산, 주식에 몰두하며 달려가고 있을 때 나 혼자서 반대로 가는 것 같았다. 어쩔 땐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서 안쓰러운 인생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하지만 꿈을 가졌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의대를 졸업하고 전문의가 될 때까지 꿈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름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 꿈이었다고 하더라도 막상 현장에서 활동하게 되면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괜히 선택했나 후회한 적은 없는지.

이 : 아프리카 나라들의 절대 빈곤이나 열악한 의료시설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환자를 치료해 주는 것이 정말 도움이 되는 건지 고민이 되더라. 몇 번의 구호활동에 나선 후 내린 결론은 '내 앞에서 죽어가는 환자는 살리고 보자는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자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하지만 지난 2014년 남수단에 갔을 때 내전 중이라서 현지 상황이 매우 위험했었다. 원래는 자체 숙소와 클리닉에서 지내는데 그 때는 UN 군사캠프 안에서 지낼 정도였다. 매일 총과 폭탄 소리를 들으면서 벙커로 대피하는 생활을 한 달 정도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래서 기간을 줄여달라고 요청하고 일찍 귀국한 적도 있다.

최 : 현장에서는 검사도구, 진단도구, 치료약 등이 부족하다. 그런 상황에서 안타깝게 환자를 잃는 경우가 많아 무력감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없어선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노력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역문화충격을 느끼곤 했다. 남수단에서 친하게 지내던 신생아 병동 간호사가 있었다. 그 간호사는 현지인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왔었는데, 갑자기 밤에 총을 든 남자들이 이방인이 왜 여기 있느냐, 나가라고 위협했다더라. 국경없는의사회 리포트에서도 지난 10년 동안 남수단 현지 직원 24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주변을 보면 다들 미래를 꿈꾸고 사는데, 세계 반대편에선 언제든지 비명횡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여러 감정이 들었다.

현지 의사들 성장 모습 보며 보람 느끼는 구호활동가들

- 반대로 기쁘거나 감동을 느낀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이 : 지난 2019년 중아공에서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했는데, 태아의 체위가 이상하게 돼 있어서 수술이 오래 걸렸다. 간신히 아기를 꺼냈는데, 숨을 안 쉬었다. 20~30분 동안 심폐소생술을 해서야 살릴 수 있었다. 열흘 후 회진을 도는데, 소아청소년과 동료가 그 아기를 보여주며 오늘 퇴원한다고 전해줬다. 너무 기뻐 같이 사진도 찍었다.

중아공 밤바리에서 같이 일했던 현지인 간호사를 눈여겨보다가 국경없는의사회 마취과 트레이닝 프로그램에 추천했다. 올 봄에 다시 갔을 때는 그 간호사가 프로그램을 마치고 마취과 간호사로서 나와 함께 일하기도 했다. 내가 트레이닝한 현지 인력의 성장을 목격하는 것도 큰 기쁨이다.

최 : 환자가 잘 회복돼서 퇴원하는 것이 제일 기쁘다. 남수단에서 봤던 환자 중 영양실조에 걸린 신생아가 있었다. 수유를 하고 아이의 상태를 안정시키고 나서 왜 이렇게 됐는지 물어보니, 아이 어머니도 영양실조에 걸려 모유가 말랐다고 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선 모유가 마르면 신생아들은 죽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후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살이 붙고 회복해서 퇴원하는 것을 보면서 무척 행복했다.

지난 2016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수술팀에 참여한 이효민 활동가(사진제공: 국경없는 의사회)
지난 2016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수술팀에 참여한 이효민 활동가(사진제공: 국경없는 의사회)

- 두 선생님 전공이 마취통증의학과와 소아청소년과다. 현지에서 각각의 전공을 활용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 : 아직까지 일반의로 일한 적은 없다.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로서 주로 수술을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한국에서는 (안전은 물론) 환자가 편안함을 느끼는 방향으로 마취를 한다. 하지만 현장에선 수술 직후에 환자를 케어할 만한 인력이 없기 때문에 수술 후 환자가 가장 안전하고 뒤탈이 없는 방법을 최우선으로 한다.

