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황선빈 혁신의료기기법TF 팀장

보건의료산업 중에서 우리나라의 성장 잠재력이 가장 큰 분야가 의료기기산업이다. 100세 시대를 맞아 질병의 치료 예방을 넘어 삶의 질을 아우르는 대비책이자 불가역적 생명을 다루는 산업이기에 최근 집중적으로 입법, 정책,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황선빈 혁신의료기기법TF 팀장(존슨앤드존슨메디칼 APAC)

일반적으로 의료기기산업 육성으로 얻게 되는 가치는 건강권에 대한 사회적 보장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4차산업 혁명시대를 맞이하여 중요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세계 의료시장 역시 거대한 흐름을 만들면서 성장하고 있다.

지난 4월 국회는 의료기기 관련 법안 2개를 한꺼번에 통과시켰다. ‘의료기기산업 육성 및 혁신의료기기 지원법(혁신의료기기법)’과 세계적 추세인 체외진단의료기기의 독립적 허가 체계를 바탕으로 한 ‘체외진단의료기기법’이 그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규제혁신이라는 화두를 의료기기산업에 던졌고 체외진단에서 ‘선 진입-후 평가’라는 이전에 없던 관리체계를 통해 학계와 산업계를 중심으로 실사용증거(RWE)나 시뮬레이션을 통한 입증 방법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받고 있음에도 몇 년째 풀리지 않는 병목점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허가 분야의 심사 조직과 인원에 대한 문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융복합혁신제품지원단의 신설을 통해 융복합 제품에 대한 심사 업무의 효율화를 위한 토대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문제는 심사자의 전문성과 업무량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없이는 어떤 대안도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가 회원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도 ‘혁신의료기기법 이후 업계가 원하는 가장 큰 혜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허가 기간 단축’이 1위를 차지했다.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의 의료기기심사부는 5개 전문심사과로 나눠져 있다. 첨단의료기기과에 33명, 심혈관기기과 14명, 정형재활기기과 14명, 구강소화기기과 10명, 체외진단기기과 12명 등 총 83명이 근무하고 있다.

2017년도 식약처 통계에 따르면 의료기기 관련 인허가 중 인증이 3,202건, 신고가 5,052건, 기술문서심사가 2,921건이다. 산술적 평균으로만 봐도 1인당 평균 처리 건수가 100건이 넘는다.

1등급, 2등급 제품에 대한 허가를 인증 기관에 위임했음에도 민원이나 최종 검토의 책임은 오롯이 식약처 소관이다.

이렇게 강도 높은 심사량 문제가 다일까. 더 중요한 것은 최근 높아지고 있는 4차 산업혁명 기술 제품이 급격히 늘어나고, 의료기기의 선진국을 필두로 해 국내도 앞다퉈 4차 산업혁명 기술 기반의 플랫폼 형태나 인공지능(AI)을 탑재한 의료기기가 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하는 해당 디지털 제품에 대한 심사인력은 연구관 1명과 심사자 2명으로 총 3명이 허가를 위한 가이드라인 마련, 법규정 제개정, 표준안 조사, 해외사례분석 등 독립과 규모에서 이뤄질 일을 감당하고 있다.

의료기기는 사용법이나 안전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 고도의 지식이 필요하다. 국민은 의료기기 안전을 책임지는 식약처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어려움의 연속이다. 의료기기 정책 및 안전을 관리하는 식약처 의료기기안전국도 식약처 내의 불완전한 조직이다. 이 조직은 의료기기정책과, 의료기기관리과, 의료기기안전평가과 등 3개 과가 있다. 실무과가 2개로 운영되는 조직은 중앙정부 안에서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진실은 불편하다. 연평균 8% 이상의 시장 성장을 이루는 의료기기산업의 폭발적인 행정수요와 민원이 빗발침에도 몇 년째 정책과 사후관리를 책임지는 의료기기안전국 조직, 인력 확충은 요원하다.

식약처 의료기기안전국과 의료기기심사부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 일선의 규제기관이다. 우리는 안전 관련 현안이 터질 때마다 정부의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그 일을 담당하는 인력은 부족하고 심지어 디지털 분야의 제품을 다루는 전문 허가 심사자조차 없다는 사실이 메아리처럼 “의료기기 조직·인력 좀 늘려주세요”라는 불평을 하게 된다.

해외 사례를 보자. 규제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은 4차 산업기술 제품에 대한 수요가 있자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처(FDA) 내부에 전문가들로 구성된 디지털 헬스케어에 대한 독립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관련 규정과 실태조사를 벌이고 허가 심사를 위한 혁신적 규제의 틀을 만들어나갔다.

기존 규정으로는 감당이 안 되자 아예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통해 규정을 만들어나가기로 했다. 우리나라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소프트웨어의 기업 인증 등이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자 하는 오랜 지혜를 적용한 것이다.

혁신의료기기법을 위한 하위 규정을 마련도 중요하지만 보다 시급한 문제의 해결이 되지 않고는 국민의 안전도, 산업계가 원하는 혁신적 의료기기를 위한 허가의 방향도 어려울 것이라는 위기감이 든다.

4차 산업기술의 핵심인 디지털 기기와 유전자 분석을 통한 맞춤형 진단 기술이 주는 혜택만큼 전문조직이 뒷받침되지 않는 혁신의료기기법의 발효가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든다. 전문적인 심사를 할 수 있는 전담 조직이 필요한 이유다.

정부 조직에 대한 비전문가가 보더라도 4차산업 전문 조직인 디지털 제품이나 최근 바이오 분야의 성장과 함께 관련 기술의 수요가 높아지는 유전자 진단, 그리고 혁신 제품의 시장 출시 후 관리할 수 있는 사후관리 조직이 필요하다.

의료기기 관련 모든 이해 당자자가 지금이라도 뜻을 모아 혁신기업이 가장 원하는 설문의 항목이었던 허가 조직에 대한 우려가 불식돼야 한다.

혁신법보다 더 혁신적으로 변해야 할 것은 바로 식약처 의료기기 조직의 전문성 확대임을 깨닫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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