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선의 정책 딥 마이닝

우리나라에 전문직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일제강점기 무렵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식민조선 사회를 일깨워 주었다고 지금도 엉뚱한 생색을 내고 있다. 일본은 운 좋게 네덜란드 상인들과의 교류와 미국의 강압적인 개항으로 청나라를 통한 문화의 중개 없이 우리보다 먼저 서양문물을 직수입할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그럼에도 먼저 개화하였다는 일본이 조선총독부의 조선인에 대한 교육정책은 황국신민화가 우선이었고, 조선인의 이성적 진보를 가져올 수 있는 고등학문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과 일본인 아래에서 저급상인 정도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특히, 조선인에 대하여는 반드시 일본인과 차별된 교육을 시킨다는 야만적인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이런 연유에서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인은 법학 분야에서 단 한사람도 교수가 되지 못하였으며, 그나마 의학 분야에서 마지못해 임용과 사직 사이의 기간이 며칠 안 되는 최 단기 재직 교수를 임용했던 기록이 단 한차례 있을 뿐이다.

서양에서는 전문직이 13세기 무렵부터 ‘길드’라는 조직을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전문직에 대한 역사는 절대로 길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전문직의 역사는 어느새 100년이 넘었다. 그렇지만 서양의 의사가 형성한 전문 직업성의 특성과는 궤적을 달리하여 발달한 특성들을 우리나라 의료에서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식민압제와 과거제도의 전통, 그리고 해방이후 군사정부 독재 하에 전문직이 확보했어야 할 전문직으로써는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자주권’에 대해 만족할 만큼 육성 발달시키지 못하였다.

자주권을 갖지 못하는 전문직은 전문직의 직무윤리도 발달지연을 초래하였고, 압축 성장에 의한 급속한 의과대학교육의 팽창은 차분한 의사 전문 직업성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나 우리나라 고유의 직업전문성 발달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구조였다. 지금도 환자진료를 통한 병원의 수입구조에 직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윤리학, 철학, 역사학 등 ‘의인문학’ 분야의 교수 채용은 병원 경영 측면에서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으며, 실제 채용 건수 역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희귀한 것이 우리나라 의학교육과 의료의 현실이다.

우리의 전문직 역사를 들여다보면, 길드에서 출발한 자율규제 정신이나 길드를 운영하고 지속하기 위한 길드 내 ‘기관윤리’나 ‘직업윤리’ 수준조차도 갖추지 못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의사, 이발사외과의사, 그리고 약료사가 발전시켜온 직업윤리가 현대적 개념의 의사로 ‘합체’되면서 직업윤리가 의료윤리로 발전하였고, 의사의 신분과 경제적 보상을 위한 이익단체(trade union)인 의사회와 자율규제 단체(regulator)인 의학협회로 각각 분리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의사가 모인 단체는 분화를 계속하여 조합과 협회의 두 가지 기능을 분명히 하는 다양한 단체들을 만들어 냈다. 직능에 따라 다양한 단체로 발전된 공통적 특성은 의사전문직에 공무원으로 구성된 정부조직의 간섭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전문직이 갖는 특성 중 하나는 전문성은 관료주의가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전문직과 사회와의 암묵적 계약이 존재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동아시아 지역의 전문직 화(化) 과정에서는 이른바 ‘사회계약론’을 역사 속에 수용하거나 체화(體化)된 경험을 갖지 못하였다.

필자는 캐나다에서 성형외과 전문의를 취득한 경험에서 미국과 상호 교육을 인정하고 교류하는 유일한 나라인 캐나다와 미국 양국이 갖는 전문직 특성에 대한 이해를 비교적 용이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접할 수 있었다. 미국은 성형외과 의사의 연합체이며 조합인 성형외과의사회(Association)가 존재하고 반면에 전문의시험, 보수교육을 통한 재인증과 전문의 자격유지, 10년 주기의 전문의 재시험, 세부 전문의 등 공적인 사안만을 다루는 성형외과협회(Board)가 분리되어 존재한다.

