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의 진료실의 고고학자


[청년의사 신문 박지욱]

수액병으로 피가 역류할 수 없는 이유

그런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수액이 환자에게 연결된 혈관은 동맥artery이 아닌 정맥vein이다. 정맥은 피가 심장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있는 혈관이라 혈압이 낮다. 특히 우심방 입구의 정맥 압력(중심정맥압 central venous pressure;CVP)은 일반 수은 혈압계로 잴 수 없을 정도로 낮아서(3~7mmHg) 진짜 물을 이용한 수압계(水壓計)로 잰다. 대략 물기둥을 5 ~ 10 cm 정도 세울 압력이 나온다(7mm*13.6=10cmH2O).

다시 말하면, 피는 물보다는 진해서 좀 더 무거울 테니, 아무리 중심 정맥압이 높다 해도 정상인이라면 10cm 이상으로 치솟아 오르는 피 분수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게 본다면 팔에 잡아둔 정맥 혈관으로 피가 수액관으로 역류해 120cm 정도의 높이(폴대 높이 180cm에서 침대 높이 60cm를 뺀 높이)에 걸려있는 수액병으로 치솟아 붉은 피로 수액 주머니나 병을 가득 채우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풍경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링거병을 달고 있다고 해도 자다가 피가 몸 속에서 다 빠져 나오는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으니 걱정 마시고 푹 주무셔도 된다.


▲ 뭉크Edvard Munch의 <뱀파이어The Vampire>, 1893-94년, 오슬로 국립미술관 김민아 기자

잠시 쉬어가자. 산 사람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뱀파이어들은 희생자들의 목에 있는 혈관을 물어 피를 빼먹는데 이때 경동맥을 물까, 경정맥을 물까?

경동맥을 뚫으면 틀림없이 120mmHg의 강한 압력으로 피범벅이 되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것이다. 압력이 강한 호스로 물을 받아 먹어본 적이 있으면 경험했듯 물은 다 튀어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얼마 없다. 그러니 아무리 허기가 져도 경정맥을 물어야 편안한 한끼 식사를 해결한다는 것을 뱀파이어라면 다들 잘 알아야 한다. 이런 뱀파이어의 식사법을 이용해 우리 몸 속의 피를 조용히 빼내는 사람들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데 누구일까?

2009년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에서 주인공인 뱀파이어가 환자의 침대 아래에 누워 수액 관으로 피를 받아 먹는 기괴하고도 기발한 장면이 나왔다. 그 장면을 보니 아무리 압력이 낮은 정맥이라 해도 수액병을 환자의 침대보다 낮은 곳에 두면 몸 속의 피를 몽땅 비워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영화 속의 장면이 약간 변형되어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만날 수도 있는데 바로 ‘헌혈의 집’에서다.


▲ 중력을 이용해 정맥에서 피를 빼는 헌혈 차량 김민아 기자

헌혈 침대에 누워본 사람이라면 헌혈자의 정맥 핏줄이 몸보다 훨씬 낮은 곳에 위치한 헌혈용 비닐 주머니와 가느다란 튜브로 연결된 것을 잘 알 것이다. 이 비닐 주머니에는 피를 뽑아내는 특수한 펌프 장치 같은 것이 달려있지 않다. 다만 5 ~ 10 cmH2O정도의 낮은 인체 정맥압을 이용해 피를 받아낸다. 중심 정맥압에 20 ~ 30 cm 의 고도차를 더하면 폭포수 정도는 아니어도 몇 분 안에 원하는 양의 피를 빼낼 수 있다. 길거리에 서있는 헌혈차에도 이런 혈압의 물리학적 원리가 숨어있다.

혈압의 측정

병원에 가면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은 환자의 신원이고 그 다음에 확인하는 것은 혈압일 정도로 혈압은 활력 징후 vital sign중 가장 중요한 체크 포인트다. 이제부터 혈압을 어떤 원리로, 어떻게, 언제부터 재었는지 알아보자.

