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 외과 조재형

나는 간이식을 전공한 외과 전문의다. 간이식이란 말 그대로 병들어 있는 기존의 간을 새로운 간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전공의 때만 하여도 간이식만큼은 절대로 전공으로 삼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내가 지금 간이식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환자가 많이 죽어서’였다. 전공 선택을 앞두고 찬찬히 과거사를 곱씹어보니 그 때 내 앞에서 죽어간 환자들이 정말로 죽을 운명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 의문은 이내 ‘살릴 수 있었겠는데?’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힘든 전공의 생활을 끝내고 군의관을 하면서 생긴 마음의 여유 속에 자라난 새내기 전문의의 치기였는지, 아니면 아주 작게나마 가슴 속 깊이 남아 있던 의사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나는 이미 간이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길지만 짧았던 3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5월에 병원으로 복귀를 하였다. 장기간의 공백기도 있었거니와 간이식에 있어서 나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기에 약 3개월간의 수습기간을 거쳐 8월이 거의 다 되어서야 간이식 환자들을 실제로 담당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부족한 나였지만 그만큼 시간을 투자하고 공부를 하면서 환자에게만큼은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환자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

단순하지만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다가갔던 나에게 환자들은 기대 이상으로 부응을 해주었고 모든 이들이 건강하게 잘 퇴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가슴 벅찬 나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갔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시간들이 ‘비기너스 럭(beginner’s luck)’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내가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4개월.

사망률 0%라는 나만의 시나리오는 불과 4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거짓말처럼 수많은 환자들이 불 꺼진 무대 뒤편의 독백처럼 나의 눈 앞에서 임종을 맞이하였다. 나와 그 가족 곁을 떠나간 어떤 환자들의 사연인들 가슴 저미지 않을까마는 유독 나의 기억 속에 각별히 남아있는 한 가족이 있었다. 지금부터 여기에 써내려 가는 것은 처음으로 내 곁을 떠나갔던 환자인 A씨와 그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A씨는 건설회사를 다니고 있던 분으로 한 아내의 남편이자 두 딸의 아버지였다. 그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이 병원까지 오게 된 이유는 한창 때 즐겨 마셨던 술 때문이었다. 직장 생활에서 오는 번뇌 때문이었을지 부하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무던히도 술을 드셨던 모양이다. 퇴직을 하고 겨우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간경화라니, 간이식이라니. 그 가족들이 남편, 혹은 아버지를 모시고 타지의 병원으로 향하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복잡한 검사가 끝난 뒤, A씨에게 최종적으로 간을 기증하기로 한 사람은 그의 막내 딸인 B씨였다. 두 부녀가 우리 병원까지 오게 된 것에는 두 사람의 혈액형이 맞지 않았던 것도 한 몫을 하였다. A씨는 혈액형 부적합 간이식을 위하여 수술 전 혈장 교환술을 시행 받고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수술 후 회복에도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수술 후 2주일이 지날 무렵, 모든 간이식 환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괴롭히는 담도 관련 문제가 발생하였다. 문합한 담도 부위에서 담즙이 새어나오면서 배 속에 탁구공만한 웅덩이를 형성한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한 염증을 해결하기 위해 배액관을 삽입하고 자연스럽게 담즙이 새어 나오는 구멍이 막히기를 기다렸지만 문제는 도무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수술을 한차례 더 진행하여 담도 재문합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재수술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담즙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 것도 더 시도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배액관을 넣어둔 상태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A씨의 정신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결국 설상가상으로 섬망 증상까지 찾아왔다.

“저기 문 앞에 누가 서 있어.”

A씨가 말하면

“아유, 누가 서있다고 그래요.”

라고 그의 부인이 달래주었다.

“아니, 저기 사람이 서있잖아. 안보여?”

간이식 경력이 이미 3년째에 접어든 지금이야 대부분의 섬망 환자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당시에는 온 몸에 털이 곤두서곤 하였다. 저승사자 같은 존재가 그런 식으로 보이는 것인지 그는 자주 누군가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러다가 컨디션이 조금 좋아질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A씨는 나를 불러 퇴원을 시켜달라고 하였다.

“내가 오늘은 꼭 사무실에 가봐야 해. 내가 없어서 직원들 관리도 안되고 말이야.”