미국에서 임상 전문과목이 합쳐져 우리나라의 의학회와 유사한 기능을 갖고 있는 단체는 ‘American Board of Medical Specialties’로 이는 순수 민간단체로써 정부와는 무관한 조직이다. 민간단체의 성격상 또 다른 형태의 제2의 복수 단체도 존재하는데 ‘American Board of Physician Specialties’가 바로 그것이다. 법적으로도 제3, 제4의 단체설립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이다.

캐나다는 우리나라 의학회와 아주 유사한 구조로 모든 학회의 연합체인데 소속 학회나 연합체의 조합기능은 배제되어 있고 별도의 조합인 이익단체를 갖고 있다. 캐나다 의학회(Royal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 of Canada)는 법정단체(Statutory Body)로써 지난 1927년에 캐나다 전체 전공의교육을 위한 단체로 설립되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이런 종류의 의사단체 수장이 되기 위해서는 ‘단체장후보발굴위원회’가 6개월 정도의 활동을 통해 해당 경력을 보유한 의사를 사전에 충분히 검증하여 원장으로 추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고, 임기는 따로 특정하지 않고 있다. 자신이 의사표명을 통해 사임하기 전에는 별도로 임기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집행부를 견제할 이사장은 2~3년의 임기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의 의학회와 유사한 미국의 ABMS의 수장은 현재 의사(전문의), 변호사, 그리고 전문경영학(MBA)석사 학위를 소지한 의과대학 학장 출신 여성의사로서 미국 의료계의 존경을 받고 있다. 13년째 근무하고 나서 사임의사를 밝힌 캐나다 의학회 원장은 전문의로서 해외에서 전공의교육에 관한 국제교류 활동으로 중동에서 약 10년 넘게 근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미국의 의과대학협회 회장도 단체장을 맡은 지 13년째가 되어서야 사임의사를 밝혔다. 미국에서 가장 골치 아팠던 두 개의 의과대학에서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학장 경력만 해도 도합 13년이 되는 베테랑이다. 이들은 한 결 같이 우리나라에서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정치적 ‘표 대결’로 전문직 단체장에 선출된 것이 아니다.

대한의사협회는 직선제 시행 이후 흔하게 듣고 있는 비판 중 하나는 이른바 ‘초짜부대’라는 혹평이 따라다닌다. 의료계 민주화 열기로 탄생한 ‘회장 직선제’는 20여년 가까이 흐르고 있는 세월 동안에 회원들과 회원을 대표로 선출된 대의원들 사이에 회장 선출 방식을 포함한 의협의 거버넌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논란이 사그라 들지 않고 있다.

사실, ‘초짜부대’라는 악평은 의협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대학에서 민주화 투쟁으로 총장, 의무부총장, 학장 등의 보직을 직선제로 선출하고 있다. 의무부총장이나 학장은 임기가 대개 2년이다. 그리고 직선제 선거가 끝나면 의과대학 관련 보직자도 선거 공로자로 거의 모두가 변경된다. 종래의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변경되면 많은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것으로 보였는데 결론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 학장이나 부총장으로 업무 파악도 되기 전에 후임자의 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이런 제도에서 현재의 집행부를 초짜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당선 되면 초짜부대를 이끌어야 할 똑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다.

