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장

몇 해 전 여행 삼아 거문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이 섬은 약 100여 년 전 쯤 우리나라가 암울했던 시기 약 1년여 동안 영국해군이 주둔한 상태에서 잠시 영국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았던 섬으로 흐릿한 기억들이 흘러 다녔다. 이제 많은 세월이 지나 영국 해군의 주둔 사실 조차 제대로 기억 할 수 있는 세대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주민들은 영국 해군의 주둔을 내심 반겼다고 한다. 해군 수병을 위한 테니스장 건설도 아마 우리나라 최초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평소 내륙 사람들은 물론 외국인을 접하기 어려웠을 섬 마을 사람들은 영국 해군의 주둔을 싫어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해군으로부터 제공받는 노무 보상비가 생계에 도움이 되면서 매우 좋아했다고 회자되고 있다.

현대의학 도입 초부터 복제된 ‘일제 의료정책’ 아직까지 영향

과거 조선왕조에서 대형 국가 프로젝트에 백성들을 강제 투입하고 노역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았던 악습에 비하여 영국해군이 지급한 인건비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매우 호감이 가는 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주민들은 영국군이 떠날 때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거문도는 영국식으로 ‘Port Hamilton’으로 불려졌다. 대영제국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칠 만 한 기회는 사실 이것으로 종료됐다.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식민강점기 일본이 이식한 일본식 의료정책은 우리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오늘날까지 여파를 미치고 있다.

일본은 자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마찰을 빚은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을 벌여 승리는 했으나 재정적 소모는 매우 컸다. 우리나라가 60년대 이후부터 의료수요의 급격한 증가를 경험하여 오늘에 이른 것을 감안하여 본다면 우리보다 훨씬 먼저 서구식 근대화에 앞장선 일본에 대한 의료수요의 증가는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전쟁의 경험에서 전통요법의 한방은 무기력함이 이미 여실히 드러났으며, 일찌감치 한방은 서양의 현대의학에 의하여 흡수 일원화 과정을 겪게 되었다.

민간에 떠넘긴 의료, 무늬만 일본과 유사

부족한 국가재정으로 의료에 대한 공공투자의 여력이 부족하자 제국주의 일본은 개인 의사나 민간 영역에서 의료기관을 설립하고 마치 자영업자처럼 의료가 제공되는 것을 허락했다. 지금도 남한 인구의 3배 정도인 일본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우리보다 의료에 대한 투입예산이 훨씬 클 것이고, 많은 도서지방이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 지정학적 환경을 감안하면 우리나라보다 공공의료의 필요성이 크게 높아 보인다. 여하튼 민간이 개입하여 만들어낸 의료의 모습이 현재의 우리나라 의료의 모습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손 안대고 코풀겠다는 한국 식 공공 의료 정책에 대한 무임승차 마인드는 일본의 그것에 비해 감히 비교할 수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 의과대학의 75%는 사립이고 나머지 약 25%가 국공립 형태다. 그나마 사립과 공립의 경계선도 명확하지 않아 등록금의 차이에서도 두 배 미만에 불과하다.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와는 정반대로 국공립이 약 75% 포인트를 차지하고 있고, 25%가 사립 의과대학이 점유하고 있다. 의대생 등록금 수준 또한 오십 보 백 보인 우리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약 10배 이상의 가파른 차이를 보인다.

정부 공공의료 정책 과거 일본식 임시방편 구태 닮아 있는 듯

우리나라 사람들이 도저히 수용 할 수 없는 민간과 공립의 차이가 존재한다. 지금의 우리나라 정권의 기조라면 아마도 청와대 국민청원을 유도해서라도 사립의대를 폐쇄하자고 하거나, 아니면 국립의대와 사립의 등록금 수준을 강제로 평준화하여 정권의 큰 업적으로 자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공공에 대한 국가 의료정책을 보면 과거 일본제국의 임시방편적인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것처럼 보이고, 한 술 더 떠 민간투자의 극대화를 이끌어 낸 것 같다. 사회적 공공기구나 기관을 민간영역으로 바꾼 정책은 역설적으로 과거 독재정권에서 오래전 이미 60~7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한 것 같은 인상이다. 솔직히 민간으로 의료기관 설립의 주도권이 넘어가고 정부주도의 단일 의료보험으로 민간주도 의료에 대한 제동을 시도했다.

