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리과 전문의 대부분인 법의학자…병리과 전공의 줄면서 ‘기근’
양성기간 긴 반면 열악한 근무환경·보수체계로 지원자 줄어
'국과수-법의학교실' 간 순환근무 체계 및 국과수 법의관 처우개선 시급
“법의학자 줄어 법의학 수준 떨어지면 형사법정 정의 실현되기 어려워"

화성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30여년이 지나 진범을 밝혀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과학수사가 있다. DNA 감식이라는 법의학기술 발전이 이뤄낸 쾌거였던 것이다. 하지만 법의학자들은 과학수사 기법이 발전하더라도 ‘기록’ 없이는 무용지물이라고 말한다. 증거 확보의 기본 틀이 무너져 버린다면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죽음의 원인을 밝혀낼 수 없을 거라는 지적이다. 법의학자들이 부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최근 범죄수사 해결의 결정적 단초가 될 수 있는 부검 건수가 늘고 있다. 반면 ‘부검하는 의사’인 법의학자는 줄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따르면 수사기관으로부터 의뢰 받는 부검 및 검안 실적은 한해 9,000여건에 달한다. 하지만 부검할 수 있는 의사는 이미 은퇴한 법의학자까지 포함해 전국 50여명이 전부다. 이 가운데 국과수 법의관은 35명에 불과하다. 결국 법의학자 1명이 200건의 부검을 맡아 하고 있는 셈이다.

대한법의학회도 법의학자 양성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대를 이을 의사가 점점 줄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법의학자는 전문의가 아닌 인정의 제도로 배출되고 있다. 특히 부검을 중점적으로 하는 업무 특성에 따라 법의학자의 대부분은 병리과 전문의다. 병리학 전문의 중 법의학을 2년 이상 전공한 일부 의사들이 인정의 시험을 거쳐 선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병리과를 지원하는 전공의 수가 급감하면서 법의학자 양성에도 비상이 걸렸다. 법의학자 양성을 위한 모수 자체가 줄고 있는 셈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병리과 전공의 지원율은 지난 2016년 66.1%, 2017년 60.7%, 2018년 41.7%, 2019년 35.0%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병리과 정원은 60명대를 유지했지만 지원자는 41명에서 37명, 25명, 21명으로 줄었다.

이에 법의학회는 3가지 방향을 설정하고 현실 가능성을 타진해 봤다. 법의학 전문의 제도를 도입하거나, 병리과의 세부전문의, 일부 전문과목을 설정하고 해당 전문의 면허를 취득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분과전문의 등을 통해 법의학자 양성을 추진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법의학회는 이 같은 3가지 대안의 현실 가능성을 사실상 ‘없다’고 결론 내렸다.

고려의대 법의학교실 박성환 교수는 “법의학 유관분야는 병리학으로 현실적으로 대부분 법의학자는 병리학 전문의다. 부검 스킬을 갖추고 조직을 보는 눈도 잘 갖춰지기 때문에 법의학 전공을 하기 위한 좋은 자원이 된다. 하지만 병리학 지원자들이 너무 없다보니 법의학은 (지원자가) 거의 말라 죽게 됐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법의학 전문의 제도가 어렵사리 승인된다 하더라도 전문의 트레이닝을 어떻게 시킬 것인지도 문제”라며 “결국 병리과로 파견을 보내 트레이닝을 시켜야 하는데 병리과에서 좋아할 리 없고 당장 전공의 월급은 어떻게 줄 것이며, 누가 총대를 메고 추진할 것인지도 고민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세부·분과전문의 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쉽지 않다”며 “세부전문의를 하게 되더라도 병리과 세부전문의니 지금과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을 테고, 분과를 하더라도 다른 과 전문의들이 법의학이 얼마나 좋다고 지원을 하겠나. 지금에서는 3가지 방안 모두 도움이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전문의 따고 2년 더 공부해야 법의학자 되지만 처우는 더 열악

