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의학회-의료윤리학회, ‘모의의료기관윤리위’
다섯 가지 사례 선정해 심의 과정 영상으로 제작
문재영 교수 “의대생·전공의, 병원 구성원 교육자료로 활용”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100만명을 넘었다. 연명의료 중단이 이행된 환자는 17만명을 육박한다.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된 지 3년 6개월 만이다. ‘존엄한 죽음’,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 만큼 현장의 고민도 깊어진다.

‘임종과정’이라고 보고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결정 자체도 쉽지 않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어도 가족이 반대하면 연명의료 중단을 이행하기 어렵다. 이처럼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법이나 규정에 명시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환자마다, 의료기관마다 상황이 다르기도 하다. 그래서 연명의료결정법은 ‘의료기관윤리위원회’에서 사안별로 심의해 연명의료 중단 등을 결정하도록 했다. 의료기관윤리위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대한중환자의학회와 한국의료윤리학회가 ‘모의 의료기관윤리위’ 영상을 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환자의학회와 의료윤리학회는 실제 사례를 취합해 의료기관윤리위 심의안건으로 재구성했다. 그리고 의료기관윤리위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의료인들과 함께 모의 회의를 진행하고 이를 영상으로 제작해 유튜브에 공개했다. 모의 심의안건은 총 5건으로, 23일 기준 4건의 영상이 공개됐다.

대한중환자의학회와 한국의료윤리학회는 연명의료 중단 여부 등을 심의하는 '모의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영상을 제작해 유튜브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모의 심의에 참여한 위원들 모습.
대한중환자의학회와 한국의료윤리학회는 연명의료 중단 여부 등을 심의하는 '모의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영상을 제작해 유튜브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모의 심의에 참여한 위원들 모습.

<모의 의료기관윤리위원회>
※ 심의안건 제목을 클릭하면 유튜브 영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의안건1: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있으나 가족이 연명의료중단을 반대하는 임종과정 환자
65세 남성. 심근경색에 의한 심정지로 심폐소생술 후 응급실 내원. 환자는 이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상태. 담당 의사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판단해 환자의 뜻에 따라 연명의료를 유보/중단하고자 하지만 가족들이 반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명의료 중단을 진행할 수 있는가.

심의안건2: 신경학적 예후가 불량하나 뇌사가 아닌 환자의 치료 중단 요구
78세 여성. 의식 저하로 응급실 내원해 뇌내출혈과 뇌실내출혈 응급 수술 후 중환자실 재원 14일째. 뇌사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나 자발호흡, 뇌간 반사 없는 의식불명 상태로 신경학적 예후는 매우 불량할 것으로 예상. 인공호흡기 이탈이 어려워 기관절개술(tracheostomy) 시행에 대해 가족과 논의했으나 가족들은 회복 가능성이 낮고 장기적 돌봄에 대한 부담으로 기관절개술을 포함한 더 이상의 적극적 치료는 거부. 배우자는 가능하다면 인공호흡기 중단까지도 요구. 이 환자는 연명의료 유보/중단이 가능한가. 기관절개술은 시행해도 될까.

심의안건3: 연명의료계획 철회를 요구하는 회복 불가능한 만성중증환자
59세 남성. 만성폐쇄성폐질환의 급성 악화와 동반된 폐렴으로 응급실 내원해 중환자실 치료 후 일반병동 재원 47일째.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 적용 후 이탈해 병동에서 고유량비강캐뉼라로 산소공급. 환자 의지에 따라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했으며, 폐렴 재발로 호흡곤란이 악화되자 환자가 가족들에게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자 가족들은 중환자실 치료를 요구. 환자와 가족의 요구를 연명의료계획에 대한 철회 의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심의안건4: 심각한 뇌손상을 입은 신생아의 치료 중단 요구
생후 76일 남아. 저산소성허혈성뇌손상으로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 유지 중. 환아의 부모는 평생을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살아야 한다면 인공호흡기를 포함한 치료 중단을 요구. 담당 의료진은 현재 연명의료결정법상 ‘임종과정’에 있다고 보기 어려워 인공호흡기 중단은 불가하고 판단. 환자 가족과 의료진 간 의견 차이가 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

심의안건5: 의사결정능력이 결여된 말기신부전 환자의 혈액투석 거부에 대한 심의 요청
80대 여성. 의사결정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혈액투석을 받고 있는 말기신부전 환자, 유일한 보호자인 아들은 의학적으로 혈액투석이 필요하다는 의료진의 소견에 따라 환자가 힘들다고 표현해도 설득해 치료를 진행. 치료를 받으면서 잦은 응급실 내원과 환자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환자의 뜻에 따라 투석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심하고 담당의사에게 요청. 현재 환자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기 어렵다고 보고 의학적으로 투석치료를 중단해야 하는가.

의료윤리학회 학술이사인 문재영 세종충남대병원 중환자의학과 교수는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현장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문제와 의료진의 고민이 큰 사안 등을 중심으로 심의안건을 선정했다고 했다. 의료기관별로 발생한 실제 사례들을 취합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데만 2개월 이상 걸렸다. 그리고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운영하는 대학병원 10곳에서 총 13명이 참여해 모의 회의 영상을 제작했다.