국가 보건정책 ‘표심 구애용’…뚜렷한 정책기조나 철학 부재

정부의 의료에 대한 정책을 보면 국민의 건강보다는 일정한 기조위에 바탕을 두고 일관성을 갖고 추진된 계획된 정책이기 보다는 정권 장악용 선심성 홍보 정책에 기반을 두고 있어 실제로는 이렇다 할 보건의료 정책과 철학이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색이다.

전 세계 최상위 선진국 중 하나인 미국의 의료제도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비판에는 미국의 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가난한 사람은 아무런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비추어진다. 그러나 정작 미국에 가서 확인해 보면,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도 기본적인 의료혜택을 언제든 다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위한 공공병원의 시설은 솔직히 그 어느 나라보다 좋다. 그러나 이들은 아주 비싼 민간보험 환자가 주 고객인 고급 민간병원의 이용에만 제약이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자본주의 모태국인 미국사회에서는 당연한 일로 여긴다. 미국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든 개인이 부지런하고 능력이 있으면, 사회는 이미 개인적 부의 축적과 질병에 대비할 만한 제도를 획득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판단한다. 노력을 게을리 했거나, 운이 따라 주지 않는 등 수많은 이유로 능력이 미치지 못하거나 구매력이 낮은 국민의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별도의 공보험으로 필요한 의료를 제공하고 반대로 여유가 있는 부자에게는 비싼 비용을 부담케 하고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고급진료를 받도록 하는 차별화 된 의료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 철저한 자본주의 정신에 고령 빈민층 공적보험 통해 의료혜택 제공

미국에서는 소위 ‘맹장 수술’이 제일 싼 의료기관은 약 250만 원 가량이고, 제일 비싼 곳은 2억 원에 달하며, 평균치는 5000만원에 이른다. 실제 미국 의료에 대한 비판의 본질은 차 상위 계층에 대한 어려움이다. 아주 비싼 보험은 감당이 안 되고 저렴한 의료보험에 가입이 되어 있으나 중증질환에 대한 본인 부담이 이른바 ‘재난 수준’으로 커서 결국 중증 질환 후에 사회적 하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하여 이들은 집을 팔아야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는 계층이다. 그럼에도 65세 이상 고령자와 빈곤층은 정부의 공보험으로 다양한 의료혜택을 받고 있다. 미국의 바탕은 세계 유일의 자본주의국가로 중앙정부 주도의 국가단위의 사업보다는 자유경쟁을 통한 민간기업의 장려와 각 주별 지방자치제도가 특징이다.

영국, 일차의료 중심 국가 보험체계 불필요한 의료소비 강력 통제

반면에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국민간의 단결력이 가장 높았을 때 국가 단위의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그리고 의료전달체계를 잘 정비하여 일차 진료가 중심이 되고 있다. 의료소비자인 국민 자신의 의사대로 의료기관을 선택하거나 일차 진료를 생략한 진료전달체계는 오로지 극소수 부유층에 국한된다. 의료의 기본 정신은 의료를 국가자산의 중요한 부분으로 판단하고 사회구성원 모두 혜택을 받기는 하나 불필요한 의료소비에 대한 통제가 엄격하다. 의료에서 사회적 평등을 구현하나 환자의 선택도 중요시하여 매우 제한적 이기기는 하나 공보험이 아닌 의사와의 자유계약에 의한 진료도 일정 부분 허락하고 있다. 아직도 영국 국가적인 부의 상당부분은 귀족 소유이고 왕정을 유지하는 나라의 특성을 보여준다.

프랑스, 자유 평등 박애 국가 철학 기조 차별 금지 국민 의료비 걱정 없애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가 명료한 국가철학으로 의료제도의 근간도 이 세 가지 이념을 바탕으로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영국과는 달리 1차 진료에 대한 통제(gate keeping)를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이면 사실 의료비 걱정은 국민의 몫이 아니다. 국민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몸이 불편하거나 아파 사회적으로 계층 추락 위기에 처할 때 이를 해결해주는 안전망은 정부의 당연한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박애정신의 구현인 셈이다. 당연히 공공 서비스와 공공기관이 잘 발달되어 있다. 물론 공공보험으로 모자란 부분을 위한 사보험이나 일부 소수 부유층을 위한 자유계약 형태의 의료시스템을 허용하고 있다.

