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라병원 소아청소년과 이동준 과장

출국장으로 멀어져 가는 아내와 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보고 있자니 착잡해진다. 수술에 필요한 준비를 위해 먼저 출발하는 가족들이 바다 건너에서 애쓰는 동안 나는 그저 초조함을 견딜 수밖에 없다. 반복되는 무력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근 삼 년간 무력감은 나의 일부였다. 시상하부과오종(視床下部過誤腫). 마치 어느 종교의 이름이나 무협지 속 주문처럼 들리는 이 병은 아이의 생후 이틀째, 우연히 시행한 초음파 검사를 통해 처음으로 우리 가족의 틈을 파고들었다. 당시 국가 공인의 전문의 자격을 목표로 수련 중이었지만 교과서엔 불과 몇 줄 언급되고 마는 이 희귀질환에 대해 나는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간신히 병의 이름만을 앞세워 검색을 시작하자 이내 심장이 요동쳤다. 난치성 뇌전증, 웃음경련, 성조숙증, 정신지체. 냉혹한 용어들로 채워진 각종 자료들을 읽으며, 바로 전날 흘린 감격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절망의 눈물이 고였다. 인생이라는 괴물의 소리 없는 일격이었다.

악성 종양은 아니라는 사실조차 위로가 되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그저 휠체어에 앉은 채 병원을 드나드는 오래된 뇌전증 환자들의 멍한 표정과 지친 듯 웃던 그 부모들의 얼굴이 불길한 예언처럼 떠오를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의사인 아버지로서 딸의 병을 두고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병원의 외관은 상상했던 국립 병원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단정하고 청결하지만 적당히 낡았고 실용적으로 반듯한 건물. 심미적 요소를 배제한 무채색 페인트는 용무가 없는 이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 애쓰는 듯 보인다. 그래도 우리 가족이 한 달 간 지내는 곳은 최근 신축한 병동인지 내부로 들어서니 꽤나 밝고 널찍하다. 병원의 소재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탄생시킨 니가타(新潟) 현. 하지만 3월의 이곳은 ‘열차가 긴 터널을 지나면 도착하는 눈의 나라’의 낭만은커녕, 변덕스런 시어머니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강풍과 소나기, 때론 우박마저 쏟아지는 곳이다.

수술 전 검사부터 수술 후 경과 관찰까지 입원 기간은 총 4주. 일개 봉직의로서 ‘한 달 쉬겠습니다’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월급 주시는 분과 동료들의 배려 덕에 수술 당일을 포함한 2주를 합류하게 되었다. 짧은 영어와 그보다 더 되도 않는 일본어를 총동원하여 ‘요로시꾸 오네가이시마스’를 연발하며 아내와 나란히 앉아 담당의의 설명을 듣는다. 관련 문헌에서 이미 수 없이 본 MRI 영상이건만, 막상 수술 동의서에 서명해야 하는 부모로서 자식의 뇌 관상 단면을 마주하자 불안이 엄습한다. 진단을 처음 알게 된 날부터 오늘까지 2년 반의 시간 동안 잘 누르고 다독여 기껏 봉해 놓은 감정의 껍질이 깨지고 처음의 그 성마른 분노와 당혹스러움이 다시금 거친 표면을 드러낸다. 혼란스런 마음이 현재의 처지와 부딪혀 생기는 묘한 비현실감. 의사의 설명이 통역을 거쳐 분명 내 귀에 들리고는 있는데, 남의 일만 같다. 문득 느껴지는 이 기시감은 무엇일까.

