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아청소년과 유인철 원장

이리저리 늘어진 링겔 줄, 깜빡거리는 바이탈 싸인 모니터. 그 아래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있는 환자.

‘어라? 원래 이렇게 왜소했나?’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면 언제라도 안아주고 다독여 주는 분, 널따란 품을 가진 거인, 엄마는 절대 깨지지 않을 쇳덩어리인 줄 알았다. 4남매를 혼자 키워내고, 철의 삼각지 전투에서 눈을 다쳐 20대 초반에 실명을 하신 아버지를 여든이 넘도록 돌봐 왔으니. 그런 엄마는 이제 없다. 무릎이 퉁퉁 부어 잘 걷지 못하고 심장혈관이 막혀 시술을 받은 환자, 자칫하면 부서질 거 같은 유리였다.

“바쁜데 왜 왔어?”

산소마스크를 거쳐 나오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엄마 보러 왔지.”

“병원은 어쩌고?"

늘 내 걱정부터 하신다.

“대신 보는 의사를 구해놨어요.”

엄마랑 같이 지낸 시간이 철들고 나서 얼마나 될까. 명절에나 겨우 왔다 길이 막힌다고 부리나케 돌아가는 게 전부인 것을. 며칠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 대진의를 구했다. 전화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보다 직접 간병을 하면 치료에 더 도움이 되겠지 하는 계산도 있었다.

4인실 내과병동, 습기를 잔뜩 머금은 듯 공기가 무겁고 답답하다. 59세 간경화, 66세 당뇨합병증, 78세 만성폐쇄성 폐질환 그리고 엄마. 사연은 달라도 호칭은 다 같다. ‘환자’

“아부지 저녁은?”

“아이참! 지금 아부지 밥 걱정할 때야?”

“밥은 먹어야지.”

반려견이 주인이 매놓은 목줄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엄마의 생활반경은 아무리 길어야 반나절거리다. 밭에 가도, 마실을 가도, 장엘 가도 때가 되면 얼른 돌아와 아부지 밥부터 챙겨야 한다. 평생 해온 습관은 환자가 돼도 어디 안 가는가 보다.

불이 꺼지고 TV도 꺼져 소음이 잦아든 병실에 하나 둘 잠이 찾아 들었다. 보호자 침대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선잠을 자는데 “쿵!”, “터-억!”, “아이쿠!” 하는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엄마가 링겔대와 함께 바닥에 쓰러져있다.

“엄마 왜 그래?”

“화장실에 가려고.”

“왜 안 깨웠어요?”

“곤하게 자는 거 같아서.”

간호사가 달려오고 환자들은 잠을 깨 웅성거리고, 한 바탕 소란을 피운 후 다시 조용해졌다. 잠은 멀찍이 달아나고 상념은 더 멀리 시골집 하늘을 난다.

엄마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아주머닌 관상이 참 좋네요. 공부만 했더라면 한 가닥 했을 분입니다”란 말을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짬이 나면 “홍도-오-야-아 우지마-아라”, “뱅-마-강 다-알-바-암에”를 부를 정도로 흥이 넘치고 우스갯소리를 잘해 좌중을 들었다 놨다하는 분이다. 외할아버지에게 배운 ‘가갸거겨’를 기초로 한글을 깨쳐 ‘바더 보아라. 잘 지내고 인느냐’라고 쓸지라도 자식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엄마고, 춘향전을 아무리 듣는다 한들 책속에 들어있는 참 재미를 모르는 아부지를 위해 책방엘 가는 아내다. 한문은 ‘너 죽인다’고 써놔도 알 수가 없다며 갑갑해 하고, 갑자(甲子) 을축(乙丑)은 언제고, 며칠 있어야 입춘(立春)인지 알고 싶어 하는 아부지를 위해 독학을 해, 농협에서 주는 간지달력을 척척 읽어 내는 학생이셨다. 무학이지만 생활기록부엔 학력을 체면상 국졸로 썼는데 실력은 고졸 뺨칠거다.

