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위헌 취지 의견 제출…“해결책 모색할 수 있음에도 생산적인 논의 가로막아”

국가인권위원회가 헌법재판소에 낙태죄 처벌은 여성의 자기결정권 등을 침해한다는 취지의 공식 입장을 밝혀 주목된다.

인권위가 낙태죄 폐지에 대해 공식 의견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헌재가 낙태죄가 헌법에 위반되는지 판결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헌재 판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인권위는 최근 헌재에 ‘낙태죄에 관한 헌법소원(형법 제269조 제1항, 제270조 제1항 위헌소원)’ 의견서를 제출했다.

인권위는 의견서를 통해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조항이 크게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 ▲여성의 건강권 및 생명권 침해 ▲재생산권 침해 ▲형사정책적 정당성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봤다.

인권위는 “출산은 여성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임에도, 여성 스스로 임신 중단 여부를 결정할 자유를 박탈하는 낙태죄는 경제적·사회적 사안에 관해 공권력으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다”면서 “민주 국가에서 임신을 국가가 강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임신의 중단, 즉 낙태 역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결정할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또 “형법은 예외 사유를 두지 않고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있고, 모자보건법상 낙태 허용 사유도 매우 제한적”이라며 “이로 인해 여성이 낙태를 선택할 경우 불법 수술을 감수할 수밖에 없고, 의사에게 수술을 받더라도 불법이기 때문에 안전성을 보장받거나 요구할 수 없으며, 수술 후 부작용이 발생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어서 여성의 건강권, 나아가 생명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생산권과 관련해선 “낙태죄는 또 모든 커플과 개인이 자신들의 자녀 수, 출산간격과 시기를 자유롭게 결정하고 이를 위한 정보와 수단을 얻을 수 있는 재생산권을 침해한다”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여성차별철폐협약’은 당사국에게 자녀의 수 및 출산간격을 자유롭고 책임감 있게 결정할 동등한 권리와 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정보, 교육 및 제 수단의 혜택을 받을 동일한 권리를 보장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바, 정부는 헌법에 따라 이러한 권리를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위는 낙태죄 조항의 형사정책적 정당성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의용형법에서 유래한 낙태죄가 국가의 인구정책적 필요에 따라 작동 여부가 변화해왔고, 모자보건법상 우생학적 허용조건을 활용해 생명을 선별했다는 문제 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낙태죄의 입법목적이 정당하게 실현됐는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

특히 “낙태죄를 통해 낙태의 예방 및 억제의 효과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면서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2018년)에서 임신 경험 여성의 19.9%가 학업이나 직장 등 이유로 낙태한 것으로 조사됐고, 이전 조사 등에서 연간 17만 건의 낙태수술이 이뤄지는 것으로 보고된 바, 낙태죄로 인해 낙태율이 줄어들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낙태죄가 상대 남성이 여성에게 관계 유지나 금전을 요구하며 이를 거절할 경우 낙태 사실을 고발하겠다는 협박이나 보복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어 낙태를 형사 처벌하는 게 적정한 방법이라고 보기 힘들다”고도 했다.

나아가 “낙태를 형사 처벌하지 않는 게 바로 낙태의 합법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부동의 낙태 등 문제들은 의료법 개정 등 다른 방식으로 해결이 가능하다”면서 “사회적 논의를 통해 조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음에도 낙태죄 조항이 생산적인 논의를 가로막고 있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인권위는 “오랜 기간 여성을 옭죄어 왔던 낙태죄 조항이 폐지돼 여성이 기본권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도록 헌재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고 했다.

한편, 헌재가 마지막으로 낙태죄에 대해 심판한 사건은 지난 2012년 8월이며, 당시 4대4 의견으로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5년여 만인 지난 2017년 2월, 업무상승낙낙태 등의 혐의로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가 낙태죄 등에 대한 위헌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이 사건을 청구한 의사는 지난 2013년 11월경부터 2015년 7월까지 69회에 걸쳐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를 했다는 이유로 기소됐으며, 1심 재판 중 형법 제269조 제1항, 제270조 제1항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주장하면서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했으나 그 신청이 기각되자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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