문 교수는 “의료기관윤리위 운영이 활성화된 병원은 많지 않다. 몇몇 병원을 제외하고는 많은 위원이 모여 사례를 심의하는 게 익숙치 않다”며 “다른 병원에서는 의료기관윤리위에서 어떤 사례를 다루는지, 심의안건이 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 공유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중환자의학회와 의료윤리학회는 의료기관윤리위를 운영하는 병원에 “긍정적인 피드백과 경험”을 주기 위해 모의 의료기관윤리위 영상을 제작했다.

한국의료윤리학회 학술이사인 문재영 세종충남대병원 중환자의학과 교수는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모의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영상을 제작한 이유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국의료윤리학회 학술이사인 문재영 세종충남대병원 중환자의학과 교수는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모의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영상을 제작한 이유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10일 기준 100만56명으로, 연명의료결정제도 도입 3년 6개월 만에 100만명을 돌파했다.

그만큼 연명의료결정제도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이 불필요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렇다면 의료계는 국민의 수준을 따라가고 있는가. 오히려 연명의료 중단 결정 절차나 의학적인 판단을 일반인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벽을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된다. 일반 국민이 고민하는 것 이상으로 공부하고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 그리고 연명의료결정제도에 관심갖는 환자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상담해야 한다. 하지만 의료계 내에서도 편차가 크다. 전문학회들이 나서서 연명의료 관련 지침서를 만들고 교육하면서 표준화 시켜야 한다.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 요양병원, 병원 등 종별로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한해 사망자의 75% 정도가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 모의 의료기관윤리위 영상을 제작한 이유도 의료계 내 편차를 줄이기 위해서인가.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후 병원들은 의료기관윤리위를 구성해 법에서 다룰 수 없는 복잡한 문제를 심의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의료기관윤리위 운영이 활성화된 병원은 많지 않다. 몇몇 병원을 제외하고는 많은 위원이 모여 사례를 심의하는 게 익숙치 않다. 다른 병원에서는 의료기관윤리위에서 어떤 사례를 다루는지, 심의안건이 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 공유도 부족하다. 그렇다 보니 경험이 쌓이기보다 매년 비슷한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긍정적인 피드백과 경험이 부족한 것이다. 의료기관윤리위 간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중환자의학회와 의료윤리학회가 힘을 모았다.

- 모의라고 하지만 회의에서 주고받는 내용이 실제 사례처럼 구체적이더라.

병원별로 중환자실 입원 환자 중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논의했던 사례를 보여줬다. 심의안건들은 모두 현실에 바탕을 뒀다. 개인정보나 특정 사례가 드러나지 않도록 여러 차례 각색해서 교육용으로 재구성했다. 위원들이 겪은 여러 사례와 경험을 담았다.

- 별도로 대본이 있었나.

대본은 없었다. 주제와 대략적인 내용만 정리해서 공유했다. 한번 촬영할 때 9명이 참여했으며 다섯 가지 사례를 준비했다. 안건 하나당 1~2시간씩 토론했으며 편집 과정을 거쳐 영상 2개뤄 나눠 총 10편이 중환자의학회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다. 현재까지 4개 사례가 올라갔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료진이 모여 모의 심의를 진행하고 있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료진이 모여 모의 심의를 진행하고 있다.

- 다섯 가지 사례는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나.

첫 번째 사례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있으나 가족이 연명의료중단을 반대하는 임종과정 환자’는 현장에서 가장 많이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첫 번째로 다뤘다. 두 번째 사례인 ‘신경학적 예후가 불량하나 뇌사가 아닌 환자의 치료 중단 요구’는 의사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고민하는 사안이다. 뇌사가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신생아 사례(심의안건4)처럼 흔하지는 않지만 꼭 한번은 고민해봐야 하는 내용도 담았다.

- 이번 모의 의료기관윤리위 영상이 의료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길 바라나.

의대 수업이나 전공의 교육에 활용하고 싶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우리 병원에서도 영상을 보여준 후 전공의들끼리 모의 의료기관윤리위를 진행해볼 계획이다. 의대생이나 전공의뿐만 아니라 병원 내부 구성원 교육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다. 또 병원마다 의료기관윤리위에 외부 위원이 참여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들과도 공유할 수 있다. 병원에서 환자가 최선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어떤 고민을 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 의료인이나 병원 구성원이 아닌 일반인도 이 영상을 보면 많은 생각할 것 같다.

의사들은 학생 시절부터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선행이라고 배웠다. 의사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상식적인 의사들은 그렇지 않다. 환자의 편에 서서 어떤 게 더 나을지 항상 고민한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때도 있다. 그런 불확실성을 안고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방안을 고민한다. 의사 개인이든 집단이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100% 완벽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이 영상이 삶의 마무리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걱정되는 부분은 모의 의료기관윤리위에서 내린 결론을 유일한 답으로 생각하는 경우다. 영상에서 다룬 안건과 비슷한 사례가 실제 현장에서 발생했다고 해도 세부 상황이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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