회사에 몸을 담았을 때가 가장 찬란했던 시절로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지 A씨의 주된 관심사는 이미 그만 둔 회사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뿐이었기에 10분이고 20분이고 A씨가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다른 것을 더 이상 해줄 수 없다는 미안함 때문이기도 하였고,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 마치고 나면 마치 A씨가 훌훌 털고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에 현실감 없는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서 있는 그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중, 나는 차마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기증자였던 B씨가 임신 중이었다는 것이다. 임신 추정일은 간이식 수술을 받기 전으로, 배 속에 있던 태아는 잉태가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신마취 및 CT 검사, 그리고 진통제를 비롯한 각종 약제들에 노출이 된 셈이었다. 수혜자인 A씨의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기증자의 태아까지 문제가 생긴다면 두 사람을 모두 담당하고 있었던 의료진으로서 평생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지내게 될 것이 뻔하였다. 참으로 무능하게도 수혜자와 기증자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부디 A씨가 무사히 회복되어 퇴원한 뒤 건강한 손자를 안아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쉽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간 이식편의 중간정맥을 대신하기 위하여 연결한 인조혈관까지 담즙에서 생성된 농양이 침범하여 A씨의 몸 곳곳으로 혈전색전증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한 순간에 손쓸 틈 없이 급격하게 진행된 증상의 변화로 인해 A씨는 결국 중환자실 신세를 지게 되었고 의식이 없는 상태로 인공호흡기를 달고 연명치료를 시작하였다. 짧은 경험만으로는 모든 죽음을 막을 수 없음을 그제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고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A씨는 내가 처음으로 잃게 된 환자가 되었다. A씨를 떠나 보내고 꽤 오랫동안 환자를 잃은 아쉬움과 죄책감에 가슴앓이를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은 환자를 담당하게 되면서 A씨에 대한 기억도 점차 잊혀져 갔다. 일에 치여 사는 바쁜 일상과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망각이라는 축복이 도움을 주었고 또 다른 안타까운 죽음들이 그 기억을 희석시켜주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누군가는 보기 싫었는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억의 파편들이 호수 위로 떨어지곤 하였다.

데이터 정리.

간이식 팀의 임상강사는 환자를 담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논문 작성을 위한 데이터를 모으는 일도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최근 몇 년간 간을 기증한 기증자들이 찍은 CT 검사 결과에 대한 데이터를 모으는 중이었다. 간 기증자들은 수술 후 1주일, 그리고 4개월째 모두가 CT를 찍어서 별 탈없이 회복하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내 데이터에는 4개월째 CT를 시행하지 않아서 공란으로 남아있는 빈 칸이 하나 있었다. A씨의 딸이자 기증자인 B씨의 데이터였다. 왜 꼭 사람의 기억력은 쓸데없는 곳에서 능력을 발휘하는지. 빽빽하게 들어찬 숫자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빈 칸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조그만 네모 칸 속의 바다에 얼굴을 담그고 쌉싸름한 숨을 들이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깊이 박혀있던 하나의 장면, 섬망에 빠진 환자가 1인실에 누워서 끊임 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하염없이 듣고 있는 내 뒷모습이 떠올랐다. 참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기증자가 생명을 잉태했기 때문에 4개월째 CT를 찍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저 ‘쓸모 없는 데이터’ 정도로만 치부했을 그 빈 칸이 나에게는 가슴 깊숙이 숨겨두었던 아픔을 끄집어 내는 연결 통로가 되어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흘러 내가 간이식 팀에 몸을 담은 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2년 동안 주말에도 쉬지 않고 매일 병원에 나와 나름 열심히 지냈었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채워지는 것보다 더 많은 공허함이 남았던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충분히 지쳐가던 중 나는 어렵게 결정을 내려 간이식 팀을 그만두게 되었다. 지친 마음을 추스리고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할 시간이 너무나 간절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을 가슴에 품고 다음 후임자가 올 때까지 묵묵히 나의 흔적들을 정리하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마침 교수님 외래에 인력의 공백이 생겨 내가 도와드려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우연도 그런 우연이 있을까, 일을 그만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외래에서 기증자였던 B씨를 만나게 되었다. 바쁜 외래 중이었기에 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가벼운 목례밖에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B씨는 외래가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와 나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 몇 마디 인사가 오간 뒤 그녀가 나에게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