병을 알게 된 충격에도, 출산을 축하해준 모든 이들에게 태연한 척 건강한 ―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 아기의 탄생을 알리고 감사를 전해야만 했던 그 때. 아직 병에 대해 자세히 듣지 못한 아내는 녹초가 된 몸으로도 마냥 사랑스럽기만 한 핏덩이를 품에 안고 잘 돌지 않는 젖을 물리려 애쓰던 그 때. 나는 지인들을 위해 답례용으로 주문해 놓은 기념 호두과자를 찾으러 병원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가게를 향해 걸었다. 8월 말의 오후였지만 덥기보다는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는데, 가뜩이나 위축된 마음에 병원의 실내 냉방까지 더해 손발이 몹시 차가워져 있음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출산 장소가 곧 직장이었기에 매일같이 오가던 주변 풍경이었지만, 낯설었다. 사흘 만의 첫 외출인 까닭만은 아니었다.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충격에 휘청이던 마음이 무심한 듯 태연하게 흐르는 바깥의 일상을 마주하자, 거리를 두어 스스로를 보호하려 애썼던 것이다.

‘나의 삶은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저들과 달라졌다.’

자기중심적 상념에 잠긴 채 걷는 내 곁으로 지나가는 사람과 차들, 거리의 소음은 흑백 무성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전의 장밋빛 계획들은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하리라 단정하며, 그렇게 비현실적인 세상 속에서 계속 외로워져만 갔다. 타인의 일상조차 나에겐 폭력이었다.

수술 전날. 밤새 금식을 해야 하기에 오늘은 생애 처음으로 딸을 엄마와 떨어뜨려 재우기로 한다. 아직도 엄마 젖을 무는 까닭이다. 서른 달을 살아오는 동안 아이는 하루도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백일 무렵까지만 해도 다른 아기들처럼 그저 어려서 긴 잠이 없는 것으로 믿으려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잠이 길어지긴커녕 오히려 더 예민해지고 이유 없이 울며 깨는 일이 빈번해졌다. 병의 대표 증상인 웃음경련(gelastic seizure)은 영아기엔 ‘웃음’이 아닌 ‘울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해서 감별이 어려운데,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도 아마 증상이었으리라. 그러더니 10개월 무렵부터는 확연히 ‘괴상한 웃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겁에 질린 듯한 발작적인 웃음이었다.

매일 밤 짧으면 5초, 길면 수십 초 이상 수차례씩 반복되는 경련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안아주면서 젖을 물리는 것뿐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는 이제껏 모유 수유를 못 끊었고 자연히 아내도 3년 가까이 밤마다 모로 누워 꼼짝없이 벌을 선다. 잠이 부족한 모녀의 하루는 항상 그렇게 뿌연 안개 속이다.

그래도 ‘내일이 지나면 달라질 것이다’, ‘실감나지 않는 이 며칠이 지나고 나면’이라는 희망에 먹먹해지는 마음을 다독인다.

모든 면에서 보통보다 느린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은, 애타긴 했지만 돌이켜보건대 전부 실망스런 것만은 아니었다. 아이는 존재 자체로 빛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아주 사소한 변화조차 벅찬 감격이 되는 것은 우리 딸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그렇다면 더 예후가 나쁘고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가정에도 비슷한 위로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리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큰 시련이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비교적 가까운 일본에 믿을만한 치료가 존재했고, 수술 비용도 지불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여전히 불안하긴 해도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해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고마운 마음도 가능한 게 아닐까? 처음 진단을 알게 되었을 때 먼저 떠올랐던, 평생 내게 말을 걸 수도, 자연스런 미소조차 지을 수 없는 아이를 품고 살아야 한다면 과연 그 때에도 같은 마음일까? 또는 반대로, 콧물이 일주일째 멈추지 않는다고, 열이 이틀째 지속된다고 밤낮을 걱정하는 부모의 고민을 ‘고작’이란 수식어로 폄하할 수 있을까? 톨스토이의 절묘한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이 암시하듯, 누가 감히 순위를 매길 수 있을 것인가?