“아이구 할머니, 한자도 쓰실 줄 아세요?”

“나 하버드 나왔잖어!”해서 동사무소를 웃음바다로 만드는 넉살.

이런 엄마한테 아부지 밥이 무슨 대수라고, 아들이 잠을 못 자면 어찌 될까봐 병실에서 조차 당신은 뒷전이요. 하루라도 오롯이 당신을 앞세울 수 없던 엄마의 삶이 애처롭고, 엄마의 운명이 야속했다.

“어제 넘어지셨다는데 괜찮으세요?”

“괜찮으신 거 같은데 밤에 변에서 피가 나왔다고 하세요.”

“그래요? 할머니 어떠세요? 배 안 아프세요?”

“안 아퍼요. 아침도 다 먹었는걸요.”

같이 온 주치의에게 교수님은 내시경을 준비하라며 회진을 끝냈다.

내시경이라? 아버지와 우리 남매들이 “속이 쓰리다. 배가 아프다. 소화가 안 된다”고 하면 ‘뭔 사람들이 그리 약해빠졌냐!’며 혀를 차던 분이다. 대장내시경 준비를 위해 장 세척제를 가져 온 간호사에게 주치의 면담을 신청했다.

“선생님, 내시경을 보류해 주세요. 엄마가 안 아프다하고, 여기저기 눌러봐도 이상 없는 거 같아요.”

“혈변이 나왔으면 어디가 문젠지 확인해야 합니다.”

“혹시 심장 때문에 드시는 아스피린 때문 아닐까요?”

“보호자 분이 어떻게 아세요?”

“저도 내과는 아니지만 의사입니다.”

“그러세요? 그럼 제 입장을, 3차병원의 입장을 더 잘 아시겠네요?”

“네 그렇지만 별 일 아닌 거 같고, 더구나 무릎 때문에 잘 걷지를 못해 장 세척제를 먹고 계속 화장실을 다니는 건 힘들 거 같아요. 환자 상태를 고려해 좀 연기를 해도 될 듯합니다.”

“안 됩니다. 보호자 분이 주치의까지 하려들면 우리가 치료를 못합니다.”

너무 나섰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엄마는 별 이상이 없고 혈변도 나오질 않아 내시경을 하느니 마느니 실랑이를 하다 결국 유야무야됐다.

뭔 피를 아침마다 뽑고 온종일 검사만 하러 다니냐, 치료하러 온 건지 검사하러 온 건지 모르겠다며 투덜대는 여동생에게 대학병원은 원래 그렇다고 말했지만, 막상 보호자가 되고 보니 의사인 나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평소 소아청소년과 진료를 하면서 환자가 밤에 아파서 응급실에 갔었다고 하면 어떤 약을 받아왔는지 무슨 검사를 했는지 물어본다. 대답은 한결같다. 열나면 피검사·소변검사, 배 아프면 x-ray, 기침해도 x-ray, 머리 아프면 CT 등. 응급이 아니라도 응급실에 오면 응급환자로 예단하는 진료. 하긴 나도 대학병원에 있을 땐 그랬다. 병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떤 병인지를 최종 판단을 해야 하는 대학병원의 입장이 있긴 하지만, 판에 박힌 기계와 다름없는 진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의사들은 원격진료를 반대한다. 환자진료라는 게 컴퓨터 화면을 통해 고장 난 부위를 찾아내는 것 같은 디지털 방식이 아니라, 의사와 환자가 마주앉아 보고 듣고 만져보고 두드려보며 직접 소통하는 아날로그적이어야 한다는데 더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럼 원격진료를 하지 않는 지금 그런 진료를 하고 있나? 원격진료를 반대하기에 앞서 의사들은 이 질문에 대답부터 먼저 해야 한다.