“그 때 출산한 아기에요.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녀의 웃는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을 보게 된 나는 지금도 그 때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다만, '아이가 너무 예쁘네요'라던지 '아버지도 분명 잘 지켜보고 계실거에요' 같은 상투적인 대화도 나누지 못한 것이 매우 후회가 될 뿐이다.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만남은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그녀의 아이, A씨의 손주를 보니 가슴 속에 오랫동안 고여있던 하나의 기억이 비로소 물줄기를 만나 흘러가는 기분이 들었다. A씨를 꼭 닮은 그의 딸이었기에 지금 자라나는 아이 역시 그를 닮게 되지 않을까. 직접 만나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녀가 보여준 사진 속의 아이를 통해 B씨의 가족들이 A씨에 대한 기억을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길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를 만나게 되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지긋이 안아주고 싶다.

간이 좋지 않은 환자들은 대부분 중한 환자들이다. 그들은 삶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품에 안고서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간을 새로운 간으로 바꾸게 된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결과가 좋아서 원하는 삶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새로운 삶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보면 제 3자인 내가 어찌 감히 모든 가족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 빈자리는 또다른 무언가로 채워질 것이라 믿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남아있는 다른 가족에 대한 소중함, 혹은 새로운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이지 않을까 싶다.

A씨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그의 장례식장을 찾아갔었다. 가족들은 최선을 다하였고 다만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조금이나마 그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기에 향한 발걸음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A씨의 가족들로부터 내가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B씨가 새로 태어난 아이로부터 행복을 얻었고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그 사진이 내 마음 속의 어둠을 빛으로 바꿔주었다. 나는 과연 얼마나 많은 환자들의 마음을 밝혀주었을까?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병원으로 돌아와서 간이식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간이식 팀에 몸담았을 때 수술 받았던 환자들을 자주 병원에서 마주치게 된다. 왜 요즘은 얼굴을 볼 수가 없는지, 외래는 이제 안보는 건지, 나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환자들에게 나는 말하곤 한다.

“저는 안보는 게 좋아요. 저를 보려면 아파야 하거든요.”

별 탈 없이 잘 회복해준 환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면서도 내가 왠지 제자리에 있지 않는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함께 든다.

Replace.

바뀌어서 행복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위해서는 단 하나의 변함없는 가치가 필요한가 보다. 환자들이 나에게 가르쳐준 그 가치는 일관적으로 환자만 바라보는 의료진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비록 나는 지금 제자리를 벗어나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행복하게 살아주는 모든 이에게 다시금 감사 드린다.

한미수필문학상에는 꽤 오래 전 투고를 하였던 적이 있어 이후 유지영 기자님께서 매년 메일을 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워낙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글이라는 것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중 2019년 연말에도 어김없이 메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해야 할 일들이 왜 그리 많은 건지, 마감일이 다 될 때까지 메일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일상이 지나치게 조여들 때 누구나 짧은 일탈을 꿈꾸듯 마감 전 날 글을 한 편 쓰고 마감일에 2번의 탈고를 거쳐 작은 수필을 하나 보내게 되었습니다. 워낙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환자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글을 쓰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으나 행여나 미처 신경 쓰지 못한 표현으로 인해 여전히 환자를 그리워하고 있을 가족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아직까지 마음 한 켠에 남아있습니다.

간이식을 2년간 하면서 많은 환자들을 만났고 간이식의 특성상 환자-의사 사이의 관계가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워낙 가까울 수밖에 없다 보니 제가 만났던 대부분의 환자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도 일선에 남아서 간이식을 하고 있어야 할 것이지만, 몇 달 전부터 저는 이식의 중압감에서 도피 하여 입원환자들을 담당하는 전담의로 근무를 시작하였습니다. 2년간 배운 지식을 환자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전담의로 근무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글을 쓰면서 “환자와 그 가족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갈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할 의사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면서 정작 나의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외면한 것은 아닌가”하는 자기반성적인 의미를 함께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수필을 한 편 쓰는 것이 저에게도 다시 한 번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게 해주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이러한 기회를 만들어주신 청년의사 및 한미약품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시간에 쫓기느라 환자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충분한 탈고 없이 글로 표현하게 되어 아직도 부끄러움이 많이 남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에 좋은 평가를 주신 심사위원께도 감사를 드리며 끝으로 환자의 가족 분들이 부디 좋은 기억들로만 삶을 채워나가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쁜 남편과 아빠를 항상 응원해주는 아내와 딸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