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권리옴부즈만 이은영 사무국장, 환자권리포럼서 실태조사 결과 발표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 “가루약 조제 지정약국제 도입해야“

서울 소재 상급종합병원 앞에 위치한 약국의 10곳 중 4곳은 가루약 조제가 불가능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제가 불가능하다는 약국들은 대부분 처방약이 없다거나 기계가 고장났다는 등의 이유로 가루약 조제를 사실상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일각에서는 가루약 조제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가루약 조제 지정약국제를 도입하거나 상급종병의 경우 가루약에 대해서는 의약분업 예외를 적용하는 등의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시 환자권리옴부즈만 이은영 사무국장은 6일 서울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3회 환자권리포럼’에서 ‘서울시 소재 상급종합병원 문전약국 가루약 조제 현황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시 환자권리옴부즈만 이은영 사무국장은 6일 서울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3회 환자권리포럼’에서 ‘서울시 소재 상급종합병원 문전약국 가루약 조제 현황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는 서울시 소재 13개 상급종합병원으로부터 직선거리가 1km 이내인 문전약국 128곳을 선정해 지난 6월 20일과 25일 전화 조사 형태로 진행 됐다.

문전약국에 가루약 조제가능 여부를 조사한 결과, 가루약 조제가 가능한 곳은 54.7%(70곳)에 불과했다. 가루약 조제 불가능한 곳이 45.3%(58곳)나 됐다.

조제 불가능 사유를 보면 일단 ‘처방된 약을 구비해 두지 못해서’라고 응답한 비율이 25.9%(15개소)로 가장 많았지만 ‘가루약 조제 기계가 없어서’(20.7%), ‘처방전을 약국에 가져오지 않아서’(20.7%), ‘가루약 조제 기계가 고장나서’(12.1%) 등의 이유로 약이 있더라도 가루약 조제가 불가능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럼에도 이들 약국은 가루약 조제가 가능한 다른 약국을 안내해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약국 안내 여부를 조사하자, 안내를 해준 곳이 24.1%(14곳), 안내를 해주지 않는 곳이 75.9%(44곳)이었다.

가루약 조제가 가능한 문전약국이 많지 않아서일까 가능한 약국들의 대기시간이 꽤 긴 것으로 조사됐다. 가루약 조제 대기시간에 대해 ‘1시간에서 2시간 미만’이라는 응답이 30%(21곳)으로 가장 많았으며, 3시간 이상도 28.6%(20곳)나 됐다.

환자 또는 보호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가루약 조제 관련 설문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지난 8월 2일부터 26일간 환자 및 보호자 323명을 대상으로 이메일 설문을 진행한 결과, 환자 10명 중 3명이 가루약 조제를 거부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30.7%).

또한 가루약 조제가 가능한 다른 약국 안내를 받았다는 환자도 16.2%(16명)에 불과했다. 안내를 해주지 않았다는 응답이 83.8%(83명)나 됐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환자의 의약품 접근성 보장을 위해 가루약 조제를 거부하지 않는 원칙 확립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루약 조제에 대한 수가를 부여하는 ‘가루약 조제 지정 약국제(가칭)‘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안 대표는 “약사는 약사법상 의약품 조제 원칙과 정당한 이유 없는 의약품 조제를 거부할 수 없다. 가루약 조제를 거부하지 않는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며 “지정받은 약국에서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사가 가루약을 조제할 경우에만 조제료 수가를 가산하는 방식의 ‘가루약 조제 지정 약국제(가칭)’ 도입이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급종합병원을 의약분업 예외 지역으로 지정해 원내 조제를 허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안 대표는 “장기간 혹은 다량의 가루약 처방이 주로 이뤄지는 상급종합병원에서 의사가 가루약을 처방할 경우 의약분업 예외 지역으로 지정해 원내 조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상종은 의료기관평가인증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으며 대부분 약제실에 가루약 조제 기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약국의 자율 관리에 맡기고 있는 자동 조제 기계를 보건복지부가 공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안 대표는 “가루약 조제 시 자동 조제 기계를 위생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이전 의약품의 가루가 섞여서 약제의 효능·효과가 바뀌거나 부작용 발생 우려가 있다”며 “그러나 현행 법령에서는 가루약 섞임을 방지할 수 있는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다. 가루약 자동 조제기계의 철저한 위생관리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안전성 문제제기하며 어려움 호소하는 약사들

그러나 약사들은 가루약 조제가 약의 효능을 변경할 우려가 있다며 가루약 조제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환자권리옴부즈만에서 약사 10명에 이메일 설문을 진행한 결과, 약사들이 가루약 조제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로 ‘가루약 성분이 혼재해 약의 효능이 변경되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40%로 가장 많았다.

이외에 ‘가루약 조제 관련한 건강보험 보상체계(20%), ‘가루약 조제를 위한 기계 구입 및 관리(10%)’, ‘가루약 조제 시 발생하는 분진으로 인한 약사의 건강(10%)’ 등의 응답이 나왔다.

패널로 참여한 대한약국학회 김예지 약료위원장은 “이런 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이 (약품의) 안전성이다. 약은 양날의 검으로 잘못쓰면 환자에 독이 될 수 있다”며 “약을 가루약으로 갈아서 6개월, 12개월씩 먹었을 때 아무 이상 없이, 독이 되지 않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예를 들어 딜라트렌(정)의 경우 습기에 약하기 때문에 가급적 빻지 말라고 돼 있다. 그런데 이를 90일 분을 갈아서 다른 알약과 섞어 주면 해당 약과 다른 약 모두에 변질 가능성이 생긴다”며 “카니틸산도 복용 직전에 개봉하도록 돼 있다. 이런 약들은 같이 갈아줄 수가 없다. 누가 약을 먹고 싶지 독을 먹고 싶겠냐”고 강조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의약품정책실 엄승인 상무도 “시판되는 알약은 가장 안전하고 효과성이 뛰어나다고 검증된 상태, 제형으로 나오는 것”이라며 “이를 무시하고 무작위로 가루약으로 만들어 복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도 약계와 의견을 같이했다.

식약처 의약품정책과 정현철 사무관은 “제약회사에서 만든 제형에도 모든 과학이 숨어있다. 알약을 가루약으로 만들면 약물동태가 완전히 달라진다”며 “그렇다고 아예 가루 제형의 약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는 개발비용이 많이 들며 생동성 입증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가루약 조제 지정 약국제, 상종 의약분업 예외지역 지정 등 전체 틀을 바꿀 문제는 아니라면서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복지부 윤병철 약무정책과장은 “전체적인 틀을 바꿀 문제는 아니다. 발생한 문제를 고쳐야할 것이라고 판단된다”며 “현재의 제도를 다듬어서 가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어떤 약이 가루약으로 많이 처방됐는지 등의 추이를 보고 분석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은 개선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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