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의 진료실의 고고학자


[청년의사 신문 박지욱]

1905년에 코로트코프(Nikolai S Korotkov; 러시아 의사, 혈관외과의 개척자)가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는 위팔 동맥의 수축기/이완기를 구분하는 혈압 측정 방식을 도입했다. 혈압이란 것을 인식하게 되자 혈압이 너무 높으면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높은 혈압을 강제로 낮추는 것도 과연 옳은 일인지 의사들은 확신이 없었다.

대신에 혈압이 그렇게 올라간 것은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고, 억지로 혈압을 낮추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인체의 생리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이런 생각 즉, ‘고혈압 옹호론’은 무슨 근거가 있었을까?

1856년에 트라우베(Ludwig Traube(1816~1876); 독일 의사)는 고혈압 상태에서는 신장의 혈관이 수축되기 때문에 혈액을 충분히 보내기 위해 혈압이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혈압 때에 흔히 동반되는 좌심실 비대증(LVH)도 피를 잘 보내주기 위한 적응과정 혹은 생리적인 보상physiological compensation이라고도 주장했다. 지금에 와서 본다면 그는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해석한 셈이지만, 그 주장은 콘하임Julius Friedrich Cohnheim; 당대의 저명한 병리학자의 지지를 얻어 80년 가까이 그 위력을 떨쳤다.

1925년 라운트리(LG Rowntree)와 애드슨(AW Adson)은 혈압이 230/130mmHg에 이르는 33세 남자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혈압을 올리는 역할을 하는 허리의 교감신경절단술(lumbar sympathectomy)을 시도했다. 교감신경을 자르면 하지 동맥의 수축이 차단되고, 그러면 혈압도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수술 결과도 훌륭했다!

하지만 트라우베의 이론에 의하면 혈압이 떨어져 신장에 대한 정상적 보상 과정이 사라져 신장이 망가질 텐데, 환자는 어떻게 됐을까? 걱정과 달리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후로 여러 연구자들은 “고혈압 환자의 혈압을 내려주어도 신장 기능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1928년에는 미국 보험회계사협회가 “고혈압환자들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하지만 1930년이 돼도 의사들은 끈질기게 고혈압 환자의 혈압을 내려주는 것은 잘못된 치료이며, 혈압이 올라가는 것은 중요한 장기들에게 좀 더 피를 많이 공급해주려는 인체의 노력이라고 주장했다. 의사들은 혈압을 전압이나 수압과 비슷해서 높을수록 안정적인 공급에 도움이 된다고 여긴 것 같다.


1960~70년대에 많은 연구들은 의사들의 기존 관념에 중대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대표적인 것들이 프래밍검 심장 연구 (Framingham Heart Study), 미국 재향군인연구(US Veterans Study) 등이다.

프래밍검 심장 연구 Framingham Heart Study

20세기 초부터 미국에서 뇌졸중과 심장병의 심각성이 꾸준히 증가되자 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1948년에 the National Heart Institute (the National Heart, Lung and Blood Institute 의 전신)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연구의 목적은 는 건강한 이들을 장기적으로 추적 관찰하면서 뇌졸중에 걸리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나 공통 인자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매사츄세츠 프래밍검에서, 30-62세의 주민들 5,209명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신체 특징, 질병력, 생활 방식을 추적해서 뇌졸중에 걸리는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내었다.

이 연구를 통해 뇌졸중의 중요한 위험인자로 고혈압, 고콜레스테롤혈증, 흡연, 비만, 당뇨, 육체적 활동 부족으로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관련 인자들 즉, 혈중 중성지질, HDL 콜레스테롤 수준, 나이, 성별, 정신사회적 이슈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귀중한 정보를 많이 제공하였다. 이 연구의 성과가 얼마나 지대한가는 1,200편 이상의 논문들이 주요 학술지에 등재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71년에는 그들의 자식들 5,124명을 추가해 2세대 연구를, 2002년에는 그들의 손주그룹 4.095명도 추가했다. 3대에 걸친 연구를 통해 심장병과 뇌졸중에서의 열연 관계의 중요성이 확인됐다.

이 외에도 1960년대 중반에 영국과 미국에서 벌어진 두 개의 연구조사에서 혈압을 내려주면 뇌졸중 발병률이 의미심장하게 줄어든다는 것을 확인했다. 전역 군인들을 조사한 미국 연구(US Veterans Study)에서도 고혈압 치료를 받지 않은 70명중 27명이 1년 내에 뇌졸중에 걸린 반면, 치료받은 70명 중에는 단 1명이 뇌졸중에 걸렸다는 것을 확인해 고혈압과 뇌졸중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입증하게 됐다.

이런 연구조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제까지 금과옥조로 여겼던 트라우베의 보상 이론은 버려야 하며, 혈압이 높은 것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 것이므로 고혈압은 그냥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치료해야 하는 질병 상태”라고 알려줬다.

자, 이제 의사들도 혈압을 낮춰 주면 좋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됐다 치자,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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