국제 활동가들의 경우 치료도 하지만 현지 의료인을 트레이닝하는 역할을 주로 하게 된다. 국경없는의사회 아니면 교육을 받을 만한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또 계속해서 외부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해줄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현지 의료인을 교육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최 : 남수단에선 2차 병원에서 일했는데 소아의 인구가 50%가 넘기 때문에 신생아부터 미숙아, 청소년 환자들이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없기 때문에 소아들을 직접 진료하고 또 현지 의료 인력의 자문의로서 활동했다.

-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출국이 매우 어려웠다. 해외로 구호활동에도 지장이 있었을 것 같은데.

이 : 원래 작년 4월에 중아공으로 가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당시 비행기가 한대도 없어 출국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예외적으로 군비행기를 타고 현지로 간 경우도 있지만 쉽지 않다. 올해는 작년보다 상황이 좋아져서 크게 걱정은 안됐지만 출입국 절차가 매우 번거로웠다. 출국한 후 귀국할 때까지 PCR 검사만 6번을 한 데다 한국에 와서는 2주간 자가격리까지 해야했다.

최 : 출국 이틀 전에 PCR 검사를 했는데, 양성이 뜨면 일정이 다 꼬일 수 있어 걱정되더라. 실제로 남수단에 오기로 한 외과의사가 있었는데 출국 직전에 양성 판정을 받아서 결국 못 왔다. 다시 인원을 보내려면 3주 정도 걸리기 때문에 현지에 있던 다른 외과의사에게 활동 기간을 한 달만 연장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코로나19 백신 구하기 하늘의 별따기'였던 저소득 국가들

- 당시 현지의 코로나19 상황과 방역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이 : 지난 2월에 브리핑을 받을 때만 해도 중아공에선 코로나19가 심각하지도 않고 현지인들도 신경을 덜 쓴다고 들었다. 현지인들에겐 코로나19보단 말라리아, 결핵, 에이즈, 콜레라 등의 질병이 더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국하기 2~3주 전부터 확진자가 늘어났고, 급기야 정부에서 저녁 8시 이후 이동을 제한했다. 병원에서도 출입구를 한 군데로 통제하고, 그 앞에 손을 씻을 수 있는 비누와 물을 뒀다. 나름대로 방역조치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원 중에 확진자가 발생해 격리 조치를 하기도 했다. 두 달 남짓 코로나19와 함께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최 : 남수단도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현지에 간 순간부터 확진자가 급증했다. 우리도 팀원 중에 확진자가 생겨서 격리를 해야했다. 하지만 개별 공간이 없는 곳이기에 매우 힘들었다. 또 현지인들과도 문제가 발생했다. 현지인 중 일부는 외국 사람이 코로나19를 퍼뜨린다고 생각하더라. 그래서 산책 중에 현지인에게 위협을 당한 적도 있다.

- 중아공, 남수단 둘 다 저소득 국가다보니 백신을 구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 현지 백신 상황은 어땠나.

이 : 입국하는 날 중아공에도 최초의 백신을 실은 비행기가 도착했다. 현지에서는 초저온 냉동고로 백신을 이송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스트라제네카가 들어왔는데 그 때 도입된 물량의 경우 군인, 경찰부터 접종이 이뤄졌다. 지난 6월부터 국제 활동가들에게도 접종 기회가 돌아왔다.

최용준 : 남수단도 5월에 백신이 들어왔다. 당시 코백스에서 기증받은 14만 도즈가 들어왔었는데 알고 보니 그 백신들의 유통기한이 2달이었다고 하더라. 우리나라라면 행정 명령으로 백신을 어떻게든 나눠줬겠지만, 남수단은 그런 행정력이 없다. 게다가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접종할 것인지로 분쟁이 심했다. 전량 폐기될 거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다행이 절반은 쓸 수 있어서 7만 도즈를 사용했다고 하더라. 지난 7월 아국 지방에도 백신이 들어왔는데, 코로나19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 위주로 먼저 접종이 이뤄졌다.