그렇다면 법의학자 양성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법의학 전문가들은 ‘안정된 일자리’ 확보가 결국 답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의 면허를 취득하고도 남들보다 2년 더 법의학 공부를 마쳐야 법의학자가 되지만 처우는 더 열악하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의사 평균연봉은 1억6,500만원이지만 공무원인 국과수 법의관 연봉은 이에 한참 못 미친다. 결국 국과수 법의관의 대우가 좋아져야 하고, 전문성에 대한 보장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공무원이고 업무강도가 세다. 같은 행정안전부 소속이더라도 경찰병원 임상 의사들은 진료 수당도 받고 좋은 점이 있지만 국과수 법의관들은 부검 수당도 제대로 안 돼 있다. 분명 사기를 꺾는 부분도 있거니와 상대적 박탈감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의과대학 정원을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이미 의사 수는 충분히 늘었고 의사 수가 증가한다고 법의학자가 늘진 않는다”며 “의사 수가 늘어나니 생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돈을 잘 버는 과로 갈 수밖에 없다. 결국 국과수 대우가 좋아져야 한다. 월급을 획기적으로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국과수 법의관들이 부검만 하는 게 아니라 검시 제도 안에서 최소 부검 결정에 대한 권한이나 부검 감정서를 냈을 때 피드백을 받을 권한 등 보호 받을 권한 등이 확립된다면 훨씬 더 자괴감을 덜 느낄 것 같다”며 “지금은 할 필요도 없는 부검을 하거나 부검 감정서를 냈는데 어떻게 처리됐는지도 피드백도 없고 그러면서 업무는 많다. 사람들이 번 아웃 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고 했다.

박 교수는 “법의학에 대해 관심 있는 의대생들은 정말 많다. 그런데 결국 생계에 대한 불안함, 막연함 때문에 떨어져 나간다”며 “처우개선이 가장 중요하다. 지방 병원들도 의사 못 구하면 급여를 올린다. 열악해서 안 가려고 하니 그렇게 된 건데 국과수도 마찬가지다. 열악해서 지원자가 없는 거라면 유인책을 생각해야 한다”고도 했다.

더불어 국과수와 의대 법의학교실 간 인력교류 선순환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과수에서 쌓은 현장 경험과 전문성을 토대로 의대 법의학 교수로 전환하거나, 혹은 의대 법의학 교수에서 현장 경험을 쌓기 위해 국과수로 전환하고 싶어도 시스템이 부재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융통성 있는 인사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국과수에서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법의관이 대학으로 오고 싶더라도 대학에서 요구하는 SCI 논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해 지원조차 어렵다”며 “업무강도가 상당한 국과수에서 SCI 논문을 5~6편 쓴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연구시설도 따로 없는 곳에서 부검 하며 논문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인력교류 자체가 힘들다”고 말했다.

법의학교실을 각 의과대학에 설치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제안도 있었다. 전국 41개 의대 중 법의학교실이 있는 곳은 10곳이 전부다. 서울대, 경북대, 전남대, 전북대, 부산대, 제주대 등 국립대를 중심으로 고려대, 연세대, 건국대 등 일부 사립대에 설치돼 있다.

서울의대 법의학교실 유성호 교수는 전남의대나 경북의대의 경우 법의학교실이 설치된 이후, 졸업생들의 법의학관 진출이 눈에 띄고 있다고 강조했다. 법의학자의 미래를 보여줄 '롤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전남의대나 경북의대에 법의학교실이 설치되고 졸업한 학생들이 꽤 (법의관으로) 진출한 걸 보면 롤 모델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각 의대에 법의학교실을 만들고, 교수진을 확보하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법의학자를 꿈꾸는 의대생들은 많은데 그만큼 자리가 있느냐. 그렇지 않다. 의대에 자리도 없다. 선순환 체계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결국 롤 모델이 필요하다”며 “방송 프로그램에 나오다보니 법의학에 관심 있다는 학생들도 본다. 솔직히 현실적인 것들을 감내하고 한 번 해보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국과수에서 근무를 해야 하는데 본인들이 만족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법의학자 양성이 어려워져 부검하는 의사들이 줄어든다면 어떻게 될까. 유 교수는 “감정의 질이 떨어지고 법의학 수준이 떨어지면 법정에서 형사법정 정의가 실현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부검을 할 수 있는 의사들이 줄어들면 의학발전에도 장애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유 교수는 “특수목적 의사 양성에도 관심이 필요하다. 의대 졸업하기 전 법의학은 반드시 들어야 하는 수업이고, 그 수업은 직접 시신을 다루는 그 의대 교수가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 지역에 있는 사건을 부검한 의사가 학생들에게 강의하면 얼마나 좋겠나. 한국의과대학의학학전문대학원협회나 보건복지부, 교육부에서 법의학을 필수적으로 지정해 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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