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산부인과‧내분비내과‧성형외과‧비뇨기과 다학제 진료
의료계 성소수자 차별 줄이려면 의료진 교육‧성중립 화장실 개선 필요

과거에 비해 성(性)소수자들을 향한 시선이 유연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사회 분위기는 차갑기만 하다. 성전환 수술 후 강제전역 조치를 당한 뒤 세상을 등진 고(故) 변희수 하사, 여성으로 확정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 수강생의 여성 화장실 이용을 금지해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시정 권고를 받은 학원 이야기는 성 소수자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다. 성 소수자들은 의료기관 이용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해 인권위가 진행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10명 중 7명은 일반진료를 받기 위해 방문한 의료기관에서 차별을 받고 있었다.

성 정체성과 맞지 않는 입원실이나 탈의실을 이용해야만 했고, 모욕적인 발언이나 불필요한 질문을 들을 때도 있었다. 심지어 의료기관으로부터 부당한 검사나 치료를 요구받거나, 반드시 필요한 의료조치를 거부당한 경험도 겪어야만 했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지만 트랜스젠더들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에 지난 1월 고대안암병원이 국내 대학병원 가운데 처음으로 젠더클리닉을 개설했다.

젠더클리닉은 성 정체성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이 성 위화감을 극복하고 정체성에 맞는 성별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의학적 처치를 제공하기 위한 곳으로, 성형외과 황나현 교수가 젠더클리닉 개설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황 교수는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World Professional Association for Transgender Health, WPATH) 정회원으로 활동하며 해외 젠더클리닉 연수를 받는 등 성소수자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의료서비스 제공에 힘써왔다.

황 교수는 “성소수자들도 똑같은 사회 구성원이자 환자로 차별 없이 진료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대안암병원 젠더클리닉 황나현 교수(사진제공: 고대안암병원)
고대안암병원 젠더클리닉 황나현 교수(사진제공: 고대안암병원)

- 성소수자들과 관련한 ‘젠더 의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전공을 정하기 전에 절친했던 친구가 잡지사 기자였다. 그 친구와 함께 우연히 성소수자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사정을 알게 됐고, 성소수자들을 돕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의과대학 졸업 후 인턴을 돌며 성형외과가 성소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진료과목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형외과로 진로를 정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이후 트랜스젠더 관련 해외 학회에 참석하고 해외 클리닉에서 단기 연수를 받으며 관심을 키워가던 중 고대안암병원에 젠더클리닉 개설을 제안하게 됐다.

- 젠더 수술을 위해 해외로 가던 환자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해외 출국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상황도 젠더클리닉 개설에 영향을 미쳤나.

시기가 잘 맞았던거 같다. 코로나19가 2년째 이어지며 수술을 위한 출국이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태국의 경우 성형외과 의사들이 제일 많이 하는 수술이 젠더 수술이라고 할 정도로 경험이 풍부하다. 특히 비용부담이 국내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어 많은 성소수자들이 태국에서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브로커에게 피해를 입거나 의사소통 문제, 수술 후 사후 관리를 받기 힘든 점 등을 환자들이 호소해하더라. 비용부담이 줄어든다면 국내에서 수술과 의료적 처치까지 받고자 하는 분들이 꽤 있었다,

또 최근 트랜스젠더 인권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것도 영향이 있었다. 여러 가지로 타이밍이 잘 맞았다고 볼 수 있다.

- 젠더클리닉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궁금하다. 또 개설 후 진료 받은 환자 수는 어느 정도 되나.

젠더클리닉이라고 해서 트랜스젠더만 진료하는 것은 아니다. 간성환자(Intersex)들과 선천적으로 성기가 애매모호한 사람들까지 모두 아우르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젠더클리닉은 정신건강의학과, 산부인과, 내분비내과, 비뇨기과, 성형외과를 포함해 총 5명의 의료진이 하나의 다학제 젠터팀을 구성해 환자가 원하고, 환자에게 필요한 진료를 제공하고 있다.

성기 재건술을 받는 환자도 있지만 호르몬 치료만 받는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환자 개개인마다 원하는 것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치료에 있어 다학제 진료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진료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F64’라고 불리는 성전환증 진단 코드를 받는 것부터 시작해 호르몬 치료를 진행하며 환자가 원하는 성별로 살아보게 된다. 이후 환자가 본인의 성 정체성에 확신이 생기면 성기 재건술, 가슴 성형 등 환자가 원하는 수술을 시행한다.

다학제 진료를 통해 이 모든 치료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기적으로 진행하며 환자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해외 클리닉에서도 하나의 젠더팀을 만들어 환자가 필요한 치료를 받을 때마다 해당 진료과와 협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국내에도 중소병원 규모의 젠더클리닉이 많지만 다학제 치료야말로 다른 병원과 고대안암병원 젠더클리닉이 갖고 있는 차별점이다. 지난 1월 개설 이후 지금까지 총 45명이 내원했다. 초반에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워낙 좁고 정보 공유가 활발한 덕분에 젠더클리닉이 많이 알려졌다고 들었다.

- 미성년자들도 젠더 관련 진료를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만 16세 이상의 청소년의 경우 부모 동의하에 호르몬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호르몬 치료에 대한 부모들의 거부감이 큰 편이라 마지못해 성호르몬 억제제 투여 정도만 동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호르몬 억제제는 청소년의 2차 성징이 발현되는 것을 억제해 성별위화감을 줄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호르몬 치료 가능 나이를 만 14세 이상으로 낮춰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자녀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든 부모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젠더클리닉에서 의학적 진료 이외에 힘쓰고 있는 부분이 있나.

현재 젠더클리닉에서 의료진과 직원들 대상으로 성소수자 관련 교육을 진행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있다. 성소수자들이 의료기관에서 겪는 차별의 원인이 바로 무지함에서 오는 편견과 근거 없는 혐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료진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서울의대에서 시작한 성소수자 의료 수업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많은 의대에서 교육과정으로 만들어져 편견을 없앨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더불어 성소수자를 위해 병원 공간을 개선했다. 성소수자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는 화장실 사용이 가장 큰 문제다. 젠더클리닉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성중립 화장실, 개별 탈의실 등 환자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성소수자들이 꼭 젠더클리닉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 다른 진료를 받으러 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병원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병원 곳곳에 이런 시설들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성소수자들을 다 이해하고 보듬어 안으라고 억지로 강요할 수 없다. 그저 성소수자 환자들이 진료를 받으러 왔을 때 그들을 낯설게 보거나 차별하는 것 아니라 환자가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차별없이 제공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젠더클리닉의 운영 목표도 궁금하다.

‘우리나라 환자들을 우리 손으로’가 가장 큰 목표다. 우리나라 의료 기술이 이미 세계적으로 뛰어난데 굳이 환자들이 젠더 수술을 받으러 해외로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환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치료받고 사후관리까지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또 더 많은 환자들이 적은 부담으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현재 호르몬 치료, 성기 재건술 등 대부분의 젠더 수술은 비급여 항목으로 환자들의 금액 부담이 매우 큰 상황이다. 상급종합병원에서 젠더클리닉을 운영하는 것 자체로도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소수자 의료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 더 나아가 우리 클리닉을 시작으로 다른 병원에서도 젠더클리닉이 개설돼 의료보험 혜택, 차별금지법 통과, 성별정정결정 법규화 등 성소수자 관련 정책에 힘을 모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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