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의료정책연구소 “한국 의료현실에 맞게 진료거부권 구체화 필요”

의료계를 중심으로 의사의 진료거부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환자단체들은 이에 부정적이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의사의 진료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에 한국도 해외 사례를 바탕으로 인공임신중절(낙태) 수술 등 일부 상황에 국한해 진료거부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는 5일 ‘진료거부금지 의무의 현황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해외사례를 분석하고 이를 참고해 의사가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12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미국·독일·영국·프랑스, 의사의 진료거부권 인정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진료거부를 금지하는 규정은 없다. 하지만 각 주마다 제정된 차별금지법에 따라 인종, 민족, 성별, 성적 지향, 종교 등을 이유로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금지된다.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 AMA)는 의료윤리 원칙(AMA Principles of Medical Ethics)으로 진료거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AMA는 ▲환자 요구가 의사의 능력이나 진료영역을 벗어나는 경우 ▲과학적이지 않고 의학적 징후가 없으며 진료목적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윤리지침에 부합하는 의사의 개인적, 종교적, 도덕적 신념과 배치되는 경우 ▲환자를 안전하고 적절하게 치료할 방법이 없는 경우 ▲새로운 환자를 진료하는 게 이미 치료 중인 환자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 ▲환자가 의사, 직원 또는 다른 환자를 학대하거나 위협하는 경우 진료를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독일은 ‘표준의사직업규칙’을 통해 환자의 의사 선택권과 의사의 진료거부권을 규정하고 있다. 독일 연방요양급여계약도 건강보험 의사의 진료거부권을 인정한다. 독일 건강보험 의사는 ▲환자가 과도한 행동을 하거나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신뢰관계가 훼손된 경우 ▲비효율적이거나 비경계적인 치료를 요구하는 경우 ▲부적절한 약 처방 요구 ▲과도한 업무로 의료의 질적 유지를 할 수 없는 경우 ▲의사의 전문영역이 아닌 치료를 요구하는 경우 ▲응급상황이 아니며 의사의 진료소와 환자의 집 사이의 거리가 멀고 다른 건강보험 소속 의사가 더 가깝게 살고 있는 경우 진료를 거부할 수 있다.

프랑스는 의사의 진료거부권을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프랑스 공중보건법에 따르면 응급상황 또는 인도적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의사는 진료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 단, 의사가 진료를 거부할 때는 이를 환자에게 통보해야 하며 진료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다른 의사에게 전달해야 한다.

또 의사에게 특정 치료 또는 수술을 거부할 권리도 법으로 인정한다. 공중보건법에 따르면 의사는 자발적 낙태 수술 요구를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지역 내 낙태수술을 담당하는 대체 의료기관이 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다. 또 피임 목적 수술을 거부할 권리도 인정된다.

영국은 면허관리위원회(General Medical Council, GMC)가 제정한 지침인 ‘Good Medical Practice(GMP)’를 통해 환자와의 관계를 종료할 수 있는 상황을 안내한다.

GMC가 마련한 ‘환자와의 관계 종료’ 안내서(Ending your professional relationship with a patient)에 따르면 ▲환자가 의사 또는 동료에게 폭력·위협·폭언 등을 한 경우 ▲환자가 의사 또는 시설에서 절도 행위를 한 경우 ▲환자가 부적절하거나 비합리적인 행동을 지속하는 경우 ▲의사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경우 의사는 환자와 관계를 종료할 수 있다.

의사의 진료거부권 행사 12가지 유형 정리

이같은 해외 사례를 참고해 연구진은 의사가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12가지 유형을 선별했다.

① 의사가 부재중이거나 질환 등으로 인해 진료할 수 없는 경우

② 병상・의료인력・의약품・치료재료 등 시설 또는 인력이 부족하여 새로운 환자를 진료할 수 없는 경우

③ 외래진료의 경우 예약환자의 진료 일정 등으로 인해 당일 방문 환자를 진료할 수 없는 경우

④ 해당 진료가 의료인의 전문영역과 다르거나 전문지식, 경험이 부족하여 다른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하는 경우

⑤ 다른 의료인이 환자에게 이미 시행한 치료(투약, 시술, 수술 등) 내용을 알 수 없어 적절한 진료를 하기 어려운 경우

⑥ 환자가 적극적으로 마약류 의약품을 요구하는 것 등과 같이 부적절한 치료 방법을 요구하는 경우

⑦ 입원치료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의학적 판단에 따라 퇴원을 지시하는 경우

⑧ 환자가 의사의 치료방침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

⑨ 의사의 양심에 따라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의 이행을 거부하는 경우

⑩ 의사가 양심에 따라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거부하는 경우

⑪ 환자가 의료인 또는 동료에게 모욕・명예훼손・폭행・업무방해 등의 행위를 하는 경우

⑫ 환자가 의료기관을 점거하거나 기물을 훼손하는 경우

연구진은 “이런 유형은 의료현실의 변화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 새로운 유형을 편입시킬 수 있는 유연성이 담보돼야 한다”며 “의료인이 진료를 거부할 때에는 그 사유를 환자에게 설명해야 하며 필요에 따라 환자 또는 보호자에게 타 의료기관으로 전원을 권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책임자인 의료정책연구소 이얼 책임연구원은 “선진적 의료계약 문화의 정착을 위해서는 의료법의 진료거부금지 조항과 이에 대한 처벌조항을 삭제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환자와 의사의 신뢰관계가 훼손될 경우 의사의 판단 하에 진료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원은 “의료전문가 단체는 진료거부가 가능한 경우와 불가능한 경우를 우리나라 의료현실에 맞게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윤리지침에 반영함으로써 회원의 권리와 국민의 건강권을 보호하는데 힘써야 한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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