1733년에 영국의 수의사이자 목사인 헤일스Stephen Hales는 말(馬)의 동맥에 집어넣은 놋쇠 파이프를 유리관으로 연결해 피가 치솟는 높이를 기록했다(사진). 피 기둥의 높이를 직접 재어본, 최초의 혈압 측정자가 되었었다.


▲ 1733년에 말의 경동맥의 혈압을 재는 헤일스 목사 김민아 기자

사람의 혈압은 이로부터 110년이나 지난, 1847년에야 처음 잴 수는 있었다. 헤일즈 목사의 경우에는 말이니까 참았겠지만 멀쩡한 사람에게 같은 방법을 썼다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그래서 혈압 측정은 실생활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이후로 프랑스 의사-생리학자인 푸아죄유Jean-Louis- Marie Poiseiulle (1799~1869), 독일의 실험 생리학자 루드비히Carl Ludwig (1816~1895) 등이 혈압을 재는 기술을 개발했지만 사람의 동맥에 관을 찔러 넣어야 하는 방법으로 혈압 재는 일은 여전히 위험하고 힘든 작업이었다. 안전하고도 간편하게 혈압을 잴 수 없다면 혈압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1855년에 독일 의사 비에로트Karl von Vierordt (1818~1885)는 충분한 압력으로 동맥을 누르면 맥박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외부의 누르는 힘에 동맥이 버티다가 혈액을 보내지 못하게 되는 한계 압력, 바로 그 압력이 동맥의 압력이

란 멋진 추론을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쉬운 원리인데.

동맥의 박동을 사라지게 하는 압력 = 동맥의 압력

그는 동맥의 혈압을 재기 위해 기압(氣壓)을 이용했다. 공기를 집어 넣어 압력을 올리는 압박대cuff를 동맥 주위에 감았다. 이렇게 잰 혈압은, 실망스럽게도 그때그때 다르게 나왔다. 아이디어는 참신한데 아직 정확성이 떨어진, 절반의 성공이었다. 그래도 이 방식은 최초의 환자 혈압 측정법이 됐다.

의사이자 촬영 기사이기도 한 프랑스 사람 마레Etienne Jules Marey는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1860년에 맥박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장치 스파이그모그래프sphygmograph(맥박계)를 발명했다. 1881년에 폰 바슈Samuel Siegfried Karl Ritter von Basch는 스파이그모마노메터sphygmomanometer(맥박+혈압계)라는 긴 이름의 기구를 발명했다. 이 기구는 공기 대신 물 즉, 수압(水壓)으로 압력을 차단했고, 피부 아래의 동맥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보아 동맥 박동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전의 방식은 동맥에 관을 찔러 넣은 침습적invasive 방식인데 반해 새로운 방식은 아주 간편했다. 더구나 동맥을 직접 찔러 넣어 잰 혈압과도 큰 차이도 없었으니 새로운 기술의 승리였다. 호기심 많았던 목사님의 혈압 측정으로부터 150년 만에 혈압 측정이 간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폰 바슈의 방식은 정작 의사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의사들의 오감(五感)에 의한 진찰이 아닌 기구를 이용한 진료방식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더하여 “혈압은 재어서 뭣에 쓰게? 왜 재야 하지?” 같은 ‘혈압 측정 무용론’ 이 있었을 정도로 혈압이란 개념은 의사들에게 무시당했다.

1896년에 이탈리아 의사인 리바-로치Scipione Riva-Rocci는 오늘 날 우리가 사용하는 혈압계의 할아버지뻘 되는 기구를 개발했다. 공기 주입으로 부푼 압박대cuff를 팔에 둘러 위팔동맥brachial artery을 압박했고, 동시에 수은이 가득 찬 유리 압력계에 연결돼 팔의 압력을 보여줬다. 이 방식은 동맥이 완전히 납작해져 피를 더 이상 흘려보낼 수 없어 박동이 사라지는 순간에 팔에 가해진 압력(외부압 = 혈압)을 혈압으로 읽고, 이를 수축기 혈압으로 해석했는데 안타깝게도 이완기 혈압은 잴 수 없었다.


