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치의학대학원 편웅범 산학협력중점교수

우리나라 의료기기산업이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업 내 RA(Regulatory Affairs)의 지위와 예우가 개선될 필요가 있다.

RA는 국가별로 정해진 법령에 따라 의료기기 허가 또는 변경을 위한 기술문서 작성을 주업무로 수행하는 직군이다. 여기에 허가, 임상시험, 안전성 및 성능 시험평가, GMP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의료기술평가 및 보험등재 등 전체적인 규제절차에 관련한 상세 계획을 수립하는 중요 업무도 포함한다.

의료기기산업계는 상당히 오랜 기간 RA 품귀현상을 호소해 왔다. 이에 정부는 RA 양성과정에 대한 투자를 정책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해결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RA의 지위와 예우가 향상되지 않는 한, RA 품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요원할 것으로 본다. ‘RA의 지위 향상’이라는 주제가 정책적으로 공론화되고 심도 있게 검토된 사례는 필자의 기억 속에는 없다.

RA들은 과묵한 편이다.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진하는 경우가 없다. 이러한 태도는 담당하고 있는 업무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업 분야는 매출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80% 달성’ 또는 ‘60% 달성’ 등 나름대로 부분적인 평가가 가능한 회색 영역이 존재한다. 반면 RA가 담당하는 허가, 임상시험, GMP 적합인정 업무 등은 성공과 실패로 명확하게 이원화돼 있다.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 (그간의 성과를) 평가받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성공해도 본전이란 뜻이다. 사실,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신제품 허가를 추진할 수 있는 내부역량과 그간 구축한 인프라는 고스란히 남는다. 하지만 이러한 무형의 자산을 합리적으로 평가해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RA는 과묵할 수밖에 없고, 의료기기산업에 새롭게 몸담으려는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직종이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RA직종의 활동 수명이 다른 직종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긴 편이라는 점이다. 경력자를 대체하기가 아주 어려울 뿐더러 신기술 도입에 따라 나날이 넓어지는 새로운 영역의 수요 충족이 어렵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RA 업무는 근본적으로 결과를 예단할 수 없기에 목표를 설정하고 제시하기 어렵다. 다만 규제 요구사항에 따른 세부 계획을 수립해 제안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각 단계를 충실히 밟아나갈 뿐이다.

대기업이 아니고서는 개발 과정을 문서화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국내 의료기기산업계 전반에 걸쳐 오랫동안 고착된 심각한 문제다. 의료기기 기술문서를 구성하는 근거 자료 중에는 개발자가 작성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규정돼 있는 사항이 많다. 따라서 개발과정이 문서화되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문제로 작용할 수 있다. 또 GMP 적합인정 심사와 기록유지 등 운용 업무를 RA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려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하다. GMP는 방대한 문서체계를 확립해 운용 및 기록·유지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신뢰성을 보증하는 시스템이다. 설계관리는 개발팀, 제조관리는 생산부서, 교육관리는 기획팀이나 인사팀에서 담당하는 ‘전사적인 시스템’으로 운용돼야 한다. 사내에서 RA의 지위를 개발팀과 동등 이상으로 부여해 RA의 요구사항이 개발단계에서 충실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기업의 운영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신제품 개발 전, 시판까지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을 예측하는 과정은 필수다. RA가 기획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기술을 구현하는 단계에만 집중되기에 규제절차에 필요한 실제적인 비용과 기간을 누락할 우려가 크다. 고도의 역량을 갖춘 RA는 비용과 시간을 감축할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할 수도 있다.

투자유치에서도 RA 업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근 바이오의료기기 분야 투자자들은 임상시험과 허가에 대한 구체적 추진계획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추세다. “최선의 노력으로 3년 내 임상시험을 성공적으로 완료하겠다”는 등과 같은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호언장담은 투자자들에게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결국 RA들이 임상시험 및 허가 등 규제 전반에 걸친 실제적인 계획을 수립해 제안하는 등 수행역량이 충분한 RA팀을 바탕으로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어내야 한다. 투자제안서 작성은 사내 기획팀의 전유물이 아니다. RA들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

정부 R&D 과제기획도 RA의 참여가 요구된다.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기업들에게 정부 R&D과제를 통한 지원은 큰 혜택이다. 최근 정부 R&D과제에서도 사업화 성과관리가 강조되는 추세고, 임상시험 및 허가 등이 정량적 목표로 제시되고 요구되고 있다. 정부 R&D 과제심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과제기획 단계부터 RA가 적극 참여함으로써 임상시험이나 허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임상시험계획 초안을 비롯, 세부적인 계획과 추진일정을 규정에 충족하도록 타당성있게 수립하고 제시해야 한다. 규제절차에 관한 상세하고 타당한 계획을 수립하는 일은 RA 직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결국 의료기기기업의 차별화된 핵심역량은 RA인력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RA들의 업무성과 없이 기업은 사업적으로 한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인허가 등 규제 관련 업무를 외부 컨설팅 전문기업에 맡기려 해도 내부에 실력있는 RA는 반드시 필요하다. 외주 의뢰만으로 해결되는 경우는 없다. 컨설팅 기업에서 개발자에게 요구하는 자료를 기업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제공해야만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GMP 운용 자체는 외주를 줄 수 있는 성격의 업무가 아니다. 컨설팅은 복잡한 허가 요구사항들을 충족해 규정된 절차를 거쳐 종국적으로 허가를 취득할 수 있는 방향을 알려줄 뿐이며, 제품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할 수 있는 본질적인 근거자료는 개발기업으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의료기기 산업발전을 위해선 RA의 업무에 걸맞는 지위와 예우가 필요하다. 현재 RA 위상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는 CEO의 기업경영 철학 및 기준에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인내심을 갖고 단계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여러 CEO에게 RA 직무의 전반적 이해를 도울수 있는 반나절 정도의 교육과정 개설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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