시스템은 냉정하게도,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응급실에서는 환자가 오면 일단 트리아지(triage)라고 해서, 상태의 경중을 따져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국가는 아예 질병에 등급을 매겨 지원하는 의료 서비스의 범위를 차별화한다. 그것이 시스템이다.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아이의 병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남의 염병이 제 고뿔만 못함’이란 오랜 격언이다. 인간이란 결국 자기 자신의 입장을 기본값으로 하는 존재이기에, 그래서 이런 장치라도 없으면 복지는 무너진다. 그러나 객관적인 지표와 무관하게, 모든 병은 아픔을 수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아픔’에 집중해야 한다. 쉽게 숫자로 바뀌는 병명이나 증상으로서의 아픔이 아니라, 각자에겐 유일한 것이라서 온전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그런 아픔에 대해. 그 일선에 선 의료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지금처럼 정보와 기술이 넘치는 세상에서 의사의 쓸모란 타인의 아픔과 공명하고 슬프게나마 웃어주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아.빠.랑, 책.보.까?”

곰살맞게 웃는 얼굴로 고사리손엔 그림책을 들고, 무릎 위에 냉큼 앉으며 속삭이는 아이의 혀 짧은 한마디. 어찌나 반가운 일인지. 다행히 수술은 계획한 대로 잘 끝났고, 하루에도 여러 번 나타났던 웃음경련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 밤새 곤히 잠을 잔다. 잘 걷지도 못하고 시선도 마주치지 않던 녀석이 불과 6개월 만에 지금은 제법 뽐내는 얼굴을 하고 보란 듯이 미끄럼틀을 오르내린다. 경련파(痙攣波) 때문에 뒤처졌던 각종 발달 과정을 열심히 따라잡고 있는 중이다. 자연스런 그 모습이 때로는 낯설면서도 안심이 된다.

그러나 아이가 평소보다 격하게 웃기라도 하면 여전히 가슴이 철렁, 증상의 재발은 아닌지 긴장한다. 많이 웃을수록 슬퍼지는 이 병의 모순은 아마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일반 학교를 다닐 수 있을지 여부도 아직은 장담할 수 없어 차별과 혐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안타깝다. 병의 또 다른 증상인 성조숙증은 수술로는 예방되지 않기에 계속 예의주시해야 한다. 병 자체와 싸우기에는 아버지로서, 또한 의사로서도 한계가 있다.

결국 내가 할 일은 단순하지만, 분명하다. 딸의 아픔과, 그로 인한 우리 부부의 아픔을 그저 품고 살아가는 것.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걷는 그 길 어딘가에 바스러진 내 무력감의 껍질이 떨어져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가 아픈 것을 알게 된 지인들로부터 종종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빠가 소아과 의사라 다행이네요.”

위로의 표현이고 어떤 마음으로 건네는 말씀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가끔은 그 말이 명치 부근에 묵직하게 눌러앉곤 합니다. 진료과목이 세분화된 현대 의료의 틀에서 훈련 받은 저에겐 비의료인과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지식만으로 낯선 병에 맞서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되는 일이었습니다. 피붙이를 환자로 마주하는 많은 의사들에게 비슷한 감정이 들지 않을까 싶지만, 의사로서 경력이 그리 길지 않은 저로서는 더욱,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과정이었고 지금도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의사 역시 환자 혹은 누군가의 보호자이다’는 당연한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었습니다. 보호자인 의사가 진료실에 앉아 수많은 보호자들의 구구절절한 chief complaint 을 듣고 있자니, ‘우리 애도 아픕니다’하는 짜증 섞인, 프로답지 못한 생각에 말이 예쁘게 안 나가다가도 한 번 더 생각하면 오죽하겠나, 싶어 마주 앉은 이의 지친 눈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감정 기복을 겪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게 공감인가, 하는 생각으로 글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개인적인 요구를 더해, 힘들었던 순간을 어떤 식으로든 객관화해서 정면으로 마주보고,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 가족의 싸움을 이어 나가는 원동력으로 삼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비록 직접 진료를 시행한 전문 과목의 의사가 아니라서 망설였지만 개인적으로 의사-환자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분명한 경험이라 생각했기에 용기를 내어 응모하였고, 취지를 헤아려 주신 덕에 값진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치의이자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가족에게 더욱 헌신하라는 격려로 알고 분발하겠습니다. 세 분 심사위원들과, 기회를 마련해 준 청년의사, 한미약품에 다시 한 번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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