▲ 쿠싱Harvey W. Cushing, 1900년 경. 뇌 신경외과 수술의 개척자로 불린다. 김민아 기자

한편, 저명한 미국 신경외과 의사 하비 쿠싱(Harvey Cushing.1869~1939.사진)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에 리바-로치의 혈압계를 알게 됐고 그 숨은 가치를 인정, 미국으로 들여왔다. 하비는 외과 의사 크릴(George Crile; 클리블랜드 클리닉(Cleveland Clinic)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자 수혈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일을 했다)과 함께 계량된 혈압계와 혈압 측정 기법을 미국과 서유럽에 의료현장에 널리 보급하기 시작했다. 쿠싱은 자신의 영역인 신경외과 병동에서 환자들의 뇌의 압력과 혈압간의 상관 관계를 밝히기도 했으며,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할 때 의사가 확인해야 할 중요한 활력 징후로 혈압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하비 쿠싱은 뇌의 문제가 생긴 환자가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느려지고, 호흡이 불규칙하다면 뇌압이 높아진 상황을 의미한다는 ‘쿠싱의 3징Cushing’s triad’을 확립했다.

1905년에 러시아의 혈관외과 의사 코로트코프(Nikolai Korotkoff, 1874~1920, 러시아 의사, 혈관외과의 개척자)는 혈압을 잴 때 압력이 오르내리는 특정 시기에 혈관에서 일시적인 잡음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혈액이 비정상적인 동맥을 통과할 때 나는 소리로, 혈압을 잴 때는 두 번 발생한다.


▲ 사진1.혈압을 재는 데 사용하는 위팔 동맥의 위치; 팔꿈치에서 정중앙선에서 약간 안쪽으로 치우쳐 있다. 살짝 눌러보면 힘찬 박동을 느낄 수 있다. 사진2. 수은 혈압계 김민아 기자

코로트코프의 소리Korotkoff’s sound라 불리는 이 잡음은 각각 수축기 혈압과 이완기 혈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잡음을 듣고 기록하는 것으로 이제 이 두 가지의 혈압을 잴 수 있게 된 것이다. 코로트코프 방식이 기존의 리바-로치방식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혈압을 ‘촉감’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청각’으로 알아내기 위해 청진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방식은 이전의 촉지법에 비해 훨씬 더 정확하게, 더하여 수축기와 이완기 혈압을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혈압을 재는 표준적인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왜 수은 혈압계를 사용할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수은 혈압계(sphygmomanometer.사진2)의 수은 기둥 높이는 최대 300mm 즉, 30 cm이다. 어지간한 혈압은 모두 이 범위 안에서 잴 수 있다. 하지만 물기둥 높이를 이용해 혈압계를 만든다면 비중을 감안한 높이 즉 13.6배나 긴, 무려 4,080 mm 높이의 기둥이 필요하다. 러시아의 여자 장대높이뛰기 세계 기록 보유자인 이신바예바Yelena Isinbayeva 선수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기록이 2009년 취리히에서 세운 5,060mm 즉 5m 06cm인 것을 고려하면 그 높이를 짐작할 것이다. 혈압계를 물로 만들었다면 2층 높이의 기둥이 필요했을 터이니 수은으로 만들기를 정말 잘했다. 하지만 이제 수은 혈압계도 디지털 혈압계의 등장으로 무대에서 쓸쓸히 퇴장하고 있다.

이것으로 혈압을 재기 위한 긴 여정이 끝났다. 헤일스 목사님의 시도로부터 170여 년만의 일이다. 이제 혈압 재는 일의 오랜 역사를 알게 됐으니 진료실 한 구석에 서있는 혈압계도 그리 허투루 뵈진 않으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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