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산이 핵심 연료라는 사이언스 논문…자연치유 요양원 “고기 먹지 말라는 근거” 주장
연구자인 이충근 박사 “지방산은 식물성 지방에도 있어…고기 먹지 말라는 건 확대 해석”

암세포의 림프절 전이 기전을 세계 최초로 규명한 국내 연구진의 논문이 ‘육식의 해악’을 의학적으로 밝혀낸 논문으로 둔갑했다. 자연치유를 강조하는 한 요양시설이 개설해 운영하는 유튜브(YouTube) 채널에서다.

암세포 림프절 전이 기전 세계 최초로 규명한 연구

기초과학연구원(IBS) 혈관연구단은 포도당에서 주로 에너지를 얻는 암세포가 림프절에서는 지방산을 주 에너지원으로 쓰도록 대사(metabolism)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

림프절 전이 여부는 암 환자의 생존 기간을 결정하는 중요한 예후 인자이지만 전이 기전은 밝혀진 바가 거의 없다. 특히 백혈구 등 각종 면역세포가 가득 차 있는 림프절에서 암 세포가 어떻게 생존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연구진이 흑색종(피부암)과 유방암 모델 생쥐를 대상으로 연구를 실시한 결과, 림프절 전이가 진행될수록 지방산을 분해해 에너지를 얻는 ‘지방산 산화(fatty acid oxidation)’가 활발해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연구진이 지방산 대사를 억제하는 약물(Etomoxir)을 주입하자 림프절 전이가 억제됐다.

암세포의 림프절 전이 과정 모식도(제공: 기초과학연구원 혈관연구단)

포도당을 주 에너지원으로 쓰던 암 세포가 림프절로 이동해서는 대사 방법이 지방산을 주 에너지원으로 쓰도록 바뀐 것이다. 이같은 대사 변화는 전사인자 ‘YAP’가 이끌었다. 담즙산이 신호물질로 작용해 YAP를 활성화시켜 지방산 산화를 유도한다.

이번 연구결과가 담긴 논문은 세계 최고 권위 국제학술지인 ‘사이언스(Science, IF 41.058)에 지난 2월 8일 게재됐으며 국내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암 자연치유한다는 A요양원 “림프절 전이 막으려면 고기 먹지 말아야”

하지만 한 달여 뒤 온라인에서 이 논문은 육식이 위험하다는 의학적인 근거로 퍼져나갔다. A요양원이 유튜브에 올린 영상 때문이다.

A요양원은 채식 위주인 항암식단과 대체요법 등으로 암과 난치병을 자연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체 개발한 ‘전인적인 디톡스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곳이다.

이 요양원은 지난달 15일 ‘암세포 미스터리 풀리다. 답은 ’지방산‘_육식과 암, 육식의 위험’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이 연구결과를 육식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로 소개했다.

A요양원 부원장은 이 영상에서 암 환자는 육식이 암과 난치병을 유발한다고 주장하며 IBS 혈관연구단의 연구결과를 다룬 모 일간지 기사 내용을 그대로 읽었다.

A요양원이 개설해 운영 중인 유튜브 채널에서 기초과학연구원 혈관연구단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있는 부원장 모습.

기사를 토대로 연구 결과를 소개한 그는 “고기 단백질을 식단에서 제외해야 (암세포의) 림프절 전이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흑색종과 유방암에 국한돼 진행된 연구결과를 두고 “유방암. 췌장암, 위암, 갑상선암, 전립선암 등 모든 암세포에 대한 미스터리가 풀렸다”고도 했다.

그는 또 “암에 걸린 고기를 먹기 때문에 암에 걸린다. 동물에 들어 있는 지방과 콜레스테롤은 온갖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며 “사람이 암에 걸린 이유는 암에 걸린 고기를 먹기 때문이다. 고기에 들어 있는 발암물질 가운데 벤조피렌, 메틸렌 등으로 인해 암에 걸린다”고 했다.