주치의가 회진을 와 주말쯤 퇴원하시란다. 심장은 좋아졌지만 무릎이 완전치 않아 더 있겠다고 하자 곁에 있던 간호사가 대뜸 “여기가 여관인줄 아세요?” 하는 게 아닌가. 차마 바로 대꾸는 못하고 병동 스테이션에 있는 수간호사에게 간호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 항의를 했다.

이튿날 아침 회진 시간, 여기선 더 이상 해줄 게 없으니 필요하면 요양원으로 가라며 덧붙이기를, 사실 병실료가 여관비보다 싸다고 교수가 간호사보다 한 술 더 뜬다. 간호사가 어제 한 말에 대해 내심 사과를 기대하고 있다 듣는 전혀 생각지 못한 발언에 병실료를 내가 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잠자코 있을 수밖에. 처치가 끝나고 검사도 더 이상할 게 없어 치료만 받는 환자는 의사와 간호사가 번갈아가며 퇴원을 종용하는 진료가 영리병원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이러면서 제주도가 하려는 영리병원은 무슨 낯으로 반댈 해 무산시키는데 일조를 했는지.

원무과에 내려가니 교수님이 퇴원하라 했으니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 부탁하신 1인실은 언제 날지 모른다, 지금도 입원 대기환자가 수십 명이 넘는다는 하나같이 실망스러운 소리만 골라서 한다. 대학병원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데가 아니라 마치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끊임없이 밀려드는 고장 난 물건을 수리하는 A/S 센터 같고, 컨베이어벨트가 한 바퀴 돌고나면 원하던 원치 않던 튕겨져 나와야 하는 심정이랄까.

여동생과 손을 바꾸고 병원을 나섰다. 병실과 달리 공기는 맑고 상쾌했지만 마음은 천근 짐을 진 것처럼 무거웠다. 좋은 시설에서 편안하게 치료받게 해드리고 싶단 바람을 이루지 못해. 엄마는 언제나 날 안아주고 다독여 주었는데, 나는 엄마에게 그러질 못하는 죄송함으로.

자동차 백미러엔 잘 가라며 손을 흔드는 엄마가 아니라 거대한 병원건물만이 비치고 있었다.

‘날씨 맑음. 숙제했다, 심부름했다, 친구들과 놀았다’라는 방학숙제로 처음 시작한 국민학교부터의 일기를 대학교 때 그만뒀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같은 하숙집 친구들이 일기를 훔쳐본다는 거였지만 그 뒤에 있는 진짜 이유는 더 이상 내 부끄러운 하루를 솔직히 고백하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진실하지 못한 일기는 쓸 필요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일기를 못 쓴다는 건 내가 걷는 길이 똑바르지 못하고 삐뚤삐뚤하다는 걸 겁니다.

마흔이 넘도록 시험 보는 악몽에 시달릴 정도로 힘들었던 과정을 마치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을 때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그 동안 쓰지 못한 일기가 얽히고설킨 실타래마냥 커다란 덩어리로 내속에 들어있다는 걸요. 그 덩어리를 하나하나 풀어 수필로 쓰고, 책을 만들고, 등단을 하고, 공모전에 응모해 상도 받았습니다. 일기를 안 쓰고 수필을 쓴 건 나를 ‘온전하게’가 아니라 조금만 보여줘도 된다는 얄팍한 생각으로 서였지요.

10년 만에 다시 응모를 하고 기다리던 수상 메일을 받았습니다. 기쁩니다. 상을 받았으니까요. 한편으로 별로 안 좋기도 했습니다. 그 때와 똑같은 상, 다시 말해 글쓰기가 별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증거라서요.

제 글쓰기의 격려이자 정신이 번쩍 드는 따끔한 매라 생각합니다. 자신을 대충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 온전하게 다 보여주는 글을 쓰라는 충고로 알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걸어갈 길도 덜 삐뚤거리고 차차 똑발라 질 수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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