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의료법, 죽음 준비하는 사회문화로 변화 가져왔지만 현장은 여전히 진통
'임종과정' 판단 오로지 의사 몫…전문가들 “연명의료결정 심적부담 완화 필요"

최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선택한 삶의 마지막에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김 전 회장은 별다른 유언은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무의미한 연명의료는 받지 않겠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음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가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고 떠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연명의료는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임종과정의 환자에게 임종 시간만 연장하는 의료행위를 의미한다.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체외생명유지술(에크모), 수혈,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혈압상승제 투여 등 7가지 의료행위가 이에 포함된다. 임종과정에 들어선 환자에게 죽음의 시기만 연장하는 불필요한 의학적 행위를 하지 말고 존엄한 죽음을 맞도록 하자는 게 연명의료결정법의 목적이다.

이에 ‘연명의료 거부 결정’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국가생명윤리정책원에 따르면 지난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되고 지난해 10월 31일까지 집계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 수는 43만457명, 연명의료계획서 등록자 수는 3만1,616명이었다. 이에 따라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 이행에 7만995명이 참여했다.

특히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누적 등록자 수는 지난 2019년 5월 22만170명에서 6월 25만6,025명, 7월 29만9,248명, 8월 33만7,659명, 9월 37만8,350명, 10월 43만457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연명의료계획서 누적 등록자 수도 지난해 5월 2만2,649명에서 6월 2만4,327명, 7월 2만6,252명, 8월 2만7,940명, 9월 2만9,746명, 10월 3만1,616명으로 증가했다.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길 꺼려하는 한국에서 연명의료결정제도는 죽음을 준비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사회 문화보다 제도가 앞서 만들어지면서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자료제공: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연명의료 중단결정에 부담 느끼는 의사들

연명의료 중단결정이 내려지기 위해서는 우선 환자가 임종과정에 들어섰다는 의학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이는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인이 결정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했다 하더라도 사망에 임박했다는 의학적 판단이 있어야 연명의료 중단 여부의 논의가 시작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연명의료 중단결정을 ‘임종과정’으로 제한해놓다보니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박탈하고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모순이 발생해, 연명의료결정법의 목적과 상반된 결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행법에서는 회생 가능성이 없고 회복할 수 없는,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돼 사망에 임박한 상태를 임종과정으로 보고 연명의료 중단의 근거로 명시했다. 때문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했다 하더라도 사망에 임박한 상태가 아닌 경우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행위와 영양분·수분 공급, 산소 공급 등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특히 환자의 회복 가능성을 의미하는 의학적 판단은 의사의 의학적인 경험이나 의료기관의 수준 등 의료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임종과정을 결정 짓는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이를 판단해야 하는 만큼 의사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아산병원 고윤석 교수(호흡기내과)는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연명의료결정 중 가장 힘든 게 무엇인지 묻는 설문조사에서 ‘연명의료결정에 대한 심적 부담’이 답변으로 가장 많이 나왔다”며 “말기나 임종과정에 대한 의학적인 판단은 환자의 회복 가능성을 보는 것인데 실제 말기와 임종기가 문을 열고 닫는 것처럼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고 교수는 “그 회색지대를 의료인의 판단으로 결정하라고 하니 현장의 의사에게 큰 부담이 실리게 되는 것”이라며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작동하려면 제도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바탕이 돼야 하고 사회문화 형성이 우선”이라고 했다.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허대석 교수도 “법은 좋은 취지로 제정됐지만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입법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세계 어느 나라도 말기와 임종기를 구분하지 않는데 우리는 이를 나눠 제도를 복잡하게 만들어 놨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연명의료법은 임종기 환자에게 고통을 주지 말자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환자 입장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라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명의료 의사 밝혀도 70%는 가족 의견 따라

더불어 연명의료결정에 대한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수 없는 경우 ‘가족 전원’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조항도 의료현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혔다.

연명의료법에는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고 환자가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의학적 상태인 경우 환자 가족 전원합의로 연명의료중단 등의 결정을 하고 담당의사 및 해당분야 전문의 1인이 확인하도록 명시돼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의 직접적인 의사표현 보다는 가족의 합의와 결정으로 연명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체 연명의료 중단·유보 환자의 67.1%가 이 경우에 해당했다.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로 연명의료를 중단한 경우는 1만8,775명(34.8%), 환자 가족 2명 이상의 일치된 진술로 연명의료를 중단한 경우는 1만7,387명(32.3%)이다.

의료 전문가들은 연명의료 결정을 할 수 있는 대리인 지정을 허용해 가족과 함께 동거하지 않거나 가족이 없는 무연고자의 연명의료 결정을 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대리인 지정을 허용하는 무연고자의 연명의료 결정 방식은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영국이나 일본, 오스트리아 등에서는 무연고자의 경우 가족은 아니지만 연명의료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 ▲담당의사 ▲윤리위원회 ▲후견인 등을 두고 있다.

허대석 교수는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취지로 법이 제정됐는데 정작 환자 본인보다 가족들이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며 “더욱이 연명의료 중단에 동의해줄 가족이 없는 1인 가구나 독거노인은 모두 무연고자로 법 적용도 받을 수 없도록 돼 있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세계적으로도 추정과 대리를 구분하지 않고 대리인 범위도 보다 폭넓게 보고 있는 추세”라고 강조했다.

고윤석 교수도 “연명의료 중단에 동의해줄 가족이 없는 경우 친구나 동거인이 대신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변호사 공증을 받은 법적 대리인을 세우자는 게 아니라 자필 서명을 통해 누구에게든 위임할 수 있도록 해 의료현장에서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연명의료결정법 연착, 의사 교육과 수가 지원해야

연명의료결정법이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취지와 시행규칙 간 괴리를 보완할 수 있는 개정작업이 우선돼야 하지만, 이와 함께 의료 현장에 있는 의사들이 연명의료 결정에 부담을 줄여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환경과 토대를 마련해 줘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의사들을 대상으로 연명의료결정법에 대한 교육과 이를 이행하는 과정에 투입되는 상담료 등 행위에 대한 수가 가산이 바로 그것이다.

고 교수는 “사람이 한 평생 쓰는 의료비의 30%를 죽기 한 달 안에 쓴다고 알려져 있다”며 “환자에게 도움 되지 않는 연명의료를 하지 않음으로써 국가 의료비 지출을 줄이고 필요한 곳에 재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고 교수는 “그런 측면에서 의사들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연명의료결정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서 “의사들이 관심을 갖도록 체계적인 교육이 마련돼야 한다. 또 (환자나 가족에게) 설득, 상담 당의 행위에 대한 수가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 주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이윤성 원장도 “삶의 마무리 단계인 연명의료제도를 이끌어 가는데 의사의 역할이 대단히 크다고 생각한다”며 “의사들이 제도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하지만 관심이 크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원장은 “의사들도 환자에게 연명의료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한 적절한 훈련이 돼 있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특히 “(의료인 교육부분에)투자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의료수가로 반영해 지원해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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