그는 “당신이 먹는 음식이 당신의 몸을 만들고 당신이 먹는 음식이 당신의 품성을 만든다. 꿀꿀이(돼지)를 좋아하면 돼지 같은 품성으로 욕심이 많아지고 오리 고기를 좋아하면 ‘언제 당신한테 돈을 꿨냐’고 오리발을 내민다”는 말도 했다.

육식이 암 등 모든 병의 근원이라는 주장이 담긴 이 영상은 올라온 지 한 달 만에 10만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 15일 기준 이 영상 조회 수는 13만회이며 댓글만 100개 이상 달릴 정도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다.

연구자는 ‘황당’…이충근 박사 “고기 먹으면 안된다고? 일차원적 해석”

연구자는 어이없어했다. 연구 결과를 확대해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왜곡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논문 제1저자인 이충근 박사(종양내과 전문의)는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고기를 많이 먹는다고 림프절 내 지방산이 더 많아진다는 근거는 없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비례해서 증가하는 게 아니다. 지방산은 항상 일정량 존재한다”며 “근거 없는 주장에 연구 결과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논문 제1저자인 이충근 박사

연구 성과가 알려지면서 언론과 인터뷰할 때마다 ‘암 전이를 막기 위해서는 지방 섭취를 줄이면 된다’고 확대해석할 것을 우려해 정확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같은 설명을 바탕으로 ‘기름진 음식이나 지방 섭취를 줄여야 한다’고 단순히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지방산은 지방의 성분 중 하나로 식물성 기름에도 지방산은 있다. 암세포가 림프절에서 지방산을 주 에너지원으로 쓰니 지방 섭취를 줄이면 된다는 건 일차원적인 생각”이라며 “지방산을 에너지원으로 쓴다고 알려진 면역세포도 있다. 암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동물실험을 중심으로 수행된 연구결과를 사람에게 적용한 것은 물론 흑색종과 유방암만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를 다른 암으로 확대해석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박사는 “문제의 영상에서는 지방산이 모든 암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아직 밝혀진 게 없기에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암이라고 해서 다 같은 병이 아니다. 동일한 암, 예를 들어 폐암이라고 해도 병리학적으로 종류가 다양하고 같은 종류의 폐암들도 어떤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느냐에 따라서 치료 방법이 완전히 바뀐다”며 “모든 암을 비슷한 종류로 생각하는 것부터 잘못됐다. 암은 매우 불균질한 집단이라 암 환자마다 개별 맞춤형 치료를 하려고 임상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 박사는 “이번 연구는 기초적인 내용으로 임상에 적용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암세포의 새로운 생리를 밝혀냈다는 데 의의가 있지만 그 자체를 치료제 개발에 어떻게 사용할지는 더 연구해야 한다”며 예단을 경계했다.

이 박사는 무엇보다 잘못된 정보로 인해 암 환자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최근에는 적정한 체중과 근육량을 유지하는 암 환자가 마른 환자보다 생존율이 높다는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기도 한다”며 “암 환자들에게도 간 독성이 올 수도 있는 농축액 등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잘 먹으라고 한다. 잘 먹지 못해서 문제지 살이 쪄서 문제가 되는 암 환자는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인 암 환자들에게 무조건 고기를 먹지 말라는 등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면 위험할 수 있다. 그게 가장 큰 걱정”이라며 “채식주의자가 암에 걸리지 않는다는 근거는 없다. 이분법적 사고는 위험하다. 암 환자들에게 강권하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연세암병원에서 환자 진료를 시작한 이 박사는 “임상 현장에서 보면 잘못된 정보나 사이비 유사 의학 때문에 치료할 시기를 놓쳐서 오는 환자들이 있다”며 “최근에는 면역항암제를 포함해 좋은 치료제도 많이 개발돼 4기 암인데도 완치되는 사례가 있다. 현대 의학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잘못된 정보로 인해 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들이 생기지 않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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