중국, 정치격변 후 의료문화 개화 21세기 들어 의료 영역 정부가 챙겨

우리 이웃나라 중국은 공산화를 거쳐 전 인민에게 의료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공산주의 이념을 도입했으나, 전 인민에게 제공할 의료서비스는 너무나 취약했다. 아직도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는 이미 잘 알려진 중국 공산당의 정책은 3000만 명을 전쟁도 없이 굶겨 죽이는 사태를 초래하여 결국 선택의 여지없이 개방을 하게 되었고 중국인 본래의 자본주의적 성향을 중국식 사회주의라고 명명하고 사상적 해방을 슬그머니 맞이하게 됐다. 3000만 명이 굶어 죽을 때 의료서비스는 무엇이 가능했을까 자문해 본다. 중국은 그럼에도 매 5년 마다 정확히 중국의 의료발전에 대한 종합적인 계획서를 발표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의료에 대한 투자를 뒤늦게 시작했고,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의료발전의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미 핵무기, 전투기, 인공위성 등 과학적 성과가 월등함에도 의료 영역을 들여다보면 본격적인 발달은 21세기 문턱을 넘어서면서 발동이 걸린 것으로 알 수 있다. 인민 대부분이 극심히 굶주렸던 시절 의료의 개념은 일종의 사치로 보였을 수도 있고, 투자순위가 한참 뒤로 밀려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한편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으나 공산혁명으로 통일국가를 이룬지 얼마 안 되어 참가하게 된 한국전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모택동은 중국의 한국전 참여로 중국 인민 전체가 10년간 배를 더 주릴 수 있다는 매우 비관적인 상황을 기술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정책은 어떤 기조에 의하여 발전해 왔을까?

해방 후 최빈국 분류 대한민국, 민생고 우선 보건의료 늘 뒷전으로 밀려

해방 이후 곧 전쟁을 경험한 우리나라는 전국이 잿더미나 다름없던 상태에서 국민소득 100불에도 못 미치는 전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의료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당연히 공공의료에 대한 투자 여력은 거의 제로였던 것이다. 도립병원 적십자 병원 등 공공시설이 있었으나 경제성장과 더불어 증가하였던 보건의료에 대한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는 시설이었다. 정부도 의료보다는 국방, 수출전략산업, 주택 등 다른 분야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6.25 전쟁이후 오랜 기간 군사정권의 기치는 반공과 멸공이라는 국시 아래 철저한 국가주도의 계획된 경제발전이었다. 국가의 경제성장을 위한 기간산업의 투자가 맨 앞에 있었으며 국민의 건강과 복지는 눈에 띄지 않는 맨 꽁무니에 붙어 있었다.

“잘살아보세”는 우선 삼시세끼 거르지 않고 배를 채워보자는 원초적 민생 현안이었다. 따라서 건강문제는 정부 입장에서는 복잡한 여러 가지 사회문제 전면에 내세울만한 생색내기 좋은 민생 문제가 아니었으며, 국민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는 주문과도 마찬가지였다.

‘100세 건강 시대’ 실현 위해 허술한 현 의료제도 전문가 재설계 절박한 상황

정부나 국민의 관심을 떠난 공공의료정책을 대신하여 공공의 의료는 민간에게 대부분 책임이 넘어갔고 성공적인 민간병원의 괄목할 만한 발전은 반대로 만성적자를 내는 공공의료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보내었다.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과감한 폐쇄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민간의료기관에 비하여 실제로 저렴한 비용이 드는 공공의료기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병원비 걱정 없는 나라를 만들었으니 마음껏 이용하라 해도 마음 놓고 쉽게 하지 못할 사람들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초고속 고성장 과정을 거쳐 “잘먹어보세” 이후의 단계를 넘어 “100세까지 건강하게 잘살아보세”가 구현되는 과정에 어느덧 3만불 소득국가 회원국으로 이름을 당당히 올렸다. 초저수가 정책으로 만들어낸 기형적인 의료문화에서 의료를 위한 공공정책은 아직도 근본 없이 감당 못할 현란한 포퓰리즘의 물결 속에 고령화 사회를 맞으며 의료체계 붕괴라는 깊은 수렁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잘먹어보세”를 위한 초저수가 정책의 한계는 이미 목도하고 있고 여러 부작용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있다. ‘잘먹어보세’를 위한 초 강압적이고 반민주적인 의료정책에서 이제는 진정 잘 살아볼 수 있는 좋은 삶의 추구가 가능한 보건의료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할 절박한 시기가 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