- 현지에서 같이 일하던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코로나19가 화제였을 것 같다.

이 : 활동가들이 모이면 늘 코로나19 얘기가 화제였다. 자기 나라의 코로나19 상황을 공유하기도 하고 백신 접종 얘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주로 선진국에서 온 동료들과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현장에는 콩고, 코트디부아르 등 아프리카에서 온 활동가들도 있었는데, 그 분들과는 코로나19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 나라들은 코로나19보다 에볼라 등 다른 질병이나 자연재해가 훨씬 더 심각하다. 그 때도 콩고에서 큰 화산이 폭발했는데, 콩고 출신 활동가가 코로나19보다 화산으로 인한 자기 가족의 안위를 더 걱정하더라. 활동가 사이에서도 출신국가의 빈부 차이로 코로나19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최 : 아프리카 활동가의 경우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이 아니면 고국에서 백신 접종은 꿈도 못 꾼다는 얘기도 있었다. 출신국가에 따른 코로나19에 대한 인식이나 격차가 존재했다.

2021년 남수단 미션에 참여한 최용준 활동가(사진제공: 국경없는 의사회)
2021년 남수단 미션에 참여한 최용준 활동가(사진제공: 국경없는 의사회)

"코로나19 백신 격차 벌어져선 안돼…특허면제 필요"

- 화이자가 저소득국가에게 백신 생산량의 0.1%만 공급하는 등 소위 말하는 ‘백신 갑질’을 하고 있다는 시민단체들의 주장이 있었다.

이 : 다국적 제약사들이 백신을 만드는데 투자한 비용이나 노력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윤을 남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화이자의 천문학적인 이익을 생각해보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이렇게까지 이득을 볼 일인가 싶다. 한 쪽에서는 부스터샷을 맞고 있는데, 다른 쪽에선 1차 접종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은 백신이 불공평하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프리카나 인도 같은 나라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다면, 코로나19는 계속 퍼져나가고 새로운 변이종도 출현할 수밖에 없다. 다국적 제약사와 일부 선진국이 백신을 움켜쥐고 있으면 점점 악순환이 심각해 질 것이다.

최 : 코로나19 백신 개발은 어떻게 보면 인류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에 따른 공적 원조나 재정적 지원이 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백신 자체가 온전히 그 사기업의 결과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발명품이나 생산품도 기초 의학을 따지고 들어가면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쌓아왔던 학문의 상아탑에 조약돌 하나 더 얹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이득이 온전히 사기업에게 집중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도, 인류애적으로도 백신 격차가 이렇게 벌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만큼은 특허를 면제해야 한다.

-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에 관심은 많지만 망설이고 있는 의사들도 많을 것 같다. 한 말씀 부탁드린다.

이 : 해외든 한국이든 상관없이 가장 필요한 건 자신의 전문적인 능력이다. 본인이 일을 할 때 편안함을 느낄 만큼 충분한 실력을 쌓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외국어를 잘 하거나 적응력이 높다면 본인이 훨씬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언제든지 문을 두드려 달라.

최 : 의대에 입학하고 의사의 길에 들어섰을 때 누구나 한 번쯤 의료구호활동가가 되는 것을 꿈 꿔봤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꿈을 계속 갖고만 있는 것은 아쉽지 않나. 우리 인생에서 몇 개월은 짧은 순간이다. 너무 마음속에만 담아 두지 말고 한 번 해보는 게 어떨까. 한 번으로 끝나냐, 계속 이어가느냐는 나중의 문제다. 너무 생각 많이 하지 말고 한번 용기 내 도전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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