필자가 근무했던 의과대학도 짧은 학장의 임기와 교체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 되었지만, 마땅한 대안을 모색하기가 힘들었다. 외부 자문평가와 서태평양의학교육협회의 자문평가 모두 초짜부대에 대한 미숙한 의과대학 운영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외국 전문가들의 시각에서 의과대학장을 15년간 8명 배출한 것에 대한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의과대학의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리고 떠나갔다. 호주의 학장 평균 재임기간은 10년 정도이고, 절반은 일반전문의(General Practitioner)출신이다. 어쨌든 필자의 경우 운 좋게(?)도 의과대학 은퇴 전 우여곡절 끝에 40년 만에 2년제 학장이 연임을 하여 오랜만에 초짜를 탈피한 임기 4년의 학장을 보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초짜에 대한 비판의 현상은 의학계, 의료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나라 전체의 약점과 병폐로 보인다. 전공의교육을 위해 관련 보건복지부와 논의를 하다보면 잠깐 세월이 지나면 담당자가 바뀌어 있다. 면허기구나 전공의교육에 대한 변화를 이룰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야 할 톱니바퀴 같아야 할 민, 관의 조직이 주기적 선수 교체를 통해 성숙한 팀을 구성할 수 없는 초짜부대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공무원의 입장은 한 곳에 오래있기 싫어하고 승진이 잘 되는 보직으로 이동하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목표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발전해온 사회적 경제적인 발달은 주기적인 선수교체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형 자산의 영역일 수 도 있다. 좋은 대학은 그나마 다양한 학문구성원이 다양한 국제교류를 통하여 국제적인 대학 문화를 수입할 기회도 있었고, 단체적인 전문성과 교육과 연구의 문화자산이 점차 개선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의사협회의 단체적인 전문 직업성의 문제는 현재와 같은 구조 하에서는 중진국으로 분류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일부 대의원이 사실 확인 없이 여기저기 말을 옮겼던 표현대로 “외유성 출장이라고 의심되는 협회 회장과 협회 임원의 동남아 출장”에서 우리가 그동안 후진국으로 간주했던 나라에서 오히려 우리보다 성숙한 의사회 운영과 선진 의사면허기구의 모습을 분명히 보고 느낀 바가 많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일정만 편성한 ‘스터디(study) 목적’의 해외 출장을 통해 앞으로 의사전문직 단체가 갖추어야 할 모습들을 실제 눈으로 확인하고 체험했던 중요한 체화(體化) 과정을 경험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운이 좋은 계몽 형 식민통치를 경험했던 동남아시아와 우리나라 의사단체의 단체적 전문 직업성의 차이를 체화된 경험으로 여실히 느끼고 돌아온 일정인 것이다.

이런 혹독한 일정의 출장에도 일부 회원은 “예산 절감 차원에서 소수의 인원이 다녀와서 보고해도 충분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던진다. 꼭 필요한 해외출장에 대해서도 한낱 외유성 예산낭비로 보는 편협한 시각이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관광이나 영화 그리고 그림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타인에게 이야기로 전달하는 것은 책이나 인터넷 자료보다 조금 나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체화된 경험’은 직접 해보아야 한다. 좋은 머리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다.

500년 길드 문화의 간격을 좁히는 것은 될수록 많은 의사들이 직, 간접 경험을 통하여 체화된 경험을 통하여 전달될 수 있는 문화자산의 습득이다. 그런데 단체적 전문 직업성(Institutional Professionalism)의 직접경험에 의한 체득은 여간해서는 좋은 기회 마련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단기출장에 의한 깨우침은 초짜부대가 국제적 규범의 노련한 집단으로 전환하는데 필수적인 사항이다. 굳이 달리 표현하자면 단기간에 반드시 마스터해야 되는 국제화의 숙제인 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세계최고 의료기술 선진국은 수입된 기술이고 국제적 교류의 산물이다. 그러나 과학적 기술적 수입이나 수출 보다 문화적 자산의 수입과 수출은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것이고 쉽게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지식의 습득보다 교양교육이 더 어려운 이유와 같은 이치다. 전문직 사회에서 직무의 일관성, 지속성이 결여된 초짜부대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선거를 통한 전문직 단체의 지배구조 쟁취가 원인으로 보인다.

최근 국립대병원장 후보에 10명이 넘게 지원한 것을 보면 아직도 우리에게 넘어야 할 산이 매우 높아 보인다. 의사단체의 전문 직업성이 초짜수준을 극복해야 추락하는 의사 전문직의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우리나라 의사를 대표하는 단체나 교육기관이 스스로 초짜라는 자학적 비판에 앞서 선진국의 의사단체나 교육기관의 조직과 운영방식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한 전문직 문화자산에 회원 모두 깊은 관심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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